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59)화 (858/1,192)

제859화

누각에서 내려온 아포 족장은 아운소가 나무 아래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운아.”

그가 가까이 다가갔다.

“무슨 생각 중이냐?”

아운소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아버지.”

아포 족장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비를 걱정하는 것이냐?”

아운소도 그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남원의 황제는 심계가 아주 깊은 사람입니다. 그자와 협력하다가 아버지께서 손해를 입으실까 걱정입니다.”

아포 족장이 손을 휘저으며 주변의 가옥과 숲을 가리켰다.

“남원의 황제가 무슨 심산이든, 이 땅이 이미 파목 부족의 것이 되었다. 안 그러냐?”

아운소가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혁흑철 부족의 근거지였다. 배산임수에 가옥도 밀집해 있고 소와 양은 떼 지어 다녔다. 풍경과 전망이 좋고 토지도 비옥한 아주 좋은 땅이었다. 사방이 고요해서 바람에 나뭇잎이 스쳐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났다. 나무줄기에 검붉은 피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유추하지 못할 것이다.

남원은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가 아니었지만 부족들의 사정은 달랐다. 그들은 서로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자주 충돌했다. 파목 부족에게 전쟁은 별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혁흑철 부족을 단번에 전멸시키고 그들의 터전을 빼앗는 일인데, 남원 황궁과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아포 족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다들 남원 황제가 권력을 중시하지 않는다던데, 이제 보니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아운소가 말했다.

“한 소문이 십 년이나 전해졌다면, 그건 소문이 아니지요.”

아포 족장이 아운소를 멍하니 바라보며 물었다.

“운아, 어찌 그리 말하는 것이냐?”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불이를 위해서라면 폐하께서는 뭐든 다 하실 분이에요. 폐하께서 위지불이를 정말 은애하신다는 걸 이젠 믿겠어요.”

아포 족장도 자신의 밀정에게 위지불이라는 자에 대해 들었었다. 듣자 하니 그 동월 여인을 처로 맞아 황후로 세운다지? 그는 그 소식을 듣고 그저 한번 웃어넘겼다. 사내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라와 영토이거늘, 한낱 여인이 뭐라고.

“남원 황제가 한 모든 짓이 다 그 여인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느냐?”

“아버지께서는 모르시겠지요. 폐하께서는 불이를 위해 태황과 거래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족의 공주를 입궁시킨 것이고요. 처음부터 폐하는 우리를 궁에 남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건 아포 족장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남원 황제는 참 다정다감한 사람이구나.”

아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폐하가 대체 왜 아버지와 손을 잡고 혁흑철 부족을 멸한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포 족장이 말했다.

“권력은 중시하지 않아도, 남원의 황제로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를 용인할 수 없었겠지. 병권을 가져오려면 구실이 필요했을 테니, 때마침 혁흑철 부족에게 칼을 들이댄 것이지.”

“남원에 부족이 이리 많은데, 어째서 아버지와 협력을 한 걸까요?”

“폐하는 이 아비가 진정한 부족 사람이라는 걸 알았겠지. 난 평생 산을 떠나지 않을 테니, 남원 황실에 위협이 되지도 않을 거고. 그리고 폐하가 아비에게 이런 얘길 하더구나. 운아, 네가 불이 아가씨의 친우라면서? 불이 아가씨가 믿는 사람은 그도 믿을 수 있다고 말이다. 사실 이 아비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진짜인 듯하구나.”

“폐하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어요?”

“아비가 널 속여 무엇 하겠느냐?”

아운소는 고민에 잠긴 듯 먼 곳에 있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아버지, 운아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불이가 믿는 사람은 저도 믿어요. 앞으로 우리 이 숲을 지키며 살아가요. 혁흑철 부족의 전철은 절대 밟지 말자고요.”

아포 족장은 그녀의 말이 조금 뜻밖이었다.

“운아, 넌 불이 아가씨와…….”

옛일이 떠오른 아운소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잊으셨어요? 하마터면 제가 위지불이를 훔쳐 올 뻔했었다고요. 폐하께서도 그 이유 때문에 저를 돌려보내신 거잖아요?”

그 일은 아포 족장도 다 알고 있었다. 줄곧 남원 황제의 모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니. 정녕 남제화는 여인 한 명 때문에 제 걸림돌들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있는 것인가?

* * *

용맹한 황제가 일만 병사를 무사히 이끌고 개선했다. 위풍당당한 행렬이 동쪽 성문에 들어서자 수많은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쳤다.

말에 올라탄 남제화는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황가에서 태어나 존귀한 남씨 성을 가진 이었지만, 성격은 자유분방하고 소탈했다. 존귀한 핏줄을 타고 났지만 그는 여제의 날개 뒤에 가려져 살아야 했다. 그 때문에 이 천하를 제대로 본 적이 드물었다. 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여제가 황위에서 물러난 뒤 그가 황제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분노에 휩싸인 채 하루하루를 헛되이 흘려보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얼굴을 보자 그는 제 어깨 위에 올려진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날 밤, 남원 황궁에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관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연회에 참석했다. 거대한 궁전 안에 기다란 탁자가 줄지어 놓였고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차려진 음식과 좋은 술이 올라왔다. 전당 중앙에는 은은한 곡조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들이 보였다.

춤사위에 따라 발과 허리에 달린 은방울이 끊임없이 울리며 모든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흥이 남다른 남원의 백성들은 무희의 춤사위를 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병사들이 무대에 나와 무희들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하자 전당 안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번 연회에서 남제화는 용삼도를 대장군으로 봉했다. 이는 병권을 용삼도에게 맡긴다는 의미였다. 이 소식에 몇몇 사람들은 남제화가 한가로운 황제로 남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특히 세 장로가 그러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옥 장로의 죽음을 수상쩍다고 여기며 남제화가 암암리에 권력을 빼앗았다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얻은 병권을 어찌 다른 이에게 넘기겠는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옥 장로의 측근에게 넘겨주었다. 다섯 명의 장로는 애당초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용삼도가 옥 장로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니 예전과 달라질 건 하나 없었다.

이 일에 의혹을 갖는 건 위지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슬쩍 남제화에게 물었다.

“용삼도는 조금 흉악해 보이는데… 믿을 만한 사람인가요?”

남제화가 그녀의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저자가 옥 장로 밑에 있기 전, 누구 밑에 있었는지 아느냐?”

“누구 밑에 있었는데요?”

남제화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공자.”

말을 마친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부딪쳤다.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슬쩍 입을 맞췄다는 사실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공자의 사람이었군요…….”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잖아요. 그 후로는 줄곧 옥 장로를 따랐으니 충심도…….”

“걱정할 거 없다.”

남제화가 시선을 들어 올리고 왼쪽 아랫자리에 앉은 용삼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서 그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모시던 이의 죽음에 괴로워하지도, 대장군의 지위를 얻은 것에 기뻐하지도 않았다.

“남원의 사내는 한번 충성을 맹세하면 평생 그 맹세를 깨지 않는다. 위지문우가 죽은 뒤, 옥 장로가 병권을 가져갔고 용삼도는 여전히 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진정 자신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위지문우지…….”

위지불이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자가 모시는 주인이 우리 공자뿐이라면, 어째서 폐하의 요구를 승낙한 거죠?”

“바보 같긴, 너 때문이지. 넌 위지문우의 후대가 아니더냐.”

위지불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니까 폐하 말씀은… 저자가 지금 저한테 충성을 다한다는 뜻이에요?”

* * *

여제는 높게 걸린 유리 등잔 밑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폐하가 겨우 손에 넣은 병권을 또다시 옥 장로의 부장에게 넘겼다?”

은색 가면을 쓴 자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답했다.

“예, 전하. 폐하께서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언하셨습니다. 장로들도 뜻밖이라는 반응입니다.”

여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황제가 병권을 포기한 게 장로들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서인 것 같더냐? 아니면 진정으로… 뜻이 없는 것 같더냐?”

은색 가면을 쓴 자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소인이 감히 폐하의 뜻을 속단할 수 없지만, 그간 곁에서 폐하를 지켜본 바로는 후자일 듯합니다. 위지불이 외에 폐하께서는 그 어떤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십니다.”

여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위지불이는 어떠하냐?”

“늘 폐하 곁에 머뭅니다. 황후 책립은 그 후로 언급하진 않으시지만, 위지불이를 늘 곁에 두십니다.”

여제는 귀밑머리를 손가락으로 몇 차례 쓸어내리더니 주위를 서성거렸다. 화려한 치맛자락이 아름다운 공작의 꼬리깃처럼 매끈한 바닥을 소리 없이 쓸었다. 그녀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미인 나마저도 폐하의 생각을 통 읽지 못하겠구나.”

거만하고 방자한 도 장로. 그가 부족과 결탁한 것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니 그의 말로가 불행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옥 장로는? 옥 장로는 정말 전쟁 중에 목숨을 잃은 거란 말인가? 잇달아 두 명의 장로가 사라지자 그녀의 의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어렵사리 가져온 병권을 다시 넘기다니… 그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만 가 보거라. 다른 소식이 있거든 곧장 보고하고.”

“예, 태황 전하!”

은색 가면을 쓴 자는 예를 갖추고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 * *

용삼도는 처음으로 의사당에 들어섰다. 이제 막 병권을 넘겨받은 그는 맨 끝 대열에 서야 했다. 세 장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병권을 가진 장군이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화 장로가 가장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가 활짝 웃는 낯으로 용삼도를 바라보았다.

“용 장군, 이곳에 처음 와 보니 어떠한가? 많이 낯선가?”

용삼도는 가벼운 성격이 아니었기에 화 장로의 환대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읍했다.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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