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61)화 (860/1,192)

제861화

이튿날, 화 장로는 황제를 찾아갔다. 하지만 손에 임명장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는 남제화를 떠보듯 물었다.

“폐하, 도 장로의 후임은 신중히 고민하여 선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과 식량을 만지는 일이 아닙니까. 아무나 들였다가 그 막중한 임무를 망친다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은 물론이거니와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입니다.”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 장로 말이 맞소. 어제 청 장로가 짐을 찾아와 그의 가족을 추천했소. 청사가라는 자라더군. 짐은 그자가 글을 쓰는데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호부 업무를 꼭 잘할 것이라는 확신은 서지 않소. 게다가 도 장로가 살아생전에 그자의 이름을 언급한 적도 없었소. 그 말은 그리 중시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뜻일 터.

마침 짐도 이 일로 고민 중이었소. 청 장로가 꺼낸 말이니 체면을 깎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청사가를 임명하기에는 짐도 조금 탐탁지 않으니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오. 화 장로께서는 추천하실 만한 인재가 있으시오?”

화 장로는 그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다. 청 장로가 그들을 속인 것이다. 제 의견을 황제의 뜻인 양 굴다니. 정말 음험하기 짝이 없는 자였다. 그가 오늘 황제를 찾아와 상황을 확인했으니 망정이지, 임명장을 가져왔다면 황제는 청 장로의 체면을 봐주어 금인을 찍어 주었을 것이다. 그럼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겠지.

사실 다섯 장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화목해 보였지만, 십여 년간 저마다 머리를 굴리며 암암리에 자신의 세력을 키워 왔다. 왜 청사가가 도 장로의 수하로 있었겠는가? 당연히 청 장로가 보낸 것이었다. 그라고 위 장로 수하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지 않았을까.

그들은 서로의 꿍꿍이속을 다 알고 있었지만 말만 하지 않을 뿐이었다. 청 장로가 앞장섰으니 화 장로 또한 뒤처질 수는 없었다.

“폐하께서 그리 물으시니 말씀드리자면, 실은 신도 생각해 둔 적임자가 한 명 있사옵니다.”

화 장로가 소매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오신전伍迅典이라는 자인데 호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재능과 능력이 뛰어나 도 장로의 신임을 얻었고, 훗날 도 장로가 직접 형부 전옥장典獄長(옥사의 우두머리)을 맡도록 추천해 주었지요. 신이 보기에 이 자라면 분명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도 장로가 역모의 마음이 있었을지언정, 사람을 보는 눈은 뛰어나지. 도 장로의 눈에 든 자라면 분명 훌륭한 자일 터. 하면 급하게 결정할 것 없이 짐이 충분히 고민한 뒤에 결정을 내리겠소. 재능이 있는 자라면 쉬이 묻혀지지 않는 법이니.”

화 장로는 황제가 자신의 의견에 더 마음이 기운 것 같아 보여 그나마 안심이었다. 그는 예를 갖춘 뒤 자리를 떴다.

화 장로가 떠나자 병풍 뒤에서 자그마한 계집이 나타났다. 그녀가 웃으며 남제화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폐하, 참 나쁘십니다.”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넌 나쁘지 않고? 굳이 병풍 뒤에 숨어 다 엿듣다니.”

그가 위지불이를 곁으로 끌어와 자신의 찻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마시거라.”

위지불이는 싫은 기색으로 그를 흘겼다.

“폐하, 어찌 이리 세심하지 못하시어요. 폐하께서 드시던 걸 저더러 마시라니.”

“이런.”

남제화가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천하에 오직 너만이 짐이 마시던 차를 마실 수 있는데, 이리 영광스러운 일을 싫어하는 것이냐? 네게 입을 맞출 땐 어째서 싫은 기색을 내지 않고?”

위지불이의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꺼내다니…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그녀는 결국 그의 찻잔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처음엔 조금 쓴 맛이었지만, 뒷맛은 제법 달콤해서 갈증을 해소하기 좋았다. 그녀는 결국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것 보아라.”

남제화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입으로는 싫다 하면서 실은 원하지 않느냐. 하여간 겉과 속이 다르다니까.”

반박할 말이 없자 위지불이는 그를 힘껏 때렸다. 하지만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남제화를 바라보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가 이러시는 걸 보니… 정말 위안이 되네요.”

“내가 음모와 계략을 꾸미는 게 위로가 된다고?”

“폐하께서 황권을 되찾으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 걸요.”

“불이.”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일로 네가 날 경멸하진 않겠지?”

그는 위지불이가 이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계집을 속이는 건 쉽지 않았다. 날마다 함께 붙어 있으니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게 뭐라고요.”

위지불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폐하는 너무 인자했어요. 우리 동월 황제였다면 분명 다 죽여 버렸을 거예요.”

“…….”

묵용감의 성격이라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황제가 되면 어쩔 수 없이 모질게 굴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너무 망설이지 마세요.”

남제화는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남원의 상황은 동월과 다르다. 장로들 다섯이 십여 년간 권력을 장악했지. 그들이 암암리에 키워 온 세력이 이미 남원의 모든 곳을 뒤덮었다. 만약 그들이 연합하여 짐에게 맞서면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차례로 격파해야 짐에게 겨우 승산이 있단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권력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거부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다. 그들이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인간은 다 이기적인 존재니까.”

“천하가 그자들 것도 아닌데요. 신하가 군주를 섬기지 않고 오히려 군주의 권력을 탐하다니요. 그런 신하가 바로 역적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폐하의 황위를 뺏지 않은 거예요? 애당초 자신들이 직접 왕을 하면 그만 아닌가? 이런 상황을 십 년이나 넘게 유지하다니요.”

“다섯 장로 중에 누구를 황제로 뽑아야 한단 말이냐?”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왕위를 위해 또 내분이 일지 않겠느냐?”

“저들이 지금 이러는 것도 내분을 일으키는 거잖아요?”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그 당시 그들은 자신들이 똘똘 뭉쳐야 대외적으로 승산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십여 년이 흐른 뒤, 각자의 세력이 생겼으니 이제는 서로 승복하지 않는 것이지.

사실 갈등은 진작부터 있었는데 겉으로만 화목하게 지낼 뿐이란다. 초봄의 호수 표면과 같다고 할 수 있지. 겉으로 보기엔 두꺼운 얼음이 언 것 같은데 그 밑은 진작에 녹아 버린 것처럼 말이다. 분열이 오래되면 반드시 통일되고, 통일이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된다는 옛말도 있지 않느냐.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내가 지금 저들을 도발하지 않더라도 몇 년 뒤쯤 저들이 알아서 소란을 피울 것이다. 사람은 탐욕이 생기면 그 욕심의 자리는 다른 것으로 메우기 어려운 법이거든.”

위지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폐하께서도 이제는 욕심이 생기셨어요?”

“그럼.”

남제화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짐의 욕심은 바로 너다.”

위지불이는 물론 믿지 않았다. 그녀와 천하 중 어느 것이 중요한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는가. 위지불이가 남제화를 보고 미소 짓자 그가 그녀의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위지불이가 입술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폐하, 이제 청 장로와 화 장로 두 사람은 판 위에 올렸지만, 아직 위 장로가 남아 있어요.”

“짐은 늘 공평하지.”

남제화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사람만 빼놓으면 안 될 일이고말고.”

* * *

이튿날, 그는 위 장로를 불러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청 장로가 짐에게 도 장로를 대신할 사람을 추천했소. 하지만 화 장로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지. 해서 그 또한 짐에게 다른 사람을 추천했소. 오신전이라는 자인데, 전옥장을 맡는 자라더군. 위 장로도 아는 자요?”

위 장로는 황제의 말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청 장로와 화 장로가 그리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장로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암암리에 자신의 측근을 다른 장로 수하에 심어 두었다.

다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굳이 폭로하진 않았다. 화 장로가 추천한 오신전을 도 장로가 수하로 둔 건 사실이었다. 도 장로 역시 제 곁에 첩자를 두고 싶진 않았지만 서로의 체면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도 장로가 오신전을 전옥사로 보낸 것 아닌가. 보아하니 이번에 화 장로는 오신전을 도 장로의 자리에 앉히려는 듯했다.

그는 너른 소맷자락을 쓸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섯 장로가 오랜 시간 협력한 건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외부인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장로들은 직접 느끼고 있었다. 미세한 균열들이 시간 속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도 장로의 일이 있고 난 후엔 마치 나무상자에서 판자 하나가 빠진 듯한 형세가 되어 버렸다. 그 바람에 안에 고여 있던 물이 콸콸 흘러나와 버렸다. 그는 줄곧 불길한 예감을 느껴왔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예감인지 정확히 짚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황제의 말을 듣고 있던 그는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그간의 균형이 깨졌으니 모두들 각자의 패를 내보일 때가 된 것이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오신전은 신도 잘 압니다.”

“위 장로가 보기엔 어떻소? 호부의 직책을 믿고 맡겨도 되겠소?”

“그자는…….”

위 장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른 건 괜찮은데, 조금 무책임한 성격입니다. 지난번에 한 죄수가 옥사에서 난동을 피웠습니다. 그러자 그자가 죄수를 마구 때리고는 그 자리에 버려둔 채 자리를 떴지요. 의원을 부르는 것도 잊는 바람에 결국 그 죄수는 그날 밤 목숨을 잃었습니다.”

옥에 갇힌 죄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옥사의 우두머리로서 충분히 훈계할 수 있었다. 손찌검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해도 죽게 내버려 둬선 안 됐다. 남원은 인구가 많지 않아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매우 귀중한 목숨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남제화의 안색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남제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악랄하기 그지없는 자로군. 장로의 말대로 너무 무책임하오.”

말을 마친 그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런 자에게 호부를 맡기다니… 안 될 일이지! 안 될 일이야. 위 장로, 위 장로가 추천할 만한 사람은 없소?”

위 장로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저었다.

“폐하, 신은 마땅히 추천할 사람이 없습니다.”

남제화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하면 위 장로가 한번 유심히 눈여겨보시오. 도 장로를 대신할 사람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짐이 늘 걱정이오.”

“예, 폐하. 그리하겠습니다.”

위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제화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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