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2화
이튿날 오후가 되자, 몇몇 장로들이 밀정을 파견해 정보를 알아봤다. 혁흑철 부족의 대군은 정말로 타곤성을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군 도중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상대가 경계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리라.
이와 동시에, 도 장로의 저택에서도 그가 혁흑철 부족과 주고받은 서신이 발견되었다. 내용은 비록 함축적이었지만, 장로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마침내 저들은 도 장로가 왜 늘 그렇게 안하무인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믿는 뒷배가 있었던 것이다.
남원에서는 사형을 시키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하지만, 역모에 관한 것은 예외였다. 증거가 명확하니 네 명의 장로들은 분을 삭이지 못했고 차례로 도 장로의 죄목을 적은 문서에 서명했다. 바로 그날 밤, 도 장로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다섯 명의 장로들 중 한 명을 해결했다. 이건 마치 빈틈이 없는 나무통에서 판자 하나를 뽑은 것과 같았다. 도 장로가 거머쥐고 있던 권력이 떨어져 나갔지만, 장로들은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혁흑철 부족과 전쟁이 당면 과제였다.
남원은 병력이 부족했다. 금위군의 책무는 오직 타곤성을 지키는 것일 뿐 실전 경험이 없었다. 옥 장로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에 비해 부족의 군대는 천성이 호전적이니 더욱더 걱정스러웠다.
근거지를 쟁탈하기 위해 일 년 내내 끝없는 싸움을 이어 가는 숲속의 부족들을 수도에서 점잖 빼고 춤이나 추는 양반들이 어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막상 전쟁이 터지면 남원의 금위군으로 혁흑철 부족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파목 부족과 연대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가 사령탑이 되느냐는 끊임없는 논쟁거리였다. 옥 장로가 비록 금위군을 관장하지만, 그는 나이가 많고 경험도 없어서 군대를 이끌고 싸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적당한 장군을 찾아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논쟁이 그치지 않자 남제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짐이 직접 지휘봉을 잡는 것은 어떻소? 장로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불가합니다!”
화 장로가 먼저 반대를 외쳤다.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창칼에는 눈이 없으니, 혹시라도 폐하께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하지만 위 장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했다.
“폐하께서는 자신 있으십니까?”
“남원의 병력이 약하니, 영토 내에 있는 부족조차 감히 짐에게 대들고 있소. 짐은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소. 군대를 이끌고 싸운 적은 없지만, 짐은 병서를 통달했으니 아무래도 다른 이들보다 낫지 않겠소? 게다가 아포 족장과는 친분이 있으니 그가 짐을 도와준다면 승산이 있소.”
청 장로는 옥 장로를 바라봤다.
“옥 장로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옥 장로는 바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마땅한 인재를 찾지 못한다면 저도 폐하의 친정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화 장로의 말씀도 옳습니다. 폐하께서는 귀하신 몸이시니 혹시라도 옥체가 상하면 하늘이 노할 것입니다.”
그는 번뜩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했다.
“차라리 폐하께서 수장인 총수總帥를 맡으시고 제가 부수副帥를 맡아 폐하를 곁에서 보필하겠습니다.”
남제화는 옥 장로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챘다. 만약 황제가 지휘봉을 잡으면 그는 병권을 내놓아야 한다. 옥 장로가 그걸 허락할 리가 있겠는가? 말은 보필한다고 하지만, 이건 감시하기 위함이다. 옥 장로의 속마음은 위지불이도 눈치챌 수 있었다. 한쪽에 서서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남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다면 더 나무랄 게 없겠소.”
* * *
남원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칼을 사용한다. 그들과 다르게 남제화는 동월에서 강호를 돌아다니며 검을 즐겨 썼다. 그는 수건으로 자신의 보검을 닦고 있었다. 검푸른 빛을 띠는 검날은 손가락을 튕기면 검 끝이 가볍게 떨리면서 길게 울음을 터뜨렸다. 탁자에 엎드려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위지불이가 물었다.
“정말 전쟁이 나는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
“설마 거짓으로 말했겠느냐?”
“얼마나 참혹할까요?”
남제화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괜찮을 거다.”
그가 검집에 검을 꽂고 되물었다.
“나는 검을 연습하러 갈 건데, 너도 가겠느냐?”
“당연히 가야죠.”
위지불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폐하, 우리 비무를 하는 게 정말 오래간만이죠?”
“…너의 칼을 챙겨 나오너라.”
두 사람이 숲에 닿자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숲엔 잔잔한 빛이 흘렀다. 위지불이는 칼을 가슴 앞에 들고 도발적인 표정으로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아운소와 함께 처절한 살육을 경험한 뒤부터 위지불이는 자신을 고수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자신감이 폭발한 그녀는 예전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자신이 남제화와 겨룰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실력이 어떤지 남제화는 다 알고 있었다. 자기 여자는 자기가 아껴야 하는 법. 그는 그녀와 적당히 어울려 주면서 그녀를 놀리듯 다뤘다.
위지불이는 이런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상대했다. 자신이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남제화에게 지지 않았다는 것을 매우 기뻐했다.
비무를 멈췄을 때,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엔 땀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반면 남제화는 숨결이 안정되어 있었고 땀이 조금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비무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럼 담담하게 서 있었다.
흥분한 상태인 위지불이는 당연히 이런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무공이 늘어서 그와 겨룰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할 뿐이었다. 남제화가 땀수건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내가 검을 수련하는 동안, 넌 좀 쉬고 있거라.”
위지불이는 그제야 예전의 일이 떠올라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우리 다시 한번 겨뤄 봐요.”
“방금 하지 않았느냐?”
“이런 거 말고요.”
그녀는 칼을 남제화의 가슴에 겨누었다.
“예전처럼. 자! 누가 더 빠를까요?”
“…….”
이건 안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만약 그의 손이 더 느리면 그의 목숨을 잃는 것 아닌가. 위지불이가 그를 도발했다.
“왜요? 못하겠어요? 안심해요. 제가 정말 폐하의 목숨을 노리겠어요?”
남제화가 말했다.
“그럼, 화내지 말거라.”
위지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왜 화를 내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칼날을 세웠다. 물론 그녀도 정도를 지켜서 앞으로 찌를 때 손목을 뒤집어 칼끝 방향을 틀었다. 만일 정말로 남제화를 다치게 한다면 그녀는 죄책감에 죽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손목이 아프더니 칼이 번뜩거렸고, 어느새 그녀의 칼은 남제화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익숙한 느낌인가? 위지불이가 속으로 생각했다.
‘실력이 이렇게나 늘었는데 폐하의 손은 왜 아직도 이렇게 빠른 거지? 설마 내가 너무 방심했나?’
“다시 해요.”
칼을 도로 가져온 그녀는 아까처럼 남제화를 겨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남제화는 코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그만하지. 넌 옆에서 혼자 놀거라.”
위지불이는 두말도 하지 않고 칼을 앞으로 찔렀다. 이번에는 손목을 뒤집지도 않고 더 빠른 속도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칼은 어느새 남제화의 손에 넘어갔다. 그녀는 그 칼을 보고 드디어 깨달았다.
“방금 계속 날 봐준 거예요?”
“…….”
봐주지 않으면 어찌할까? 위지불이는 묵묵히 칼을 다시 허리춤에 꽂고 돌아섰다. 남제화는 얼른 그녀를 껴안았다.
“화내지 말라고 했잖느냐.”
“화 안 났어요.”
“화가 안 났는데 왜 가려고 해?”
“피곤해서 들어가서 쉬려고 하는 거예요.”
“가지 말거라.”
남제화가 그녀를 끌어당기고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여기 남아 나를 보호해야지.”
순간 성질이 난 위지불이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칼을 뽑았다.
“남제화! 사람을 그렇게 업신여기면 안 되죠!”
남제화가 말했다.
“걸핏하면 칼을 뽑지 말거라. 넌 어차피 나를 못 이기니까.”
위지불이는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건 그녀도 안다. 하지만 그녀의 존엄을 이렇게 짓밟게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칼을 휘두르며 돌격하자 남제화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칼을 빼앗았다. 그리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자신의 품속에 가두었다. 위지불이가 몸부림을 치려고 하자 그는 재빨리 그녀에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몸집은 이내 잠잠해지더니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의 얼굴은 저 하늘에 드리운 노을빛보다도 더 붉게 물들었다. 떨어지는 나뭇잎과 흩날리는 꽃잎이 그들 곁을 맴돌고, 나무 위의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귀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렸다.
한바탕 온기를 나눈 후 남제화는 그녀를 풀어 줬다. 위지불이는 빨개진 얼굴로 비틀거렸다. 남제화가 그녀를 얼른 붙잡았다. 위지불이는 그를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이러면 용서할 줄 알았죠? 저는…….”
“부족한 것이냐?”
남제화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다시 한번 할까?”
“미워 죽겠어!”
그녀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몸을 돌려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검술이나 연습해요!”
남제화가 검을 들고 곧게 서니 푸른색 장포가 그를 옥처럼 돋보이게 했다. 바람이 한 점 불자 바스락거리며 꽃잎이 떨어졌다. 흩뿌려진 흰색 꽃잎이 그림자처럼 그를 감싸 안았다. 마치 용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바람이 움직이면 그 또한 움직였다. 푸른 검광이 인영을 꽁꽁 가리듯 휘감았다. 옷자락이 날리고, 부스러진 꽃잎이 휘날렸다.
위지불이는 입도 다물지 못하고 바보처럼 자리에 서서 남제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도 깜빡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녀가 남제화의 검무를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 밖으로… 그의 솜씨는 경이롭기가 하늘을 놀라게 하고 귀신을 울릴 정도였다. 그녀가 그동안 그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매일 의사당에 동행한 것은 정말 창피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남제화가 그동안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지 알 수 없었다.
위지불이는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또 자부심으로 가슴이 충만해졌다. 이렇게 세상에서 으뜸가는 무공을 가진 남자가 그녀의 것이라니…….
그가 동작을 멈추었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온 하늘로 날아오른 낙엽과 낙화가 천천히 그의 머리를 스치고 그의 눈썹을 지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늘씬한 체형의 그는 그림 같은 눈매와 온화한 눈빛을 가진 소탈한 공자였다. 방금 전 살기가 흉흉했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위지불이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뭘 그리 보는 것이냐? 날 못 알아보겠느냐?”
어리둥절한 그녀의 모습에 남제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폐하는 참 멋져요.”
위지불이는 자기도 모르게 진심을 말했다.
남제화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안 멋있었다면 네 마음에 들었겠느냐?”
“전 그렇게 천박한 사람이 아니에요. 폐하의 무공 실력을 보니 폐하가 달리 보여요.”
위지불이는 문득 물었다.
“전쟁에 저도 데려가 주실 거죠?”
“물론이지.”
남제화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위지불이가 펄쩍 뛰면서 그를 때렸다.
“아직도 그 소리예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멋있는 남제화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머리를 감싸 안고 위지불이에게서 도망쳤다.
“감히 황제를 때리다니, 장로들에게 일러바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