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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64)화 (863/1,192)

제864화

청막송은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웬일로 화 장로가 황제를 치켜세워 주었지만, 황제는 정사에 관심도 없는 자이니 화 장로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화 장로는 조금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려 위 장로를 바라보았다.

“위 장로께서는 이 일을 어찌 보시는가?”

위 장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 장로는 형법을 관장하는 사람으로서 증거를 가장 중시하네. 이 사건은 증거가 확실하니 이미 명백히 밝혀졌다고 볼 수 있지.”

청막송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마구 고함을 내질렀다.

“난 억울하오. 아버지를 만나야겠소!”

화 장로가 말했다.

“설마 이 일이 청 장로와도 관련이 있단 말인가?”

청막송이 대꾸하려는데, 위 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청 장로의 됨됨이는 내가 잘 알지. 그는 권력으로 사익을 도모하기 위해 이런 몹쓸 짓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니네.”

화 장로는 뜻밖이라는 듯 그를 한번 훑더니 멋쩍게 웃었다.

“나도 청 장로를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었네. 그저 청 공자가 저리 억울해하니 다른 사정이 있을까 봐 궁금했던 것일세.”

내당에 앉아 있던 청 장로는 결국 앞으로 나와 황제에게 예를 갖추고 다시 위 장로에게 예를 갖췄다.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했으니 위 장로는 날 잘 알고 있을 테지. 만약 그때 이 불효자 놈이 한 짓을 알았더라면 지금 이런 사달은 나지 않았을 걸세.”

그가 남제화에게 절을 올렸다.

“폐하, 신의 잘못입니다. 자식을 잘못 가르쳐 엄청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신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나이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글썽였다. 두 가지 해 중 그나마 덜 해로운 것을 택해야 했다. 화 장로는 기회를 틈타 그를 제거하려는 것일 테지. 무성한 산이 있다면 땔나무 걱정은 하지 않는 법. 우선 장로 자리만 지킨다면 다른 건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가 무너지지 않는 한,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청막송은 부친의 언행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참 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청 장로를 불렀다.

“아버지.”

청 장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적장자인 청막송은 어릴 적부터 난폭한 안하무인이었다. 이런 자가 훗날 작위를 물려받으면 가문에 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는 속으로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도 어쨌든 자신의 친자식인데 어찌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남제화는 의자에 편히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청 장로, 일어나시오. 이 일은 공자의 소행이지 장로와는 무관하오. 청 공자는 이미 약관의 나이를 넘긴 지 오래니 자신의 소행에 책임질 수 있을 터. 그러니 청 장로께서 그리 자책하실 필요 없소.”

위 장로는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한번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호위들이 앞으로 나와 청막송을 붙잡고 포승줄로 꽁꽁 묶었다. 청막송은 그제야 두려움을 느끼고는 마구 발버둥 치며 큰 소리로 울었다.

“아버지, 아버지, 살려 주십시오! 저는 억울합니다, 아버지……!”

청 장로는 아들의 뺨을 내리치며 매섭게 호통쳤다.

“이 못난 놈!”

뒤이어 그가 호위들에게 외쳤다.

“당장 데려가거라!”

호위들이 청막송을 끌고 나가자 의사당은 평온함을 되찾았다. 남제화는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위지불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자리를 뜨고, 청 장로만 텅 빈 의사당에 남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어느새 밤이 깊었다. 남원 황궁은 등불을 많이 밝히지 않았기에 아주 어두웠다. 정전의 등불만 환히 밝힌 채 남제화와 위지불가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사실 바둑이라기보다는 남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였다. 동월의 바둑과 모양새는 흡사해도 훨씬 두기 쉬웠는데, 바둑알이 가로 세로로 세 알만 이어지면 이기는 놀이였다.

위지불이는 이 놀이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해서 매일 저녁을 먹은 뒤, 남제화를 졸라 제 앞에 앉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그녀는 흑옥 바둑알을 쥐고 한참 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남제화가 그녀 앞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니 위지불이는 붉어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발견한 그녀는 남제화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남제화는 손목을 돌려 그녀의 주먹을 감싸 가볍게 힘을 풀었다.

“걸핏하면 손부터 나가는 습관은 고쳐야 한다. 강암룡이 봤다면 또 잔소리를 했을 테지.”

요즘 위지불이의 신분은 조금 애매했다. 남제화가 그녀를 애지중지 아낀다는 걸 알고 다들 그녀에게 공손히 대해 주었지만, 위지불이는 총애를 받는다고 오만하게 굴지 않고 아랫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황후처럼 행동한다거나 허세를 부리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흠은 남제화를 너무 편하게 대한다는 것이었다. 가끔 그와 다툴 때면 남들 앞에서 황제를 때리기도 했다. 시종들 눈에는 대역무도한 짓이었지만 황제가 껄껄 웃으니 그들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강암룡은 대총관이기에 황권을 보호해야 했다. 어쨌든 위지불이는 아직 황후가 아니니 대총관으로서 그 정도 말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도 차마 위지불이를 꾸짖을 수는 없기에 노파심에 입이 닳도록 충고했다. 위지불이는 강암룡의 잔소리가 가장 무서웠다. 꼭 불경을 외는 것처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녀만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게 남제화는 왜 그녀 앞에서 군왕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거리의 무뢰한처럼 짓궂은 짓을 일삼으니 손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위지불이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남제화는 꽉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한 것이냐?”

“오늘 조당에서 있었던 일이요.”

위지불이는 자신의 손이 아직 남제화의 손에 쥐어진 사실도 잊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제가 청 장로에게 맞서는 자가 화 장로일 거라고 의심했더니 폐하께서 반만 맞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오늘 유심히 살펴보니까 화 장로와 위 장로가 함께 손을 잡고 청 장로에게 맞서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요?”

남제화가 가볍게 그녀의 손바닥을 매만졌다. 늘 무기를 잡고 훈련을 한 탓에 손바닥 한가운데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의 여인은 응석받이로 자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을 터. 그는 그녀의 반대쪽 손도 가져와 살펴보았다.

“손을 잡은 것도 맞지. 하지만… 사적으로 소통한 적은 없을 거다.”

“제가 봐도 좀 이상해요. 화 장로는 분명 청 장로를 공범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위 장로는 청 장로를 감싸 주었잖아요. 그렇게 보면 꼭 손을 잡은 것 같진 않아요.”

“두 장로 중 한 사람은 배후에서 조종하고 한 사람은 기회를 틈타 들고 일어나려는 것이지. 목적이 서로 다르다.”

남제화의 말에 위지불이는 또다시 알쏭달쏭해졌다.

“청 장로와 장로 선발 문제로 논쟁을 벌인 건 화 장로잖아요. 그러니 그가 배후에서 조종했겠죠. 위 장로는 추천한 사람이 없는데 기회를 틈타 들고 일어난다니… 대체 무얼 위해서예요?”

“네가 말한 반대다.”

남제화가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싸 쥐며 말했다.

“배후에 있는 자가 위 장로고 기회를 틈탄 자가 화 장로지.”

위지불이는 흠칫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위 장로라니, 대체 왜요? 청 장로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거예요?”

“사이가 좋고 안 좋고는 상관없다. 그저 자신의 이익 때문이지. 먼저 손을 써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으니까.”

“두 사람 다 청 장로에게 맞서려는 거라면, 위 장로는 왜 청 장로를 감싸는 발언을 한 거예요?”

남제화가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왜일 거 같느냐?”

위지불이는 인상을 쓴 채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별안간 깨달음을 얻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은 청 장로와 화 장로를 싸우게 한다는 거예요?”

“똑똑하구나.”

그가 그녀의 손을 입술 가까이 가져가 입을 맞췄다.

“역시 짐의 여인이다.”

위지불이는 자신의 손을 휙 빼냈다.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빠르게 번졌다. 하마터면 또다시 손이 올라갈 뻔했다. 이건 제가 난폭한 게 아니라 황제가 시도 때도 없이 음흉하게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그녀도 좋았다.

“위 장로는 청 장로를 도와 청 장로의 분노를 화 장로에게 돌렸지. 이제 청 장로와 화 장로가 싸우기만 기다리면 위 장로는 어부지리로 이득을 얻을 것이다.”

위지불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제 보니 가장 음험한 사람은 위 장로였군요. 평소 잘 웃지도 않고 말수도 적길래 성인군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음험한 사람이었다니. 다섯 장로 중 위 장로 혼자 남게 되면, 새로운 장로를 뽑는다 해도 결국 그가 수장이 되겠죠. 다년간의 경험과 세력, 인맥으로 나머지 장로들을 억압할 테니까요. 위 장로 그자는 머리를 정말 잘 굴리네요. 폐하께 도 장로를 대신할 사람도 추천하지 않고 말이에요.”

남제화가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짐작하는 바도 그러하다.”

* * *

청 장로는 금세 반격에 나섰다. 청막송이 옥에 갇혔으니 빠르게 움직인다면 화 장로를 넘어뜨리는 것은 물론, 아들까지 구할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다.

다섯 장로 중 성인聖人은 아무도 없었다. 십여 년간 함께 했으니 다들 서로를 훤히 잘 알고 있었고, 상대의 흠을 잡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 매매 명단이 남제화의 책상에 놓였다. 남제화는 좀 우스웠다. 다섯 장로가 똘똘 뭉칠 땐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더니… 이렇게 작은 내분으로 서로 개처럼 물어뜯다니. 이런 상황이 되자 모두들 그를 황제로 여기고 자신의 안위를 맡겼다.

남원에서는 능력자가 가장 상위였다. 황실에는 태자가 없고, 남씨 성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황위에 오를 권리가 있었다. 그 당시의 여제처럼 한바탕 격투 끝에 최종적으로 군주가 되는 자가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

조정에서 인력을 뽑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재능이 관원을 선발하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남원은 병력이 약해 오직 훌륭한 관원들이 국가의 안정을 지탱해 주었다. 그런 그 규율을 깨다니. 실로 엄청난 죄업이었다.

남제화도 이 일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고, 여전히 시험이라는 명목 아래 청사가와 오신전에게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청사가가 물 만난 고기처럼 활약을 펼쳤다. 청 장로가 배후에서 도와주는 데다 위 장로까지 암암리에 일을 진행시켜 명단과 관련된 관원들을 일망타진하여 심문하고 자백을 강요해서 많은 양의 자백서를 손에 넣었다.

오신전은 화 장로를 변론하느라 부단히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어쨌든 매매 목록은 실존했고, 그의 이름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 장로는 직접 오신전의 권리를 빼앗고 화 장로를 옥에 가두었다.

화 장로를 끌어내린 청 장로는 단번에 위 장로까지 해치우고 싶었지만, 이번엔 본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가 밝혀졌다. 누군가 그가 조정의 금광을 점유했다는 사실을 고한 것이다. 이는 목숨이 날아가는 대역죄였다.

남제화는 분노가 극에 달해 용삼도에게 위 장로와 함께 이 일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사안의 진상이 밝혀지자, 황제는 그를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그렇게 청 장로는 생을 마감했다.

지금까지 다섯 장로 중 세 명이 목숨을 잃었고 한 명은 중형에 처해져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위 장로와 신진 용 장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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