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9화
도 장로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공격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이, 입만 산 계집 같으니!”
남제화는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살짝 들더니 장포를 펼치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는 재미있는 연극을 구경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싸움에서는 아무리 장로들이라도 위지불이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저는 장로님께 도리를 알려 드리는 거예요.”
위지불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장로들이 황상을 업신여긴다는 소식이 백성들 귀에 들어가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장로들이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도 장로는 그녀의 말에 자극을 받아 포효했다.
“그게 무슨 허튼소리야!”
위지불이는 깜짝 놀란 척 어깨를 움츠린 채 팔꿈치를 감싸고 투덜거렸다.
“장로님, 어찌 그렇게 소리를 지르세요? 혹시 찔리는 거라도 있으세요? 음흉한 속셈이 있으면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숨길 수 없는 법이거든요. 설마 제 짐작이 적중했나요? 혹시 장로님은 반역을 꿈꾸세요?”
“난 그런 적 없다! 여기서 이간질을 할 생각인가! 음험한 여자 같으니! 황상을 미혹하더니, 이제는 생떼를 부리는 거냐? 어서 이곳에서 나가라…….”
위지불이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는 황상이 계시는 곳이에요. 황상만이 저에게 나가라고 명하실 수 있어요. 장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도 장로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저게 아가씨가 맞는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떠들지 않는가? 동월 여자는 수치심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와는 다르게 그녀는 차분하게 그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여자를 때린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가가서 손바닥을 내리치고 싶었다.
위지불이는 여러 사람 면전에서 그의 위세를 꺾어 놓았다. 겁 없이 남제화에게 덤비던 그 성질이 어디 갔겠는가? 비록 남제화는 자신을 쓸모없는 황제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인정한 남자를 누구도 업신여길 수 없다.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도 장로를 화가 나게 만드는 걸 보니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금까지 불쾌했던 마음도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나머지 네 명의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제화와 위지불이의 혼사에 있어서 그들 역시 같은 뜻이었지만, 평소 도 장로는 너무 교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도 장로가 곤경에 처했으니, 그들은 당연히 가만히 구경할 뿐이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기도 하고.
위지불이는 도 장로에게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다시 반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도 장로는 다리가 휘청거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너, 너, 너…….”
“됐으니 그만하게. 화내지 말고. 화를 내면 몸이 쉬 상하는 법이니.”
남제화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도 장로는 황제가 자신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화내지 말거라. 그러다 몸이 상할지도 모르니.”
도 장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화를 냈단 말인가. 황제가 눈이 멀지 않고서야 어찌…….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데리고 의사당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위지불이는 별안간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남제화가 자신을 쓸모없는 황제라고 칭한 것이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황제임에도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 앞에서 일개 신하에게 혼이 나다니……. 만약 동월이었다면 애초에 목이 베였을 것이다.
그녀가 작은 얼굴을 구긴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남제화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싸워서 이기지 않았느냐. 왜 아직도 기분이 나쁜 것이야?”
“폐하 때문에 제가 다 억울해서요.”
남제화는 빙그레 웃었다.
“우스운 꼴을 보였구나. 짐이 전부터 말했잖느냐. 짐은 쓸모없는 황제라고.”
“폐하.”
위지불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들은 왜 황제인 폐하께 불경을 저지르는 거예요?”
“짐은 황제라는 빈껍데기만 가졌을 뿐이다. 병권, 정권, 다 저들의 손에 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저들은 자신들이 직접 황제가 되지 않나요?”
“다섯 명의 장로가 있으니 한 명이 권력을 잡는 것도 힘이 들겠지. 저들은 워낙 총명해서 내부에서 싸우지 않는다.”
남제화는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덕망 높은 장로들이니 역모라는 죄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 태황의 여세가 남아 있으니 감히 짐을 함부로 건들 수 없겠지.”
“태황은 폐하의 편입니까?”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은 성이 남가이고 황실 혈통을 가지고 있지. 태황은 절대 다른 성씨가 황제가 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것이야. 태황은 은밀히 장로들을 견제하지만, 짐이 권력을 독차지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야.”
“폐하께서는 왜 황권을 되찾지 않으세요? 그러면 남에게 핍박을 받지 않을 거잖아요.”
“사실 이번 일은 짐이 잘못한 것이다.”
남제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짐은 황제가 될 마음이 없었지. 한데도 기어이 남원을 떠나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단다. 조정의 일을 신경 쓰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권력이 분산되도록 내버려 두었단다. 그래서 남원이 지금 이 꼴이 되어 버렸어.”
위지불이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폐하께서 왜 낙담하셨는데요?”
남제화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았다.
“설마 폐하께서 좋아하시던 그 처녀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갔기 때문이에요?”
남제화는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밀었다.
“도대체 생각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 갑자기 웬 질투야?”
위지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두어 번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질투를 하다니요? 이미 오래전 일인 걸요. 그 언니는 이제 폐하와는 무관한 사람이잖아요. 이미 진작에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면서요?”
“그래, 그녀는 이미 짐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남제화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옛날이야기는 언급하지 말자꾸나. 이제 앞으로 짐에게는 너밖에 없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웃었다.
“물론 저만 있죠. 다른 사람을 어디 찾기만 해 봐요.”
저를 협박하는 그녀의 말에 남제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거냐?”
위지불이는 얼른 손을 허리춤에 있는 칼 위에 얹었다.
“제 칼한테 물어보세요. 뭐라고 답하는지.”
그녀의 무술은 어설펐지만 한 번도 기세가 꺾인 적이 없었다. 이 계집은 정말…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코끝을 꼬집었다. 위지불이는 끙끙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자꾸 제 코를 비틀어요?”
“때리는 것은 예쁘기 때문이고, 욕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위지불이는 매섭게 그에게 호통을 쳤다.
“흥, 저도 폐하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보여 줄게요!”
둘이서 웃으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궁인들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들이 모실 장래의 황후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위지불이는 맨 처음 화제로 돌아갔다.
“폐하, 이대로 가는 건 방법이 아니에요. 황제로서 위엄을 보여야 하는데 신하에게 구박을 당하는 지경이라뇨! 오늘은 제가 아니었다면 폐하께서는 구박을 당해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래, 맞단다. 오늘 저들은 모두 너의 위풍당당함을 보았지.”
남제화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들이 다시는 짐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눈을 부라렸다.
“저는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폐하께서는 그렇게 장난만 치시면 어떻게 해요. 전 다 폐하를 위해 하는 말이라고요.”
“그래. 네 말을 들으마.”
남제화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당연히 황권을 되찾아야죠.”
“지금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섯 명의 장로들이 오랫동안 집권했으니, 권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그들에게서 권력을 되찾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위지불이의 생각은 달랐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내야죠.”
“어떻게?”
위지불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다 죽여 버릴까요?”
위지불이는 좀 부끄러운 듯 코를 쓱 만졌다.
“혹시 제가 너무 잔인한가요?”
“아니다.”
남제화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진지하지 않은 태도에 또 혼쭐이 날까 봐 애써 참았다.
“어떤 권력이든 주인이 바뀔 때는 피를 흘리곤 했지. 네 말이 옳단다. 짐이 누구를 먼저 죽이는 게 좋을지 잘 생각해 봐야겠구나.”
“…….”
사실 그녀는 자신의 결심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 결코 정말로 누군가를 죽이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제화가 진지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당황한 그녀의 모습에 남제화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놀랐느냐? 방금 그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느냐?”
위지불이는 말했다.
“사람을 죽여야 되면 제가 도와 줄 테니까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는 말아요. 남원은 불교 국가잖아요. 부처님이 나무랄 수도 있어요.”
남제화는 감동을 받아 가슴이 떨렸다. 그녀를 꼭 끌어안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이, 짐은 이놈의 황제의 자리를 안중에 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하지만 오늘부터 짐은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려 한다. 짐은 황권을 회수할 것이다. 누구도 짐에게 불경을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 힘으로 내 소중한 사람을 꼭 지켜 낼 것이다.”
그의 품 안에 기대어 있던 위지불이는 그의 진실된 약속을 느낄 수 있었다.
“폐하, 폐하께서 무엇을 하시든 저는 폐하를 지지할 거예요.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든다 한들, 찍소리도 하지 않고 눈썹도 찡그리지 않을게요.”
“…….”
세상에 이렇게 강렬한 사랑 고백이 또 있을까? 좀 우습게 들리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위지불이가 진심으로 말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달콤씁쓸한 감정에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불이, 칼산과 불바다엔 갈 필요 없다.”
그가 그녀의 귀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냥 짐의 곁에만 있으면 된다.”
대낮에 입맞춤을 받자 위지불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얼른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시선을 떨구고 소리쳤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남제화는 일부러 모른 척 물었다.
“짐이 어쨌는데?”
위지불이는 그를 노려보았다.
“너무 점잖지 못하잖아요.”
그녀가 아기 고양이처럼 털을 바싹 세우는 걸 보니 남제화는 더욱 신이 났다.
“너를 보니 짐이 점잖게 행동할 수가 없구나.”
위지불이는 완도를 뽑아 손바닥에 툭툭 치며 말했다.
“어디 계속 그렇게 놀려 보세요.”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협박을 즐겁게 받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무서워서 더는 못하겠구나.”
위지불이는 콧방귀를 뀌더니 완도를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그녀는 마치 교만한 공작처럼 뒷짐을 지고 고개를 높이 쳐든 채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