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8화
옥 장로는 황제를 바라보더니 눈을 밝히며 용삼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폐하, 적군을 추격하는데 어찌 고생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명색이 부수副帥인데,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신이 어찌 감히 폐하의 위험을 못 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응당 폐하 곁에서 세심히 보필해야 하지요.”
남원에서 이천의 정예병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만일에 대비해 반드시 옆에서 그들을 지켜야 했다. 남제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짐은 무공이 뛰어나서 괜찮지만, 장로는…….”
“신, 비록 폐하의 실력에 미치진 못하지만, 스스로를 지키는 건 충분합니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군주이십니다. 신이 어찌 감히 폐하를 혼자 보내는 잘못을 범하겠나이까?”
그가 군신의 도리를 피력하자 남제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소. 장로도 짐과 함께 적을 쫓으시오.”
옥 장로가 용삼도를 보며 말했다.
“삼도가 폐하를 호위하게.”
“예, 장로.”
용삼도는 두 눈을 드리운 채 공손히 답했다.
그렇게 남제화, 옥 장로, 용삼도는 이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다. 나머지 칠천은 그곳에 주둔했다.
* * *
사흘 후, 추격 부대가 돌아왔다. 떠날 때만 해도 총수 한 명, 부수 한 명, 부장 한 명이 있었는데 돌아와선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옥 장로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천의 정예병도 모두 그대로였다. 일부 부상자가 있었지만 중증이 아니었고 여전히 행군이 가능했다.
좋은 소식은 남제화가 정예병을 데리고 끝까지 추격하여 적의 근거지까지 찾아갔다는 것이다. 아포 족장도 약속대로 그들 부족의 병사들을 데리고 신속히 도착했고, 남원의 병력과 함께 연합하여 혁흑철 부족을 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아포 족장은 혁흑철 부족 아래에 있던 지역을 접수했다. 그렇게 이번 전쟁은 원만히 수습되었다.
나쁜 소식은 옥 장로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칼에 베여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용삼도가 이 소식을 발표했는데, 침통한 그의 표정에 옥 장로의 측근들도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저 누가 뒤이어 병권을 갖게 될지 궁금할 뿐이었다. 용삼도는 장로의 죽음을 발표하고는 뒤이어 말했다.
“장로께서 임종 전, 병부를 폐하께 넘기셨다. 이제부터 모든 이들은 폐하의 명령을 따른다!”
옥 장로의 측근들은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옥 장로는 암암리에 자신의 아들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키던 중이었다. 아들에게 그의 자리를 넘겨주려던 계획 아니었는가? 어찌 갑자기 황제에게 병부를 넘긴단 말인가.
다들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손에 병부를 쥔 채 매서운 눈길로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고상하고 한가한 황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남원의 왕이 된 것이다.
옥 장로의 죽음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용삼도의 말을 의심할 수도 없었다. 그가 옥 장로의 신임을 받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군 안에서도 신망이 높은 이가 용삼도였다. 그걸 확인하듯 그가 선창하자 나머지 장병들도 큰소리로 외쳤다.
“폐하 만세!”
“폐하 만세!”
“폐하 만세!”
우렁찬 함성이 숲속을 가를 듯 울려 퍼졌다. 남제화는 말에 올라탄 채 그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매서웠던 그의 눈매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날 밤, 야영 중 작은 소란이 있었다. 한밤중 볼일을 보러 나온 누군가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떨어진 것이다. 다음날 남제화는 특별히 이 일을 언급하며 앞으로 밤중에 볼일을 보러 갈 땐 두 사람이 짝이 되어 함께 가라고 분부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사고가 나기 십상이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다.
그저 사고에 불과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황제는 매우 신중하게 받아들였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병사를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다. 군주의 갸륵한 마음에 병사들도 큰 감동을 받았다. 황제가 어질고 선한 것은 그들의 복이 아니겠는가. 병사들은 황제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다.
하지만 옥 장로의 측근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실족한 병사는 옥 장로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었다는 것을. 어젯밤 그들은 한데 모여 옥 장로의 사인死因을 비밀리에 조사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한데 논의하자마자 그가 그렇게 죽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의 죽음은 실족사가 맞을까?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대열을 정비해 다시 돌아갈 때에는 이미 이 일을 언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 *
위지불이는 줄곧 막사에서 지냈다. 매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그건 그녀가 갑자기 부지런해진 게 아니라 잠을 쉽게 들지 못해서였다. 궁에서는 금방 잠에 들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이날도 아침 일찍 잠에서 깬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소리쳤다.
“위지 아가씨, 황상께서 승리를 거두시고 병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위지불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할 시간조차 없는 듯 한달음에 산비탈을 뛰어올랐지만, 산길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찌 된 일인지 물으려는 찰나 위지경용이 다가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저 사람을 보내 소식만 먼저 전한 것인데, 어찌 그리 서두르는 것이냐? 그리 빨리 오시진 않을 테니 어서 돌아가 머리라도 빗거라. 그리 산발을 해서는.”
위지불이는 헝클어진 머리를 꽉 쥐며 민망한 듯 웃었다. 그녀는 다시 막사로 돌아가려다 또 아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빼고 멀리 내다보았다. 산 뒤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선두에 선 자는 비범한 기백을 내뿜고 있었다. 포근한 아침 햇살을 뚫고 모든 이들의 주목을 끌 만큼 위용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뛴 위지불이는 산비탈을 뛰어 내려갔다. 위지경용이 등 뒤에서 중얼거렸다.
“다 큰 숙녀가 저리 조심스럽지 못해서야.”
남제화도 저 멀리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여인을 발견했다. 금갑을 입고 긴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다가오는 저 여인. 저 여인이 위지불이가 아니면 또 누구겠는가?
순간 그는 가슴이 녹아내려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 뒤에서 아침 해가 힘차게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태양보다 더 밝게 그의 온 세상을 비추었다. 그도 말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황제가 말에서 뛰어내려 여인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한참 뒤, 누군가 조용히 감탄했다.
“폐하께선 정말 감정에 진실한 분이시군!”
남제화도 자신이 일국의 군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여인 앞에선 군주의 체통도 쓸모없는 것이 되곤 한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저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고 싶었다.
남제화가 두 팔을 벌렸다. 그의 품으로 돌진한 위지불이는 탄탄한 그의 허리가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았다.
“폐하, 돌아오셨군요.”
하늘과 땅에 감사하고 부처님께 감사한 일이었다. 비록 그가 무탈할 것이라고 믿으며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두려웠다. 어쨌든 전쟁이 아니던가. 칼과 창이 어디에서 날아들지 알 수 없으니 아무리 무공이 뛰어난 자라 해도 늘 조심해야 했다. 그런 그녀의 걱정을 아는 듯, 그가 마침내 돌아왔다. 그간 둘 곳 없이 불안하던 그녀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래, 돌아왔다.”
남제화도 그녀를 꼭 껴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당장 이 자그마한 여인을 자신의 몸에 품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가 그녀를 이곳에 둔 건 그녀를 지키기 위함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음모와 모략, 피투성이가 된 학살까지…….
그는 딱히 야심도 없고 권력도 탐내지 않는 무욕무구無欲無求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니 그토록 얕보던 권력을 다시 되찾아 와야 했다. 위지불이가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폐하, 괜찮으세요?”
“괜찮다.”
남제화는 그녀의 걱정을 알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넌, 괜찮으냐?”
“저도 괜찮습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얼마나 잘 지냈는지 설명해 주고 싶어 방긋 웃었다.
“매일 아주 많은 것들을 먹었습니다.”
먹을 수 있다는 건 입맛이 좋다는 뜻이었고, 입맛이 좋다는 건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남제화도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까만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려 안 그래도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였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데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안 그래도 부스스한 머리가 더 헝클어졌지만, 눈앞의 계집은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방긋 웃어 보였다. 남제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위지불이가 몸부림치며 말했다.
“아직 이를 닦지 못했어요.”
이미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었는데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는 위지불이를 품에 가두고 그리움의 고통부터 풀었다.
그가 멈춰 선 탓에 병사들도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비탈에 서 있던 병영의 병사들도 그들을 지켜보았다. 붉은 해가 하늘로 솟아올라 금빛 햇살을 내리쬐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격한 입맞춤을 나누었다.
위지경용도 산비탈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우습기도, 또 조금은 한탄스럽기도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맞기 위해 황제 남제화는 정말 많은 공을 들였다.
병영에 돌아온 뒤에야 위지불이는 옥 장로가 보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남제화는 그녀에게 옥 장로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옥 장로가 어떻게 죽었는지보다 남제화가 병권을 찾은 것이 더 중요했다. 다섯 명의 장로 중 두 명을 해결한 것이다.
정치에 대해선 아는 게 많지 않았지만, 어찌 됐건 남제화가 허수아비 황제가 되는 건 싫었다. 그의 쓸쓸한 모습을 보는 게 싫었고, 귀하디귀한 황제가 장로들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게 싫었다. 그가 원하는 거라면 그녀도 목숨을 걸고 구해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