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5화
위지하와 동수여는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질렀다.
“남원 황제……!”
모든 의문점이 그제야 다 해소되었다. 위지 가문과 남원 여제는 철천지원수였다. 그 망할 계집이 직접 말할 용기가 없으니 황후를 통해 혼담을 꺼낸 것이다!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진 위지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동수여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달랐다.
‘와, 우리 딸이 황후가 된다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뒤이어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가주가 분명 우리를 종문에서 쫓아낼 테니 아마 더는 도성에서 살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미 국공과 일품 고명 부인이 되지 않았는가? 위지 가문보다 더 존귀한 신분이 된 것이다. 게다가 황후와 인척을 맺는데 누가 감히 그들을 쫓아낸단 말인가…….
백천범은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국공, 부인. 위지 가문이 남원 여제에게 원한을 가진 거 잘 압니다. 하지만 그 일과 이 일은 다릅니다. 여제는 여제고, 제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일 뿐이지요. 두 사람이 한패는 아닙니다.”
위지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패라… 마마의 단어 선택이 참 특이했다.
“복수를 하려면 원수에게 하라는 말도 있잖아요. 위지 가문의 원수는 여제지 저희 오라버니는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저희 오라버니에게 원한이 있다면… 제게도 원한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
처음 백천범을 보았을 땐, 제법 황후다운 모습이었는데 앙증맞은 말투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어리광을 부리는 소녀 같았다. 동수여가 황급히 대꾸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위지 가문의 원수는 여제뿐입니다. 마마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백천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희 오라버니도 여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제 오라버니와 불이가 남원에서 혼인을 올리고 동월에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오라버니께서 불이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라도 불이가 후회할 만한 일은 하지 않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딸이 출가할 땐 부모가 보내 줘야 하니까요. 국공, 부인. 우리 오라버니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너그럽지 않습니까?”
위지하가 대꾸했다.
“아, 예.”
동수여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국구께서 정말 생각이 깊으십니다.”
위지하 부부는 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입궁할 때보다 출궁할 때 더 낯빛이 좋지 않았다. 위지하는 화가 난 것인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수여는 그런 남편의 얼굴을 살피다 입을 다물었다. 걱정이 앞선 건 사실이지만 살짝 기쁜 것도 있었다.
가마 앞에 선 그녀는 가슴을 꼿꼿이 폈다. 그녀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람이 성공하면 주변 사람들이 덕을 본다더니… 딸아이가 남원의 황후가 된다고 하자 부귀영화가 잇달아 따라왔다. 봉호를 받고, 관저를 얻은 것도 모자라 엄청난 재산까지…….
물론 그녀 역시 이런 부귀영화보단 딸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딸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당연히 딸이 행복하길 원했다. 다만… 딸의 주제는 그녀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위지 가문 식구들 중 누구도 불이를 여인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날마다 사내들과 한데 뒤엉켜 싸우며 사내아이들 같이 커왔다. 좋게 봐줘서 얼굴은 청초하게 봐 줄 수 있다곤 하지만… 그 걸걸한 목소리는 또 어떤가. 또 가장 중요한 건…….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 황후 마마의 미모를 보아하니 오라버니도 크게 떨어지진 않을 터. 일국의 군주인 그가 왜 불이 같은 계집을 마음에 들어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몹시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쉴 때 위지하도 탄식을 내뱉었다. 동수여가 물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위지하가 근심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가주가 알면 우린 뼈도 못 추릴 거요.”
동수여가 말했다.
“겁낼 게 뭐 있어요. 당신이 국공야인데, 가주가 당신을 어찌하겠어요?”
“…그것도 맞는 말이군.”
동수여가 말했다.
“황상께서 이렇게 하신 건 다 황후 마마의 뜻이었을 거예요. 정말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신 것이지요. 위지 가문 때문에 우리가 난처해질까 봐… 봉호와 저택, 거기에 재산까지 주시질 않았습니까? 앞으로 더는 가문에 의지하지 말라고요. 국공은 가주보다 높으니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하진 못할 거예요.
게다가 불이는 황후 마마의 오라버니께 시집을 가는 거라고요. 가주가 우리 체면을 안 봐주겠어요? 황후 마마 앞에서는 황상께서도 함부로 못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동의한다는 거요?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소. 어쨌든 우리도 위지 가문의 사람인데, 근본을 잊을 순 없잖소.”
동수여가 눈을 희번덕였다.
“지금껏 위지 가문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어요. 한데 우리가 돌려받은 관심은요? 고작 하나 있는 딸마저 꼬임에 넘어가 남원으로 갔어요. 우리 불이는 팔자가 좋아 대운을 만난 것이지요. 동월을 떠나 생사조차 모르는 자식들이 많은데, 우리 불이도 그런 처지였어 봐요. 우리가 늙으면 누굴 의지하며 살겠어요?
이제 보니 위지 가문에서 먼 친척들까지 불러 모은 건 공짜 자객을 기를 목적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원한이 크면서 직계들은 왜 가만히 있고 우리 방계들만 암살하러 가냐고요! 이제 불이의 행방을 알았으니 나도 그쪽에는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예요. 어쨌든 불이의 얼굴을 보러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위지하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남원에 가겠다고?”
“한번 다녀와야 마음이 놓이죠.”
동수여가 투덜대며 말했다.
“불이를 한번 봐야겠어요. 또 남원의 황제라는 작자가 왜 우리 불이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도 알아보고요. 게다가 불이의 상황은 당신도 알잖아요. 만약 그 일을 숨기고 가만히 있으면 군주를 기만하는 거라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군.”
동수여가 말했다.
“미룰 일이 아니라 내일 다시 궁에 들어가서 마마께 남원에 가겠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
고작 궁에 한 번 다녀와 놓고 궁을 제멋대로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 곳으로 알다니! 어찌 이리 태세 전환이 빠르단 말인가? 동수여는 위지하보다 더 결단력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일품 고명 부인인데다 백천범이 직접 영패를 주었기에 언제든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튿날, 그녀는 홀로 입궁했다. 위지하는 관리와 함께 농장을 둘러보러 갔다. 갑작스레 찾아온 부귀영화가 한 번에 사라질 것 같아 그의 마음이 불안했다. 그는 농장을 둘러봐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위지하 부부가 자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란 건 백천범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동수여가 입궁했다는 소식에 백천범은 직접 문 앞까지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부인, 오셨군요.”
동수여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백천범이 먼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이리 예를 갖출 것 없어요.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동수여는 딸을 보러 남원에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다고 위지불이의 혼사에 대해 결정을 한 건 아니었다. 방긋 웃고 있는 백천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조금 미안했다.
“황후 마마,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는데… 드려도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황상과 마마께서 봉호도 내려 주시고, 저택도 주셨지요. 그런데 만약에…….”
그녀가 입술을 잠시 깨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이 혼사가 성사되지 않으면…….”
말을 어찌 끝맺어야 한단 말인가? 하사한 걸 다시 회수해 갈 거냐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백천범이 까르르 웃더니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성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부인, 우리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 드세요?”
동수여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남원의 황제가 자신의 딸을 마음에 안 들어 할까 봐 걱정이지.
“소인이 어찌 감히.”
그녀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만약 국구께서 마음이 바뀌시어 저희 불이가 마음에 안 드시면 어찌하지요?”
“그게 걱정이셨군요.”
백천범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께서 그리 먼 곳에서 소식을 전할 정도면 분명 결심을 굳혔다는 의미일 거예요. 불이 아가씨를 황후로 맞이하려는 거죠. 황후의 자리를 정하는 게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마음이 바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동수여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치맛자락에 놓인 정교한 자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마마, 국구께서는… 건강하시지요?”
백천범은 뒤늦게 그녀의 말뜻을 이해했다. 부인이 그걸 걱정하는 것이었구나.
“오라버니는 무예를 배운 사람이라 몸이 아주 건강합니다.”
“혹 마마와 닮으셨나요?”
“눈매가 좀 닮았지요. 오라버니는 교양이 넘치고 성격도 온화해서 누구와도 잘 지낸답니다. 만약 오라버니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분명 진심으로 잘 대해 줄 겁니다.”
“국구께서 그렇게나 좋은 분이시군요.”
그녀가 우물쭈물 말했다.
“소인은 저희 불이가… 오르지 못할 곳을 올려다보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라…….”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누구나 다 부족한 점을 갖고 있는걸요. 하지만 사랑은 그 사람의 결점까지도 좋아하게 만들지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 부인.”
백천범은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동수여는 그녀에게 까닭 없이 신뢰가 생겼다. 마마께서도 저리 말씀하시니, 분명… 괜찮겠지.
“황상께 불이 아가씨를 군주로 봉해 달라고 청할게요. 그럼 남원에서도 신분을 문제삼지 않을 거예요. 감히 그녀를 무시할 사람도 없을 테고요.”
동수여는 황후의 말에 곧장 무릎을 꿇고 이마를 조아렸다.
“마마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마마와 황상께서 불이에게 이리 큰 은혜를 베푸시다니요! 소인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마마와 황상께 보답하겠습니다.”
백천범이 서둘러 그녀를 일으켰다.
“불이 아가씨가 제 오라버니에게 시집오면 우린 인척을 맺는 거예요. 부인은 제 손윗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리 무릎을 꿇으시면 안 돼요. 제 앞에서 이제는 이런 규율을 지키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동수여는 더 정중히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마, 마마와 인척을 맺을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저희 불이가 전생에 덕을 쌓아서 가능한 일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