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2화
위지불이는 예상 밖의 일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위 장로는 추천할 사람이 없대요?”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더구나.”
“뭔가를 알아낸 거 아닐까요?”
“아직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남제화가 말했다.
“위 장로는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라 쉽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지. 일단 미끼를 던졌으니 앞으로 어찌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듯하구나.”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위지불이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제가 용삼도를 보낼게요. 사고로 꾸며 내는 거예요.”
남제화가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이런, 위지 아가씨 수하에 그런 심복이 다 있다니!”
위지불이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폐하, 모르셨죠? 남원의 병권이 지금 제 손에 있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위지불이가 우쭐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이제 전 남원에서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 이거예요. 감히 제게 불경을 저지르는 자가 있거든 끌고 가서 곤장을 내릴 거예요!”
남제화는 기세등등한 그녀의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이마를 찔렀다.
“뭘 그리 우쭐대느냐? 짐은 무려 황제다. 감히 짐에게 곤장을 내릴 수 있겠느냐?”
“만약 그게 폐하라면 말이죠.”
위지불이가 웃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다른 이를 귀찮게 할 것 없이 제가 직접…….”
그녀의 반응을 미리 읽은 남제화는 너털웃음을 보이며 앞으로 빠져나갔다. 그녀는 무예를 익힌 탓에 손이 꽤 매웠다.
* * *
조용했던 날도 잠시, 며칠이 지나자 사달이 났다. 성 외곽의 한 저수지에 별안간 제방 일부가 유실된 것이다. 다들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지 못했다. 폭우가 내린 것도 아니고 홍수가 난 것도 아닌데 어찌 제방이 무너졌단 말인가?
유실 범위는 크지 않았지만, 손실은 제법 컸다. 밭이 물에 잠긴 것은 물론이고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물에 휩쓸려 강으로 떠내려갔다. 농부는 끝끝내 찾지 못했고 당연지사 그의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기에 장로들은 곧장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제방이 터지는 것도 큰일인데 비옥한 토양이 잠기고 백성마저 잃다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의사당을 찾아온 남제화 역시 어두운 안색으로 장로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 장로, 멀쩡하던 저수지의 제방이 어째서 무너졌단 말이오?”
“그것이…….”
청 장로는 수리를 담당했기에 사고가 나자 가장 먼저 문책을 당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답했다.
“폐하, 신이 이미 인력을 파견해 상황을 살폈습니다. 유실된 범위가 그리 넓지 않으니 금방 메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농부는 선박을 띄우고 수영에 능한 수병을 보내 탐색 중입니다.”
남제화가 물었다.
“제방은 메운다 해도, 농부는? 농부도 찾을 수 있는 것이오?”
황제의 낯빛이 어두워지니 청 장로는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건… 신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제화가 묵직하게 코웃음을 쳤다.
“짐은 제방이 왜 무너졌는지 물었소만. 원인은 알아냈소?”
“그것이…….”
땀방울 한 줄기가 청 장로의 관자놀이로 흘러내렸다.
“아직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폐하.”
화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보기에는 제방이 무너진 원일을 찾는 게 급선무일 듯합니다. 근래에 큰비가 온 것도 아니고 지하수가 범람한 것도 아닌데, 까닭 없이 제방이 터지다니요? 그 원인을 찾아 미연에 방지해야 참극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위 장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폐하, 신도 화 장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남제화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하면 이렇게 하지. 도 장로의 뒤를 이을 자로 청 장로는 청사가를 추천했고, 화 장로는 오신전을 추천했소. 이 두 사람에게 제방이 무너진 원인을 조사하게 하여 그들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오. 장로들 생각은 어떻소?”
청 장로와 화 장로 모두 주저했지만, 위 장로가 공수를 하며 대꾸했다.
“폐하께선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훌륭한 방법입니다!”
위 장로가 찬성하니 두 장로도 그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은 황제의 제안대로 진행됐다.
위지불이는 의사당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매섭게 지켜보았다. 남제화가 의사당 밖을 나오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또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틀렸다. 이번 일은 정말 짐과는 무관하다. 두고 보거라. 퍽 볼 만할 테니까.”
* * *
청사가와 오신전은 일을 제법 잘 처리했다. 그는 이 일의 원인을 빠르게 조사해 왔다. 뜻밖에도 당시 저수지를 만들 때 부실 공사를 한 탓에 모래와 자갈의 비율이 달라 이 사달이 난 것이었다.
조사 결과를 듣고 다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특히 청 장로의 안색이 유독 어두웠다. 그가 남제화 앞으로 다가와 죄를 고했다.
“폐하, 신이 직무를 소홀히 하였으니 신의 잘못입니다. 이번 일은 신이 책임지고 철저히 조사하여 백성들에게 사실을 고하겠나이다.”
남제화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원인을 알아냈으니 잘못된 점을 바로잡으면 될 일이오. 철저히 조사하여 이 일의 원흉을 명확히 해야 하오.”
“예, 폐하. 알겠습니다.”
청 장로는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춰 대답했다.
“이렇게 빨리 문제를 찾아냈으니 청사가와 오신전의 공로가 매우 크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지. 해서 짐은 이번 일을 계속 두 사람에게 맡기고 싶은데… 장로들 생각은 어떠하오?”
“폐하 말씀이 옳습니다. 신도 그리 생각합니다.”
가장 먼저 대꾸한 사람은 화 장로였다. 위 장로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동의했다. 청 장로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지만 그는 반대할 수 없었다. 장로제의 의사 결정에는 소수가 다수에 따른다는 원칙이 있었다.
남제화는 담담히 세 장로의 표정을 관찰하더니 손가락으로 다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이내 위지불이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으로 나간 뒤, 그가 위지불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알아보겠느냐?”
“네.”
위지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 장로가 먼저 동의한 건 그가 추천한 사람이 청 장로를 조사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 기회에 청 장로를 몰아내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사람을 앉힐 수는 있으니까요. 그러니 오신전이 분명 이번 일을 철저히 조사하겠죠.
청 장로 수하의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책임자인 청 장로도 벌을 면치 못하겠죠. 이 일로 청 장로까지 몰아낼 수 있다면 장로 자리가 하나 더 비는 셈이니 두 장로에게는 좋은 일이잖아요. 어쨌든 권력을 한몫 더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니까요.”
“해서.”
남제화가 시험하듯 물었다.
“네 결론은……?”
“화 장로요.”
위지불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모든 일은 화 장로가 꾸민 거예요. 자신이 추천한 사람을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 장로에게 오점을 남겨야 했죠. 그래야 그가 추천한 사람이 이길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말을 마친 그녀는 기대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그가 동의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남제화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왜 웃으시는 거예요. 제 추측이 맞죠?”
“반반이다.”
“반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화 장로를 반으로 쪼갠다고요?”
위지불이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남제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자 위지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남제화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말했다.
“폐하죠. 또 폐하가 그 배후인 거예요.”
남제화가 그녀의 이마를 찌르며 말했다.
“기억력이 이리 나빠서야. 짐과는 무관한 일이래도.”
그는 위지불이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 않고 뒷짐을 진 채 앞으로 걸어갔다. 위지불이는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늙은 여우 같은 폐하 짓인데, 인정을 안 하다니.”
* * *
이번 일은 역시나 남제화의 추측대로 흘러갔다. 오신전은 실마리를 따라 천천히 진상을 밝혔고 청 장로의 장자인 청막송淸莫松이 이 일에 연루된 사실까지 알아냈다. 청사가는 어떻게든 이 일에서 청막송을 빼내려 노력했지만, 오신전은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오신전과 청사가는 제방이 무너진 일을 조사할 때만 해도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협력했지만, 책임자를 찾는 일에서는 서로 대립각을 세웠다. 제각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투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 장로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꽁꽁 숨어 있었다. 결국 청사가 혼자 청막송의 결백을 주장해야 했다.
이번 변박은 화 장로와 위 장로가 주재했고, 남제화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길어지자 밖에 서 있는 위지불이의 다리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의자에 앉혔다.
오신전은 증거와 증언문을 두 장로에게 건넸다. 그는 먼저 남제화에게 절을 올리고 다시 두 장로에게 예를 갖춘 뒤, 입을 열었다.
“폐하, 장로 대인. 신이 명을 받잡고 제방이 무너진 일의 원흉을 조사했더니 얼추 가닥이 잡혔습니다. 저수지는 십 년 전에 만든 것으로 청 장로의 독사督事이자 공부工部 관리인 이학옥李學玉이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 총 1년 3개월에 거쳐 완공하였는데 당시 사용한 모래와 자갈은 타곤성 상인 암변곤岩邊昆이 제공했습니다.
이학옥은 처음에 암변곤이 대던 모래와 자갈 비율이 부적합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밀도가 낮아 단단히 뭉쳐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지요. 하지만 암변곤은 청막송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결국 청막송이 직접 중재에 나섰고, 이학옥에게 시장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암변곤의 질 낮은 모래와 자갈을 사게 했지요.
비록 곧바로 사고가 나진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방이 조금씩 침식되었고 결국 오늘날 이 사달이 벌어진 것입니다. 신은 이 일의 책임을 응당 청막송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학옥에게 질 낮은 자재를 쓰게 하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제방이 터질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한 근거를 대며 조리 있게 사건의 전말을 고했다. 청사가가 서둘러 변론했다.
“폐하, 장로 대인. 오 대인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청막송과 암변곤이 서로 아는 사이이긴 하나 각별한 사이는 절대 아닙니다. 암변곤의 부탁에 이학옥을 한번 만나 보겠다고 한 것이지, 강압적인 언행은 없었습니다. 최종 가격 또한 이학옥과 암변곤이 서로 협상한 것이라 청막송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