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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56)화 (855/1,192)

제856화

위지불이는 전장에 나가 적과 싸울 준비를 했다. 남제화가 선물했던 금갑을 입고 허리 양옆에 완도를 찼다. 소매에는 암기를 숨기고, 장화 속에는 비수를 숨겼다. 투구에 달린 붉은 술이 바람에 나부끼자 그녀는 늠름한 어린 장군 같았다.

출정 날, 길 양쪽에는 배웅을 나온 백성들로 가득 찼다. 이번엔 절이 아닌 거리에서 합장을 하며 황제의 복을 기원했다. 위지불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셋째 오라버니가 그녀 때문에 화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배웅은 하러 오지 않았을까?

주변을 살펴보던 그녀는 채자리 사람들을 발견했다. 한향과 한향의 어머니까지 보였지만, 위지경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실망했다. 아무래도 셋째 오라버니의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그녀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그때 누군가 그녀 옆에 다가와 나란히 말을 몰았다.

“전투에 나가는 것이 아니더냐? 어찌 그리 풀이 죽은 것이야?”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위지경용이었다. 그는 은색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고삐를 붙잡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위지경용이 실토했다.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넌 황상의 호위를 하거라. 난 네 호위를 할 테니.”

위지불이는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그녀를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남제화는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위지경용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언제 폐하를 꼬드긴 거예요?”

위지경용이 그녀를 흘겨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가 날 꼬드긴 거다.”

위지불이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폐하께서 오라버니를 찾으셨다고요? 뭐라고 했는데요?”

“내가 네 심기를 건드린 거 아니냐고 묻더구나. 그렇지 않으면 네가 왜 저리 울적해하냐면서. 또…….”

“또 뭐라고 했는데요?”

“자신의 여인을 괴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똑같이 갚아 줄 거라고도 하셨다.”

위지불이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 오라버니를 위협했다고요?”

“폐하께서 날 위협하지 않으셨다면, 폐하가 널 이렇게까지 마음에 두는지 몰랐을 거다.”

위지경용이 말했다.

“네 혼사를 반대하지 않겠다. 네가 알아서 하거라.”

위지불이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셋째 오라버니가 드디어 동의한 것이다. 이제 그녀 또한 친정 식구가 생긴 셈이니 혼사를 하더라도 아주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녀가 위지경용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느 소속으로 들어갔어요?”

“네 호위라니까.”

“정말요?”

위지불이는 그의 말이 농담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말이지. 폐하께서 직접 그리해 주셨는데.”

위지불이는 또다시 고개를 들고 앞에 있는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옥 장로와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금갑을 휘두른 그의 모습은 꼭 천신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위지불이는 그런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을 때, 몰래 웃고 있는 위지경용의 얼굴이 보였다. 위지불이는 부끄러워 괜스레 성을 냈다.

“왜 웃는 거예요?”

위지경용이 한탄스러운 척 말했다.

“아이고, 딸들은 나이가 차면 시집을 보내야 한다더니!”

위지불이는 부끄러움에 조용히 얼굴만 붉힐 뿐이었다. 출전 중인 엄숙한 상황에 수많은 백성들까지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성문을 나서니 탁 트인 시야에 산자락이 끝없이 이어졌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녔고, 푸르른 산 아래엔 깨끗한 물이 흘렀다. 하늘은 티끌 하나 없는 유리병 같았고, 물은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맑았다.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노니는 물고기도 볼 수 있었다. 이따금 나무 위로 뾰족한 지붕이 드러났다. 숲속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궁 밖의 풍경들은 참 매력적이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던 위지불이는 절로 자부심이 생겼다. 이곳이 바로 남제화의 강산이었다. 위지경용이 감탄했다.

“남원은 정말 아름답구나.”

“그러게요. 정말 예뻐요.”

위지불이는 시선을 올려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등에도 눈이 달렸는지 별안간 고개를 돌려 활짝 웃었다. 찬란한 햇살이 금색 갑옷을 반짝였고, 천신 같은 사내는 매혹적이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위지불이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녀도 그의 미소를 피하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한쪽 눈을 깜빡였다.

‘이런 깜찍한 요정 같으니…….’

남제화가 속으로 생각했다.

위지경용은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그 혼자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에 시선을 거두었다. 위지경용이 말했다.

“어찌 이리 못났는지. 여인이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위지불이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다운 걸 좋아하잖아요. 한향 언니가 안 예뻤다면 오라버니께서 장가를 갔겠어요? 아름다운 것에 마음을 뺏기는 건 남녀 구분이 없다고요.”

위지경용은 아리따운 자신의 부인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지만, 사실 그래 봤자 일 만의 병력이었다. 인구가 적은 남원은 병력난이 심각했다. 다행히 부족의 병력도 그리 많지 않아서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휴식이 필요할 땐 숲속의 그늘을 찾았다. 병사들은 나무에 기대 휴식을 취했고 주방장은 밥을 지었다. 숲 안에는 수풀도 많고 야생 동물도 많았다. 여러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숲속 깊이 들어갔다 나올 때면 말에 온갖 야생 동물이 실려 있곤 했다.

병사들이 구덩이를 파고 고기를 굽자 숲속에 고기 냄새가 진동했다. 위지불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토끼 다리를 뒤집었다. 그리곤 보자기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내 조미료를 톡톡 뿌렸다. 먹음직스러운 냄새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배가 고파서 견디기 어려웠다.

토끼 다리에 기름기가 배어 나오더니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구워졌다. 향료를 겹겹이 뿌린 덕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위지불이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집어 들고 남제화에게 건넸다.

“폐하, 드세요.”

“직접 구운 것이냐?”

“예.”

남제화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손에 있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주 맛있구나.”

그는 다리를 건네받아 다시 위지불이의 입에 가져다주었다.

“너도 먹어 보거라.”

위지불이도 한입 베어 문 뒤, 이가 다 보일 만큼 활짝 웃었다. 남제화가 그녀의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바보 같긴.”

두 사람은 나무 아래 서서 너 한입, 나 한입 정답게 토끼 고기를 나눠 먹었다.

옥 장로는 다른 나무 아래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한 나라의 군주가 장병들 앞에서 여인과 다정히 장난이나 치다니. 체통은 대체 어디에 팽개쳐 두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그들을 하찮게 여겼다.

위지경용도 입꼬리를 움찔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딜 봐서 출전하는 모습이란 말인가. 황제가 총애하는 비를 데리고 놀러 가는 것이지.

남제화는 모닥불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여인에게 꿩 날개를 구워 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토끼 다리를 주었으니 그 또한 뭐라도 대접해야 하지 않겠는가?

토끼 다리를 다 먹은 위지불이는 숲속에서 색색의 꽃을 꺾은 뒤 화환을 만들었다. 총 세 개의 화환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자신이 쓰고 다른 하나는 위지경용에게 주었다. 하지만 사내들이 화환을 좋아하겠는가? 그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여동생의 성의라고 생각하고 허리춤에 꽂아 두었다.

그런데 남제화의 반응은 달랐다. 위지불이가 화환을 만들어 달려오자 그는 그녀 앞에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어린 연인이 기뻐한다면 머리에 화환을 올리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온몸에 금갑을 두른 위풍당당한 황제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옥 장로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이 꼴을 보니 황제가 직접 지휘봉을 잡는 것에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는 그저 여색에 빠진 황제에 불과할 뿐이었다.

행군은 따분했지만, 위지불이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탁 트인 하늘과 드넓은 대지의 풍경은 한없이 아름다웠고 전원의 정취도 흠씬 묻어났다. 또 사랑하는 연인과 눈빛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꿀처럼 달콤해졌다.

사흘 뒤, 남제화는 아포 족장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혁흑철 부족의 선발 부대가 이미 공계산公鷄山 일대에 도달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그들도 막 공계산 부근에 들어섰으니 이제 곧 적과 마주할 것이다. 순간 분위기가 엄숙해지기 시작했다.

위지불이는 남제화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위지경용은 그런 동생의 곁을 지켰다. 옥 장로는 남제화 곁의 남녀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직 적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로 긴장하다니. 전투가 시작되면 저 두 사람은 황제와 함께 멀리 도망칠 것이다.

핏빛 석양이 산봉우리 사이를 넘어가는데도 적군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공계산 일대엔 매복하기 좋은 장소들이 많았다. 만약 지금 적군들이 매복해 있다면, 날이 진 후엔 그들이 더 우세한 위치를 선점하게 될 것이다.

상의 끝에 남제화와 옥 장로는 행군을 멈추고 선발대를 파견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석양이 지고 밝은 달이 하늘에 걸렸다. 남원의 산림은 밤이 되자 물처럼 맑은 빛을 뿜어냈다. 꼭 얇은 천을 덮어 둔 것처럼 아련한 경치가 펼쳐졌다.

자객 훈련을 받은 위지불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경계심이 강했다. 주변에 적군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왼쪽으로 움직이는 게 포착됐다. 곧장 그 앞으로 다가간 그녀가 낮게 호통쳤다.

“암호.”

그자는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수탉, 수탉. 아침에 울어라.”

첩자를 가려내기 위해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기억하기 쉬운 암호를 만들어 보라고 했었다. 위지불이는 공계산이라는 이름에서 착안해 간단하면서도 외우기 쉬운 암호를 지었다. 그녀는 굉장히 잘 지은 암호라고 생각했지만 무슨 일인지 암호를 말할 때마다 병사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암호는 맞았지만 위지불이의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자는 허리를 숙인 채 손으로 배를 잡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배에 숨기고 있는 것처럼.

“어딜 가는 거죠?”

병사는 목소리를 힘껏 억누르며 조금은 가여워 보이는 어투로 말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잠시 볼일을 좀 보려고 했습니다.”

“…….”

“어서 가요, 어서.”

그녀는 손을 휘저은 뒤,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세우자마자 눈앞에 남제화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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