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3화
묵용감은 조회를 마치고 승덕전으로 돌아왔다. 복도를 지나가던 중 새와 놀고 있는 월규를 발견했다. 그는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이면 그녀는 백천범 곁에 있어야 했다. 월규는 그를 발견하고 즉시 앞으로 다가가 예를 행했다.
“황상.”
묵용감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황후는 어디 있느냐?”
“마마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안으로 옮기려 하자 월규가 막아섰다.
“폐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황후 마마께서는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 있느냐?”
“마마께서 기분이 안 좋으십니다.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기분이 안 좋다고 어찌 그녀를 혼자 둘 수 있는가? 애처가인 묵용감은 두말 않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월규는 말릴 수 없음을 알지만, 말리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백천범은 가만히 서신을 접었다.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그녀는 잘 지내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도 잘 지내고 있다. 유일한 걱정거리는 그녀의 친오라버니인 남제화 뿐이었다. 비록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뼈에 사무친 가족의 정을 떠올릴 때마다 눈시울이 젖어 갔다.
묵용감은 그녀를 위해 이미 남원에 대한 처벌을 너그럽게 처리했다. 여제는 아직 살아 있었고 오라버니가 남원의 황제가 되었다. 매년 남원의 사신이 조정을 방문할 때면, 공물 외에도 남제화가 백천범에게 보내는 선물을 전해 주었다.
작은 나무 상자 안에는 각종 선물들이 가득했다. 남제화가 직접 조각한 나무 조각, 보석 장신구, 향과 향유, 비단을 비롯한 견직물, 예쁜 머리 장식, 수공예품, 기이한 연고, 은궁과 은화살, 보석을 박은 단도…….
백천범은 이 물건들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남제화는 좋은 것을 얻으면 고이 보관해 두었다가 동월로 가는 사신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건 일 년 동안 모은 그의 보물이었다. 물론 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오라버니의 성의가 가득했다. 작은 나무 상자 안에는 동생에 대한 오라버니의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사신이 돌아갈 때, 백천범도 똑같이 작은 나무 상자에 각종 선물을 넣고 그녀의 그리움을 함께 담아 보냈다. 이렇게 일 년에 한 번 선물을 주고받으며 남매는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선물과 함께 서신도 전해지곤 했다. 성품이 온화한 남제화는 서신 또한 따뜻하게 썼다. 세심한 당부의 말 외에도 여러 가지 안부 인사를 전했고 그 자신은 항상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쓰여 있었다.
백천범이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 당시 묵용감이 화가 나서 무장한 대군을 이끌고 국경까지 쳐들어갔지만, 남원은 싸우지 않고 동월에 투항했다. 비록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해마다 남원은 동월에 황금을 포함한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동월과 남원이 혼인으로 인척 국가가 되었지만,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는 그대로였다. 아마도 괜한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일 테지만, 일 년에 한 번 받는 서신과 선물을 제외하고 남제화가 따로 백천범에게 서신을 보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전해진 서신에 백천범은 적잖이 놀랐다. 서신을 다 읽고 나자 백천범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오라버니가 부탁을 해 온 것이다. 이번 부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줘야 했다.
묵용감은 창가에 앉아 넋을 놓고 있는 백천범을 발견했다. 천범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보니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그는 마음이 아팠다. 멀쩡했던 그녀가 어찌 갑자기 괴로워하는 것이란 말인가. 부군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었다.
“범아帆儿.”
그는 다가가서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월규가 황후의 기분이 나쁘다고 하던데, 왜 그런 거요? 청양이 또 당신을 화나게 한 건 아니오?”
백천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묵용감은 더욱 조급해져 품에 그녀를 안았다.
“범아,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면 남편에게 말하시오. 아무리 큰일이라도 내가 대신 해결해 주겠소.”
한 나라의 군주로서 아내조차 제대로 달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는가? 백천범은 말하려다 또 입을 닫았다.
“아니에요. 됐어요. 이 일은…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그녀가 말하려 하지 않을수록 묵용감은 더욱더 마음에 조급했다. 아내가 어찌 남편을 남처럼 대한단 말인가? 그들은 일심동체인 부부가 아닌가.
“범아, 짐에게 알려 주시오.”
그는 그녀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짐이 무슨 일이든 꼭 들어주겠소.”
백천범이 말했다.
“당신이 말한 거예요. 제가 강요한 게 아니고요.”
“물론이요. 당연하지.”
묵용감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거라는 눈빛으로. 백천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졌다. 물론, 백천범이 보기 전에 얼른 표정을 바꿔 태연한 척했다. 그도 백천범의 뜻을 안다. 그녀가 이렇게 말을 꺼낸 건 남원에 가서 남제화를 만나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유독 이번 일만은……. 그는 썩 내키지 않았다.
남원을 떠올리자마자 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곧바로 부아가 치밀었다. 백천범이 지난 생에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그런 어머니를 만났을까? 그는 백천범과 재회한 후, 백천범이 다시는 남원 땅을 밟지 못하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녀가 당한 힘든 일들을 다시 떠올리지 못하도록… 그는 그녀의 삶에서 남원이란 곳을 완전히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도 남원의 사신이 왔다 가면 백천범은 슬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속마음을 알고 있기에 한 번도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를 풀어 주고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범아, 남원에 가고 싶소?”
“오라버니의 혼례 축하주만 마시고 돌아오겠어요.”
묵용감은 걸음을 멈췄다. 그가 주목한 말은 남제화의 혼례가 아니라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엔 그가 포함되지 않았다…….
“안 되오.”
백천범이 남원으로 끌려갔던 건 가슴 속 씻을 수 없는 그림자였다. 백천범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묵용감은 아내를 목숨같이 아꼈다. 그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그는 그녀를 남원으로 보내기 싫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 처남이 장가를 간다고? 어느 가문의 아가씨인가?”
뜻밖에도 백천범은 탄식을 쏟아냈다.
“말하기 좀 곤란한 상황이에요.”
묵용감은 어리둥절했다.
“뭐가 곤란하다는 말이오? 설마 아가씨가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오?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인데?”
“아가씨는 시집가고 싶어 해요. 그런데 아가씨 가문에서 아마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그 아가씨는 동월 사람이에요.”
묵용감은 즉시 공로를 자랑할 기회를 찾았다.
“그게 뭐가 어렵겠소? 우리 동월의 백성이면 짐이 황명을 내리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소?”
백천범이 말했다.
“위지 가문의 아가씨예요.”
“…….”
황명교지를 내리긴 쉬웠다. 하지만 위지 가문의 피맺힌 원한은 쉽게 녹아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도 몇 년 동안 위지 가문이 남원에 사람을 보내 여제를 암살하려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위지문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그도 지금껏 눈감아 줬다. 어차피 여제도 재주가 있어서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기에 잠시 위지 가문 사람들이 화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남제화는 아무런 교류도 없었다. 그러니 예전 친우였던 위지문우의 편을 들어 준 건 사실이었다. 그는 그의 친우이자, 그와 백천범의 은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중요했다. 백천범을 봐서라도 이제 가만히 방관할 순 없었다.
* * *
위지하는 안채에 들어와 동수여에게 말했다.
“방금 궁에서 사람이 온 걸 봤소. 앞마당으로 향하는 걸 보니 또 황상께서 상을 내리신 것 같소.”
동수여는 고개를 숙인 채 내의를 수선하고 있었다. 한 바늘 한 바늘, 모두 촘촘한 바느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황상이 뭘 하사하시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들은 먼 친척이라 가문의 일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었다. 만약 황제가 하사한 것이 궁중의 떡이나 다과라면 가까운 친척들만 조금씩 나누어 줄 뿐이었다.
그 당시 귀경하라는 서신을 받은 부부는 도성에 올라오기만 하면 부유함을 누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별채에서 살게는 해 주었지만, 촌수를 따져 구분하느라 다른 가족들과 신분도 달랐다.
처음 와서 몇 년 동안은 그들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도 없었다. 그들도 손을 벌리기가 어려워서 갈수록 생활이 빠듯해졌다. 내의는 찢어지고 구멍이 나서 바느질해서 입어야 했다. 위지하가 말했다.
“우리와 상관이 없으니 샘이 나지는 않지. 그래도 황상이 위지 가문을 높이 대우하는군. 며칠을 멀다 하고 상을 하사하시니. 어린 세자는 참으로 복덩이를 주운 거로군.”
동수여는 탄식하듯 말했다.
“어린 세자는 상관하지 말고 우리 불이나 걱정하세요. 계집애가 서신 한 통 남기고 집을 나가서 지금까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있잖아요.”
집 나간 딸 얘기를 꺼내자 위지하는 화가 버럭 치밀었다.
“그년 걱정을 해서 무엇 해! 지 능력이 있다잖소? 평생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퉤!”
동수여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딸만 뭐라고 할 게 아니에요. 위지 가문이 아이에게 세뇌한 거잖아요! 아이들에게 복수를 종용하다니!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어찌 자객 교육을 받았겠어요?
우리 집뿐만 아니에요. 다른 방계 친족들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아요? 예전에 저는 우리 집은 딸이라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어요. 그런데 이런 꼴이 되었잖아요!”
동수여는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불이는 어려서 큰일을 당했잖아요. 살아난 게 다행이었죠. 그때 반선半仙이 그녀에게 점을 쳐 주었는데 이번 고비만 넘기면 부귀를 누릴 운명이라고 했어요. 저는 부귀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요. 평안히 지내기만 바랄 뿐이에요. 요 며칠 어찌 된 일인지 자꾸 꿈에 불이가 나와요.”
동수여는 소매를 잡아당겨 젖은 눈을 닦았다.
위지하는 옆에 앉아 잠자코 있었다. 그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무척 괴롭고 속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가문 사람들은 그에게 딸을 잘 키웠다고 칭찬했다.
혼자 남원으로 달려가 공자의 원수를 갚으려 하다니. 계집이지만, 사내보다 쓸모가 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며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올랐지만, 속에는 피가 맺혔다. 자신의 친딸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다들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고 쉽게 떠들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불이는 팔자가 세서, 그 당시 그렇게 힘들었는데도 살아났소. 괜찮을 거야. 걔는 약삭빠르고 똑똑하잖소.”
“약삭빠르긴 해도 똑똑하진 않아요.”
동수여는 남편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비비며 계속 옷을 수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