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7화
“폐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널 찾아왔지.”
“전 그냥 주변을 살피고 있었어요. 어디 안 가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말거라. 넌 짐을 보호해야지.”
위지불이가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다시 한번 말씀해 보세요.”
남제화는 슬쩍 웃어 보이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손을 잡고 병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서쪽에서 별안간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누가 목청껏 소리쳤다.
“적군의 기습이다. 전투 태세를 갖춰라!”
뒤이어 무수히 많은 말의 울음소리와 함성이 들렸고 울창한 숲속은 혼란에 빠졌다. 위지불이가 남제화를 끌어당겼다.
“폐하는 여기 계세요. 제가 가볼게요.”
그녀는 위기의 순간이 되자 남제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때, 옥 장로가 황급히 달려왔다.
“폐하,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가지 말거라.”
남제화가 위지불이의 손을 놓고 나긋하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거라.”
말을 마친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재빨리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위지불이가 그의 뒤를 쫓으려 하자 누군가 그녀를 휙 잡아끌었다. 그는 다름 아닌 위지경용이었다.
“가지 말거라. 날이 칠흑같이 어두워 위험하다.”
“하지만 폐하께서……”
“네가 설령 열 명이 있다 한들 폐하 한 분을 이기지 못한다. 네가 움직여 봤자 폐하께선 널 신경 쓰시느라 집중을 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니 성가시게 굴지 말거라.”
위지불이도 셋째 오라버니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지만 도무지 걱정이 되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멀리서 들리는 비명에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곧이어 소리가 서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적군이 도망쳐 남제화가 그 뒤를 쫓고 있는 듯했다.
남제화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천 명의 병사를 병영에 남겨 두었다. 사실 아직 막사 하나 없으니 병영이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위지경용만큼은 남제화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남겨 둔 병사들은 오로지 위지불이를 지키기 위한 병력이라는 것을.
처음에 그는 두 사람의 혼사를 반대했지만, 남제화의 진실된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가 출전을 마음먹은 첫 번째 이유가 여동생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남제화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 병영에 있는 병사들을 지휘해 초원으로 데려가 야영 준비를 했다. 커다란 모닥불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닥불 앞에 모였다. 차출된 병사들이 적군을 쫓아갔으니 여기에 위험한 일도 없을 터. 어떤 이들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 어떤 이들은 야참으로 감자와 고구마, 옥수수 따위를 모닥불에 구웠다.
깊은 밤이긴 해도 밝은 달빛에 가볍게 바람까지 불어오니 뜨거운 한낮보다 더 편안했다. 위지불이는 모닥불에 쪼그려 앉아 넋을 놓았다.
위지경용이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꽁 때렸다. 위지불이는 성을 내려 했지만, 그가 손을 펼쳐 갓 구운 고구마를 건넸다. 위지불이는 눈을 반짝이며 잽싸게 고구마를 입에 넣었다. 위지경용이 그녀 옆에 앉았다.
“아까까진 솥에 든 개미마냥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지금은 차분하구나.”
위지불이가 고구마를 반으로 나눠 한쪽을 위지경용에게 건넸다.
“오라버니도 드세요.”
위지경용은 어릴 적 일을 떠올렸다. 방계의 식구들은 커다란 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 덕에 방계의 아이들은 항상 같이 놀았다. 남녀가 유별한지라 계집아이들은 계집들끼리 놀았고 사내자식들은 사내들끼리만 놀았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사내들과 어울려 노는 걸 더 좋아해서 늘 그들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특히 그와 사이가 제일 좋았는데, 그녀는 집에서 맛있는 걸 가지고 나오면 늘 그에게 반을 나눠 주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들은 아이를 가진 가장이, 또 혼사를 앞둔 처녀가 되었다. 물론 다 컸다고 그때와 성격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어디 말 좀 해 보거라.”
그가 고구마를 먹으며 물었다.
“왜 이리 침착해진 것이냐? 적군이 도망쳐서 더는 걱정되지 않는 것이냐?”
“왜냐면.”
그녀가 갑자기 초승달처럼 빙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를 믿으니까요. 폐하가 하는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거든요.”
“뭔가를 알아낸 것이냐?”
“아뇨.”
위지불이가 두 손을 펼치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폐하는 여우거든요.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교활해요.”
위지경용이 실소를 터뜨렸다.
“나도 그건 알지. 안 그럼 어찌 세 공주가 다 궁을 나갔겠느냐? 한데 이리 뒤에서 황제 얘길 속닥거리면 벌을 받지 않겠느냐?”
위지불이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폐하가 어찌 감히 그리하겠어요?”
위지경용이 놀리듯 말했다.
“불이, 감히 황제에게 맞서 도전하려 하다니! 그런 짓을 할 자는 세상에서 네가 유일할 거다.”
위지불이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저더러 교만하게 굴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게 더 좋으시대요.”
위지경용이 자신의 볼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이고, 고구마가 어찌 이리 시단 말이냐. 이가 다 뽑히겠구나.”
그가 그녀를 놀리자 위지불이는 있는 힘껏 그를 때렸다. 위지경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밤바람을 가르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그렇게 그들은 이곳에서 사흘이나 기다렸다. 위지불이는 산비탈에 서서 먼 골짜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 전쟁이 일어났다면 고작 사흘로 끝나진 않으리라.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따라왔는데 정작 그녀는 이곳에 남게 되다니.
물론 남제화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데려가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전쟁터에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면 무엇 하러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나뭇잎이 솨솨 소리를 냈다. 꽃향기가 코끝을 휘감아 호흡에서도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를까? 궁 안에만 갇혀 있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이곳에 데리고 왔겠지. 푸른 숲과 들판을 거닐며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 그녀가 이런 걸 좋아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병영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천 명의 병력을 이곳에 남긴 것 또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어디 이것뿐만인가. 그녀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남겼고, 또 위지경용을 그녀의 호위로 임명했다. 분명 그녀가 너무 심심할까 봐 가까운 사람을 곁에 붙여 준 것이리라.
주도면밀한 그는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그녀를 챙기는 일에 빠짐이 없었다. 위지불이는 그의 좋은 점들을 가슴에 새기며 그에게 더 잘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위지경용이 다가왔다. 손에는 자루가 하나 들려 있었다.
“병사들이 숲에서 과일을 땄다고 해서 씻어 왔는데, 먹을 테냐?”
위지불이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과일을 입에 집어넣었다.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어찌나 시큼한지 얼굴까지 찡그려졌다. 그녀가 과일을 뱉으며 위지경용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오라버니, 일부러 골탕 먹인 거죠?”
위지경용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난 그저 먹을지 안 먹을지 물어봤을 뿐, 먹으라고 강요하진 않았다. 한데 어찌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냐?”
“시다는 얘기는 안 해 줬잖아요.”
“너도 묻지 않았잖느냐.”
“…….”
위지경용은 잔뜩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위지불이는 말로 당해 낼 수 없자 곧장 손을 썼다. 어찌나 맹렬하게 달려드는지 그는 연신 뒤로 밀려났다. 이 동작은 전부 남제화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두 남매는 산비탈에서 서로를 한 대씩 때리며 신나게 싸웠고, 멀찍이 서 있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 * *
“폐하.”
옥 장로가 말했다.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병사들이 매복 중인지도 모릅니다.”
남제화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봤자 저들은 고작 천 명이 아니오. 우리 구천의 대군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오? 설령 그들의 대군을 만난다 해도 겁낼 건 없소.”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쫓았는데도 혁흑철 부족 대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남제화가 그를 흘기며 말했다.
“장로는 겁이 나는 게요? 짐이 실수했군. 그날 장로도 병영에 남겼어야 했는데.”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옥 장로가 말했다.
“폐하, 만약 우리가 적군의 매복에 걸려든다면… 누구에게 그 책임을 묻습니까?”
“짐이 수장이니.”
남제화가 담담히 말했다.
“당연히 짐에게 물어야지.”
남제화의 말에 옥 장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실책이 많아질수록 장로들에게 이점이 될 것이다. 당시 그들이 어찌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십여 년간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깨뜨릴 수 없는 견고한 지위를 가졌다. 왕은 아니지만, 왕보다 더 높은 지위였다.
다만 그들도 점점 늙어 갔다. 그럼에도 수중에 있는 권력은 넘기려 하지 않았고, 암암리에 각자의 후계자를 양성하며 서로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황제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가 어찌 생각하든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온화한 성격에 권력도 없고 야심도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경계심은 가져야 할 터. 이번에 황제가 직접 수장을 맡은 것에 다소 의심이 생긴 그는 잠시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만약 황제가 해선 안 될 생각을 하는 거라면, 그 또한 미리 대책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권력이라는 것이 이미 그의 손에 꽉 쥐여 있는데, 이를 어찌 쉽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적군을 쫓아왔지만 그들은 잡히지 않았다. 이때다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지만 번번이 놓쳤다. 화가 난 남제화의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옥 장로의 부장 용삼도가 말했다.
“폐하, 우리 병력이 저들보다 많지만 저들은 적은 병력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력이 많아 오히려 발목을 붙잡히는 격입니다. 차라리 정예 병력으로 추격하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리하면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옥 장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폐하, 삼도의 말이 옳습니다. 추격도 가능하고 적들의 내막을 알아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남은 대군들이 있으니 우리도 겁낼 게 없지요.”
남제화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그리하거라. 이천 명의 정예병을 뽑아 계속 뒤를 쫓고, 나머지는 이곳에 주둔한다.”
잠시 뒤, 그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추격하는 내내 고생했으니, 옥 장로도 남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