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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47)화 (846/1,192)

제847화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황상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지.”

“태황께서는 짐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남제화는 비단 한 장을 여제에게 던졌다.

“이건 나사의 자백서입니다. 잘 읽어 보십시오.”

여제는 자백서를 성의 없이 읽었다.

“자백서 한 장으로 뭘 설명할 수 있지?”

“태황께서는 비록 밖으로 못 나가지만, 소식이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그날 밤 일어난 일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모르는 척하시는 겁니까?”

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황상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그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비록 짐과 태황 사이에는 의견 차이가 있지만, 짐은 태황께서 사리 분별이 명확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괜히 무관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겠지요. 짐도 태황에게 늑대를 황실로 끌어들이려 했던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태황께서도 불이 몸에 넣은 고충을 없애주길 바랍니다.”

여제가 눈을 번쩍 들었다.

“화아, 나는 위지불이의 고충을 없앨 수 없다. 위지 가문이 나를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하는데 위지의 딸이 네 곁에 있는 걸 내가 인정할 수 있겠느냐? 황상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견제할 수단은 있어야 한단다.”

남제화는 태황이 위지불이의 고충을 없애 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의도를 탐색하기 위해 물은 것이다. 그는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태황이야말로 진짜 짐의 안위를 위협하는 사람입니다.”

“화아, 어찌 어미를 그렇게 말하는 거니? 너는 이 어미의 몸에서 떨어진 살붙이인데, 어찌 어미가 너를 해할 수 있겠느냐?”

남제화는 냉소를 지었다.

“태황께서는 건망증이 심하시지만, 짐은 아닙니다. 십 년 전의 일을 짐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간 여제의 안색은 창백해지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이제 보니 황상은 계속 나를 증오했던 거로군. 그렇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

“그건 내가 태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 태황처럼 잔인하지 않고 태황처럼 몰인정하지도 못합니다.”

남제화가 이어 말했다.

“태황께서 불이의 몸에 있는 고충을 제거해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짐에 관한 일은 태황과 무관하니 서로 간섭하지 마시지요.”

여기까지 듣고 여제는 마침내 남제화의 의도를 깨달았다.

“황상, 위지불이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냐?”

“예.”

“안 된다!”

여제는 완강히 반대했다.

“곁에 두고 데리고 노는 건 상관없지만, 위지불이가 남원의 황후가 될 수는 없음이야. 그건 절대 안 된다.”

“왜 안 됩니까?”

“그녀는 일개 평민일 뿐, 황상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화아, 마음 내키는 대로 결정하지 말아라.”

남제화는 냉랭하게 웃었다.

“태황의 눈에는 어떤 일이든 가치를 따져야 하겠죠. 위지불이는 짐에게 태황께서 생각하는 이득을 주진 못하지만,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 오직 그녀만이 짐에게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화아, 너는 사랑놀음에 너무 빠진 것 같구나.”

“지난 십여 년 동안 짐은 한 번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 혼사를 결코 동의하지 않겠다.”

“태황께서 동의하든 하지 않든 짐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로들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황상, 너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결국에는 민심을 잃게 될 것이다.”

더 이상 태황과 다투고 싶지 않았던 남제화는 자백서를 챙겨 든 채 돌아섰다. 등 뒤에서 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위지불이를 죽일까 두렵지 않으냐?”

“감히 그런 짓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녀를 돌아본 남제화는 싸늘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감히 그녀를 건드린다면 남원 전체를 그녀와 함께 매장할 겁니다.”

여제는 놀라서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황상!”

남제화는 냉랭한 미소를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 버렸다.

여제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위해 천하 강산을 버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남제화는 묵용감과 같은 사랑에 미친 미치광이였다.

지하 감옥에서 나온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조용히 그녀의 뒤로 돌아서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위지불이의 반응이 느리지 않으리라곤 누가 알았으랴? 그녀는 순식간에 획 하고 완도를 뽑더니 곧바로 맹렬히 휘둘렀다. 놀란 남제화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살짝 비틀거린 그는 팔을 들어 그녀를 붙들며 말했다.

“짐이다.”

위지불이는 눈을 부라렸다.

“폐하! 뭐 하러 저를 놀라게 하셨어요? 잘못해서 폐하를 다치게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남제화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의 어설픈 실력으로 그를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위지불이는 그가 무엇 때문에 웃는지 알고 또 눈을 부라렸다.

“유치해!”

남제화는 느낀 바를 털어놓았다.

“짐은 너와 함께 있으면 예전보다 많이 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폐하께서는 왜 늘 나이에 연연하세요? 저는 싫지 않다고 했잖아요.”

“…….”

“비록 폐하께서 나이가 좀 많으시지만… 제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나이가 많으면 사람을 아낄 줄 안다고.”

“어머니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지?”

“마누라가 죽은 홀아비가 저를 마음에 들어 했던 적이 있었어요. 어머니께서…….”

안색이 급격하게 달라진 남제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니가 널 홀아비에게 시집보내려 했다고?”

위지불이가 깜짝 놀라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머니가 저를 다그치지는 않았어요. 그냥 저의 의견을 물으셨죠. 또 그 남자의 집안 사정이 넉넉했고 첩도 없으니 괜찮은 혼처이긴 했지요.”

“아내가 죽었으면 나이가 많았겠지. 생김새도 평범했을 테고.”

위지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과거를 떠올렸다.

“생김새는 나쁘지 않았어요. 나이도 폐하보다 어렸고요. 말하자면 우리가 신분 상승을 꿈꾼 거죠.”

남제화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용모가 준수한 건 둘째 치고 홀아비 나이가 그보다 적다니.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잡아먹어 버린 것 아닌가? 그는 승복할 수 없었다.

“정말 짐보다 나이가 어렸느냐?”

“음, 저보다 열 살 정도 많았어요. 폐하께서는 올해…….”

남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위지불이는 눈을 깜박거리며 점점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았다. 까치발을 한 그녀가 슬쩍 다가가 그의 등을 때렸다. 남제화는 깜짝 놀랐다.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짐에게 유치하다고 하더니 이젠 너도 유치한 사람이 되었구나.”

위지불이는 생글생글 웃었다.

“저는 사소한 원한이 생기면 꼭 갚아야 하는 사람이라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아요.”

남제화는 피식 하고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넌 정말이지.”

한바탕 장난을 치고 나니 그의 불쾌감이 싹 가셨다. 그는 위지불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석양은 피처럼 붉고 하늘 가득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점점 멀어졌다.

* * *

남원 황궁에 세 명의 부족 공주가 왔지만, 두 명은 떠나고 한 명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끌벅적했던 황후 책립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백성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야만스러운 부족 공주들이 황제의 입맛을 맞추지 못했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세 명의 공주가 황후의 자리를 놓고 싸워 모두 자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황제가 여색을 밝히지 않는다고 했다…….

위지경용은 주위에 있는 백성들이 횡설수설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위지불이를 쳐다봤다. 위지불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주전자를 들고 셋째 오라버니의 잔을 채워 주었다. 위지경용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넌 계속 오라비에게 그가 마음씨 선량하고 인자한 황제라고 말했었지. 지금은? 황제는 조용히 세 공주를 해결했다. 넌 정말 이런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게냐? 난 불안해서 안 되겠다.”

“셋째 오라버니.”

위지불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저에게 그렇게 할 리가 없어요.”

위지경용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제왕의 마음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가 어쩌면 너를 좋아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황권 앞에서는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음이야.”

“그는 절대 저를 희생시키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안 하겠지. 장래에는? 훗날 그가 황권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그는 너를 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황제가 되는 걸 싫어했어요.”

위지불이가 반박했다.

“그는 황권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검 한 자루 들고 천하를 유람하는 걸 좋아해요. 만약 황제가 아니었다면 저와 함께 세상을 유랑할 거라고 했어요.”

위지경용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일갈했다.

“그건 거짓말이다.”

“정말이에요. 셋째 오라버니. 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했어요.”

“너를 비로 삼겠다는 게냐?”

“아니에요.”

위지불이는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저를 황후로 세우겠다고 했어요.”

위지경용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를 한 대 때렸다.

“야! 이 멍청아! 그 말을 믿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거라. 설령 그의 마음이 그렇다고 한들 네가 시집갈 수 있을 것 같아? 너희 부모님이 동의하실까? 위지 가문은?

네가 아무 말 없이 슬쩍 시집을 간다고 해도, 세상에 바람이 새지 않는 벽은 없어! 그 사실이 동월에 전해진다면 가문 사람들이 네 부모님을 어떻게 보겠느냐? 부모님들이 얼굴이나 들고 사실 수 있겠어?”

위지불이는 그렇게 깊이 있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셋째 오라버니의 말을 듣다 보니 제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몸에 심어진 고충 때문에 다신 동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뒤였다. 부모님이 이 모습을 보신다면 괴로워하실 게 뻔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남제화와 혼인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부모님이 제대로 살아가실 수 있을까?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그녀는 남제화와 혼인을 한 뒤 달콤한 신혼 생활을 동경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어려운 일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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