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0화
그런 그의 태도에 조금 민망했던 화 장로는 껄껄 웃으며 애써 민망함을 감췄다.
“예전에 옥 장로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 장군이 진정한 용사라더군. 옥 장로도 저승에서 장군이 중임을 맡게 된 사실을 알고 있을 걸세. 분명 큰 위안이 되겠지.”
용삼도는 가만히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연달아 두 번이나 무시를 당하자 화 장로도 더는 말을 걸지 않고 제 자리에 앉았다. 청 장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장군이 한 성격 하는 건 문제 될 게 없지. 앞으로 우리와 오래 만나다 보면 장군도 우리의 됨됨이를 알 걸세. 우리가 사직을 위해 일을 도모하고 폐하께 충성을 다한다는 것만 알아 주면 되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용삼도의 표정을 살피며 웃음을 터뜨렸다.
“장군이 장로에 입각하였으니 어깨가 아주 무겁겠군 그래. 지금은 폐하께서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시어 내각 장로들이 일심동체로 결정을 내리고 있지. 용 장군,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는가?”
그의 말은 사람은 바뀌었어도 국면은 바뀌지 않았으니 그 자리에 앉은 자는 반드시 그들과 한뜻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용삼도가 잠시 침묵하더니 청 장로를 바라보았다.
“저는 무식해서 조정의 일은 모르고 오직 병사를 거느리는 것만 압니다. 본 장군의 직책은 남원을 지키는 것일 뿐, 그 외의 것들은 아무런 관심 없습니다. 오늘 이곳에 온 것도 장로들께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전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 이곳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세 장로는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용삼도 이자가 그들과 한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의 태도는 장로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그들 생각엔 이제 막 장군이 된 부장이 의사당에 들어온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의사당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남원의 최고 권력 기관에 들어와서 그들과 함께 공무를 결정하며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한데 용삼도 그자가 그들과 한 무리가 되는 걸 거절할 줄이야.
남은 세 장로는 순간 위기의식을 느꼈다. 줄곧 침묵을 지키던 위 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삼도가 우리와 뜻을 같이하지 않으려 함은, 이미 폐하께 빌붙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어찌 병권을 넘겨주셨단 말인가?”
화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다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군.”
청 장로가 말했다.
“세상일엔 관심을 갖지 않던 폐하께서 별안간 권력을 되찾으려 하시겠는가? 난 그저 기우라고 보네. 옥 장로는 죽기 전 병부를 폐하께 넘겼네. 만약 폐하께서 권력을 빼앗으려 하셨다면 병권을 손에 쥐고 계셨겠지, 무엇하러 옥 장로의 부장에게 넘겼겠는가? 용삼도는 옥 장로가 생전에 가장 신임하던 사람인데 말일세.”
듣고 보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청 장로의 말대로라면 용삼도는 그저 독립된 세력에 불과했다. 권력이 분산되는 것은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그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기에 나쁜 일도 아니었다.
장로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들 셋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 장로가 말했다.
“폐하께 도 장로의 공석을 보충해 달라고 청을 드려야 할 걸세. 이미 병권은 다른 이에게 갔으니 독립 세력이 구축되어 삼자 대립 국면에 서면 우리 세력이 크게 위축될 것일세. 그리되면 일을 처리하기 곤란해질 걸세.”
위 장로가 맞장구를 쳤다.
“화 장로의 말이 맞네. 우선 도 장로의 빈자리를 메워야 하네. 반드시 우리 사람으로 채워야 해. 다들 추천할 만한 자가 있는지 잘 고민해 보게.”
그렇게 세 장로는 의사당에 앉아 도 장로의 자리에 어떤 인물을 앉힐지 고민했다.
* * *
세 장로가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용삼도는 성큼성큼 화단을 가로질렀다. 곁눈으로 누군가를 발견한 그는 발걸음을 늦췄다. 한 여인이 방금 딴 꽃을 품에 안은 채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몸을 한쪽으로 틀어 그녀가 먼저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용 장군님이세요?”
“맞습니다, 위지 아가씨.”
“절 아세요?”
“폐하께서 위지 아가씨를 데리고 출전하셨으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위지불이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요. 폐하께 듣자니 예전에 저희 공자와 함께 지내셨다고요?”
늘 무표정하던 그가 그녀의 말에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읊조리듯 말했다.
“일찍이 남 장군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장군께서 너무 일찍 떠나셨지요.”
지난번 남제화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용삼도가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는 위지문우의 후대의 여인이 그의 곁에 있어서라고. 그녀는 남제화의 말이 거짓인 것 같아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용 장군, 공자께선 안 계시지만 제가 있잖아요. 저한테 충성을 다하면 공자한테 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
위지불이는 용삼도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침묵을 지키자 민망한 듯 건조하게 웃었다.
“하하, 원치 않으시면 괜찮아요. 그냥 한 말이니까요.”
용삼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지불이는 더욱 민망해져서 마구 손을 휘저었다.
“아이고, 그냥 농담한 거예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귀까지 빨개진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때, 용삼도가 입을 열었다.
“제 맹세는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위지 아가씨, 앞으로 분부하실 일이 있거든 말씀만 하십시오. 아가씨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것입니다!”
“…….”
세상에… 진짜였다니. 그녀에게도 자신의 심복이 생긴 셈이었다…….
* * *
사실 남원의 장로제는 동월의 관제를 본뜬 것인데, 권력을 다섯 장로에게 고르게 나눠 주는 제도였다. 그래서 모든 장로는 저마다 자신의 관할 범위를 가진다.
옥 장로는 병권을 갖고, 청 장로는 수리水利를 관장하며 도로를 닦거나 둔전屯田(궁과 관아에 속한 토지) 등 각종 공사와 보수 업무를 맡았다. 화 장로는 관원들의 임명과 시험, 진급, 배치 등의 업무를 관리했고, 위 장로는 형옥刑獄과 관련된 사무를 관장했다. 죽은 도 장로는 호적과 세수, 재정 업무를 담당했다.
지금 병권이 용삼도에게 갔으니 세 장로는 도 장로의 자리를 메울 관원이 급히 필요했다. 단,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반드시 그들과 뜻을 함께할 자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도 장로가 관장했던 호부는 엄청난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관직이었다. 금은보화가 걸린 문제이니 세 장로는 저마다 누굴 뽑을지 미리 계산해 두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 공명정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청 장로가 황제의 부름을 받았다.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는 서둘러 황제를 찾아갔다. 남제화는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온화하고 친근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청 장로, 어서 와 앉으시오.”
청 장로가 예를 갖추고 커다란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폐하, 신을 어인 일로 부르시었습니까?”
남제화는 골회 자기 찻잔에 든 차를 천천히 들이켜며 말했다.
“장로들이 부지런히 정사를 돌봐 주신 덕에 짐은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소. 다섯 장로 중 한 사람이라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법. 도 장로가 떠난 후로 줄곧 인원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들었소. 해서 청 장로에게 추천할 만한 인재가 있을지 궁금해서 불렀소. 서둘러 결원을 메워야 짐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청 장로는 곧장 마음이 동요되었다. 황제가 공무에 관여치 않는다 하더라도 황제가 가진 금인은 반드시 필요했다. 모든 관원의 임명장에는 황제의 금인이 찍혀야 비로소 효력을 가졌다. 황제가 무슨 연유로 그를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건 중요한 기회였다. 잠시 뒤, 그가 입을 열었다.
“폐하, 신도 이 일을 줄곧 가슴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다만 내각에 사람을 들이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요. 더욱이 호부를 관장하는 일이 아닙니까. 해서 오랜 시간 고민해 보았는데, 한 사람이 떠오르더군요. 폐하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폐하께서도 분명 기억하실 겁니다.”
청 장로가 웃으며 말했다.
“청사가淸思柯라는 자인데, 신의 가족이긴 하나 친분을 막론하고 봐도 현명한 자입니다. 재능이 정말 뛰어난 자이지요. 예전에 그가 지은 글을 보시고 폐하께서 칭찬을 하셨습니다.”
남제화가 말했다.
“그래, 짐도 기억이 나는군. 청사가, 이름도 멋진데 글도 아주 잘 썼던 것으로 기억하오. 그때 그 글 제목이… 뭐였더라?”
“파수부岜水賦입니다.”
“그래, 맞다, 맞아. 짐도 기억하오. 파수부.”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재능이 뛰어난 자인 건 분명하고, 지금은 무얼 하고 있소?”
“도 장로 수하에서 보좌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부 업무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신의 생각에는 그에게 도 장로의 자리를 맡기는 게 가장 적합할 듯합니다.”
“그래. 재능도 있고 호부 업무에도 익숙하니 정말 적임자가 따로 없군. 만약 두 분의 장로들도 이의가 없다면 화 장로에게 임명장을 가져오라고 하시오. 짐이 금인을 찍을 테니.”
“예, 폐하.”
청 장로는 웃음이 새어 나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제의 인정도 받았으니 이미 확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청사가는 자신의 사람이니 그가 장로가 된다면 내각에 청 씨 성을 가진 장로가 둘이나 되는 것이었다.
비록 다섯 장로가 한 몸이긴 하나, 일부 중차대한 사항에선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측근이 내각에 들어온다면 그로서는 손에 권력을 하나 더 쥐는 셈이니 아주 좋은 일이었다.
이튿날, 그는 의사당에서 이 일을 언급했다. 화 장로와 위 장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서로 눈빛만 주고받았다.
어제 접한 소식으로는 청 장로가 황제를 찾아가 서재에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온 청 장로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다지. 오늘 일과 연관 지어 보니 청 장로가 어제 황제를 찾아가 무슨 말을 했을지 너무 뻔했다.
응당 세 장로가 상의해야 할 일을 청 장로 홀로 황제를 찾아가 논하다니… 이는 명백히 규율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두 장로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청 장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내가 추천한 것이 아니라 폐하께서 어제 날 부르시어 이 일을 먼저 꺼내셨다네. 예전에 폐하께서 청사가의 글을 칭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인상 깊게 남으신 것 같네. 거기다 도 장로의 수하에서 일했다는 것까지 아시고 이런 제안을 하셨네. 폐하의 뜻이니 두 장로께서도 이의 없으실 것 같은데.
폐하께서 이 일로 근심이 크시네. 더는 시일을 늦출 수 없다며 금인을 찍어 줄 테니 화 장로에게 서둘러 임명장을 작성해 오라고 하셨네.”
그는 말끝마다 황제를 들먹였다. 화 장로는 위 장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청 장로에게 대꾸했다.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