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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50)화 (849/1,192)

제850화

그 후로도 장로들과의 논쟁은 계속되었지만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남제화는 계속 망설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위지불이가 옳다는 걸 깨달았다. 황권을 되찾지 못하면 앞으로도 장로들의 협박에 시달릴 것이다. 그의 후손들까지 그들에게 휘둘릴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해결해야 했다.

이날 밤, 그는 서재에서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무도 들어가 방해할 수 없었다. 위지불이는 호기심이 동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부드러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그녀는 과일을 먹으며 무희의 공연을 구경했다. 가냘픈 춤사위와 청명한 종소리에 문득 아운소가 떠올랐다. 아운소는 무사히 부락으로 돌아갔을까? 그녀 때문에 화가 많이 나진 않았을까?

밤이 깊어서도 가무는 계속됐다. 한참 동안 공연을 보던 위지불이는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서재에서 나온 남제화는 꾸벅꾸벅 조는 그녀를 발견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꼭 병아리가 쌀을 쪼아 먹는 것처럼 졸고 있었다. 그는 이마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위지불이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가 침전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가무가 멈췄다. 순간 사방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의 뒤로 장막이 소리 없이 늘어져 그림자를 가렸다.

궁녀와 시종들은 상황을 보고 멀리 물러났다. 넓은 침전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울릴 정도로 고요했다.

어쩌면 너무 조용했기 때문일까? 위지불이가 갑자기 눈을 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천장을 본 그녀는 눈을 깜박거리더니 갑자기 일어나 앉았다. 남제화는 마침 장막을 정리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봤다.

“깼느냐?”

위지불이가 물었다.

“왜 제가 여기 있어요?”

“짐이 너를 안고 왔다.”

위지불이는 눈을 부릅떴다.

“제가 폐하께 여쭙는 건… 왜 나를 안고 여기까지 왔느냐는 거예요.”

“짐이 보니 네가 졸고 있기에 너를 안고 이리로 왔다. 너를 마음 편히 재우고 싶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느냐?”

위지불이는 손을 뻗어 그를 한 대 때렸다.

“제가 졸고 있으면 당연히 제 방으로 데려다 줘야죠. 저를 여기까지 안고 와서 뭘 하시려고 그런 거예요?”

남제화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네 생각에는 짐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위지불이는 당돌하게 발길질을 했다.

“폐하께서 또 엉뚱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그녀가 나가려고 하자 남제화가 발목을 잡았다.

“사람을 발로 차고 도망가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느냐?”

“폐하께서는 어쩔 생각이세요?”

“보상 삼아 오늘 밤은 짐과 함께 자거라.”

“꿈도 야무지시지!”

위지불이는 발을 빼내려 힘을 주었지만, 남제화가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여러 번을 시도해 봐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남제화는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얼굴엔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불이, 너도 생각해 보거라. 짐은 수십 년 동안 혼자였다. 비록 그건… 그렇지만, 남자는 말이다. 어쨌든… 그렇지?”

위지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도통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린 여인의 맑은 눈빛에 남제화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짐, 짐은 사실… 짐은 말이다…….”

그가 우물쭈물하자 무언가 눈치챈 위지불이가 다리에 다시 힘을 줬다.

“폐하, 어찌 이러세요? 저는 정숙한 여인이라고요.”

위지불이가 몸을 둥글게 말자 남제화는 헛웃음이 나왔다.

“같이 자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뭐 어떠하냐?”

“그때랑은 다르죠.”

예전 얘기를 꺼내니 위지불이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제가 여인인 줄 몰랐잖아요. 이제는 알았으니 안 돼요.”

“어차피 나에게 시집올 게 아니냐?”

“태황께서 동의하지 않았고 장로들도 동의하지 않았잖아요. 저의 셋째 오라버니도 동의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동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혼례를 올릴 수 있겠어요.”

“너는 신경 쓸 거 없다. 짐이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그럼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죠. 동방화촉의 밤은 그때 다시 이야기해요.”

위지불이는 멀찌감치 그를 피해서 침대 뒤로 뛰어가 자기 방으로 도망갔다. 남제화는 그녀가 마루를 쿵쿵거리며 도망가는 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이마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는 아주 건강한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로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심장이 근질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올곧은 남자로서 정도에 어긋나는 짓을 할 순 없었다. 그건 그녀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지금은 시끄러운 시기가 아니던가.

사실 그는 그저 그녀를 놀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 * *

사흘 뒤, 일전에 놓아 주었던 전서구가 소식을 가져왔다. 남제화는 전서구 다리에서 작은 대나무 통을 풀고 안에 있는 작은 종이 쪽지를 꺼내 천천히 펼쳤다. 글자는 하나도 없고 공작새 깃털만 하나 그려져 있었다.

남제화는 그 깃털을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손을 입가에 대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곧바로 은색 가면을 쓴 한 사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아포 족장이 승낙했으니 네가 사람을 데리고 가서 속전속결로 처리하거라. 짐이 너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마.”

“알겠습니다. 폐하,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은빛 가면의 사내는 일어나서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위지불이가 막 들어왔다. 창가에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곧장 칼을 뽑았다. 서둘러 남제화의 곁으로 달려간 그녀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폐하, 괜찮습니까?”

남제화는 두 팔을 펼치며 말했다.

“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느냐? 어서 칼을 거두어라. 잘못하면 다친다.”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위지불이는 얼마 전 일을 떠올리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은 걱정해서 그러는데 폐하는 놀리고 있어요!”

남제화는 왠지 따뜻해진 가슴에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짐은 궁에서 아주 안전하니까. 방금 전 그 사람은 짐의 사람이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좋은 문은 놔두고 왜 창문으로 다니는 거예요? 무공이 세다고 자랑하나?”

“…….”

“누구예요?”

“짐의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다.”

“폐하께서는 한가한 황제잖아요. 폐하를 대신해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도 있어요?”

남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한가한 황제도 곁에 사람은 두고 있지.”

“그럼 안심이에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사실 저 혼자 폐하를 보호해야 하는 줄 알고 고민이 좀 많았거든요.”

“…….”

장로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본 이후, 위지불이는 그의 무공 실력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니. 남제화는 퍽 가슴이 따뜻해졌다.

“불이, 짐이 너의 부모님을 남원으로 모셔 오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지불이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왜요?”

“동월에서 부모님이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느냐? 차라리 그들을 남원으로 데려와 정착시키는 게 어떻겠느냐? 짐이 큰 저택을 내려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하겠다. 그러면 너도 부모님을 만나는 게 훨씬 편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부모님이 오려고 하실지 잘 모르겠어요.”

“시도도 안 해 보고 어찌 알겠느냐?”

위지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시집간 무양 공주도 예식에 오나요?”

“짐은 그녀가 올 수 있기를 바란다.”

남제화는 창밖에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봤다. 그녀를 보지 못한지도 이미 십여 년이 흘렀다. 정말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럼, 제가 부모님께 편지를 쓸게요. 하지만… 부모님이 꼭 오신다는 보장은 없어요.”

위지불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편지를 받으시면 남원까지 달려오셔서 그녀를 끌고 돌아가려 하실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를 만나자마자 일도양단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원수의 아들에게 시집가려는 걸 보고만 있을까? 남제화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다. 짐이 다 알아서 하마.”

* * *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남원 황궁은 평소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또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남제화는 여전히 한가한 황제였고 더 이상 황후 책립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재에 있는 시간이 늘었고 그 횟수도 많아졌다.

그가 황후에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자 위지불이 또한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매일 남제화의 곁을 지켰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산책하고, 공작에게 먹이를 주었으며 나무를 조각했다. 그가 의사당에 가면 그녀도 따라가서 기세 좋게 문가에 서 있었다.

어느 장로가 남제화에게 불경한 태도라도 보이면 위지불이는 허리춤에 있는 단도에 손을 올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언제라도 쳐들어가서 베어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남제화의 호위를 자처한 후로, 장로들은 남제화와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그게 모두 자신의 공로라고 여기고 나름 성취감을 느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남제화에게 시집갈 수 없다면 이렇게 그를 따라다니며 측근 호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다.

또 며칠이 지나자 정전에서 일하는 시종 중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남제화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남제화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별거 아니다. 나이가 찬 이들은 궁을 나가고 새로운 일손이 충원되는 거란다.”

그의 말에 위지불이도 더는 묻지 않고 가볍게 넘겼다. 이틀 후, 남제화가 의사당에 가려고 하자 위지불이도 자연스럽게 따라나섰다. 하지만 오늘따라 남제화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정전에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어찌 측근 호위가 그에게서 떨어질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폐하, 저에게 감추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남제화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돌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되었다. 너도 함께 가는 게 좋겠구나.”

그라고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겠는가? 역시 자신의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심할 수 있었다.

그날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길을 걷는 내내 햇빛이 찬란하고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남제화가 의사당에 들어가자, 장로들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예를 취했고 국사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위지불이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날카로운 눈매로 의사당 안을 훑어봤다.

사실 그녀는 평소에 좀 나태한 편이었다. 앉을 수 있으면 굳이 서 있지 않았고, 누울 수 있으면 굳이 앉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늘 신경을 바짝 세웠다. 어린 백양나무 같은 모습에 아무도 그녀를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남제화는 장로들의 이야기만 들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장로들이 의견을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의논을 마친 뒤, 신하들은 양쪽으로 갈라서며 내일 다시 뵙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남제화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짐이 장로들에게 의견을 묻고 싶은 일이 하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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