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6화
위지불이는 이럴 때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또다시 검은 옷 사내들에게 붙잡힌다면 저들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얌전히 남제화 뒤에 숨어서 그가 사방을 평정하는 걸 바라봤다.
남제화가 무공이 높다는 건 알았지만, 그의 무위를 정확하게 확인한 적은 없었다. 이건 그녀에게 굉장히 보기 드문 기회였다. 그녀는 남제화를 따라 좌우로 움직이면서 그의 초식을 하나하나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의 검광이 한 무리의 빛처럼 남제화를 감싸 안았다. 그를 감싸던 빛이 사라지자 자객들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자들은 모두 혈 자리가 막혀 일어서지 못하고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위지불이는 그 난장판 속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찾았다. 뜻밖에도 깨지지 않고 모두 완전했다. 그녀는 물을 한 잔 따라서 남제화 앞에 내민 뒤, 까치발로 발돋움해서 정성스럽게 그의 땀을 닦아 주었다.
“폐하, 수고하셨어요.”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쩐 일로 왔느냐?”
위지불이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고 평락전으로 보냈잖아요. 거기다 향기로운 향까지 피우는데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멍청한 거죠.”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그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짐은 저들이 너의 잠을 방해할까 걱정했을 뿐이다.”
“폐하께서는 제가 위험에 빠질까 봐 걱정하신 거죠?”
위지불이는 자기 주먹을 그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폐하,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제가 연습한 게 다 헛수고였나요?”
남제화는 그녀의 자그마한 주먹을 감싸며 웃었다.
“아니, 절대로 헛수고가 아니었다. 마침 네가 도착해서 짐이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지.”
위지불이가 턱을 치켜들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있는 한… 폐하께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남제화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말은 그가 늘 위지불이에게 하던 말이었다. 반대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왠지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는 평생 동안 누군가를 뒤에 숨겨 보호하는 것에만 익숙했다. 훗날 어린 계집에게서 ‘내가 있으니 네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는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여태껏 남에게 이렇게 귀하게 여겨져 본 적이 없었다. 코끝이 찡해진 그는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고맙구나. 불이.”
품에 안긴 위지불이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의 품속에 있던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징그럽고 해괴한 광경이었다.
“폐하, 저들의 입이 왜 저런 거죠?”
남제화가 그녀를 풀어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짐이 저들의 턱을 빼 버렸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저들이 독을 마시고 자살할까 봐 그랬군요?”
“그렇지.”
남제화는 창가로 걸어갔다. 이미 날이 밝아 바깥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칼싸움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 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위지불이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어? 날이 벌써 밝았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빛 햇살이 구름을 뚫고 곧게 내리쬐었다. 붉은 아침 해는 이미 수평선에 반쯤 걸려 있었다.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도 또 분명 다른 새벽이었다. 남제화가 위지불이의 손을 붙잡았다.
“나가자꾸나.”
그들이 정전 쪽으로 향하는데 저쪽에서도 누군가 걸어왔다. 강암룡이었다. 위지불이는 그가 은갑을 입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와 달리 매우 위풍당당해 보였다. 강암룡이 공수를 하며 예를 갖췄다.
“폐하, 소인이 나사 공주를 데려왔습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결박한 나사를 천천히 끌고 왔다. 의자에 앉은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곁에 앉으라는 뜻을 내비쳤다. 나사는 가까이 다가와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이죠. 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남제화는 말했다.
“그럼, 공주가 자백서를 쓰시오.”
나사의 시선이 위지불이에게 머물렀다.
“정말 폐하께서 당신을 황후로 세우실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는 단지 당신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위지불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남제화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죽기 직전인데도 우릴 이간질할 생각이시오?”
“아니란 말인가요?”
나사는 냉소를 지었다.
“제가 그 모든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폐하께서도 공범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설마 옆에서 부채질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하실 겁니까? 사냥할 때, 위지불이를 향해 활을 쏜 사람 중에 폐하가 사주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있었지.”
남제화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이미 불이에게 설명했소.”
“세 공주가 입궁했을 때 폐하께선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두셨군요. 고여아가 성격이 급한 걸 알고 그녀의 질투심을 이용했죠. 그녀가 위지불이를 공격하게 해 그녀의 약점을 잡은 거예요. 안타깝게도 장로들이 고여아를 보호하자 폐하는 더욱 강도를 높여 위지불이를 이용해 그녀를 자극했어요. 고여아가 다시 한번 손을 쓰게 해서 그걸 빌미로 궁에서 쫓아내려고.”
“영사가 다친 건 공주의 소행인 것 같은데… 어째서 그걸 짐의 탓으로 돌리시오?”
“폐하께서는 영사가 다친 게 이 나사의 짓인 것을 아시면서 왜 그때 저의 죄를 들춰내지 않았나요? 폐하께서 그 일을 폭로하지 않은 건 그 불똥을 아운소에게 옮기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남제화가 물었다.
“그 죄를 아운소 공주에게 뒤집어씌운 건 공주가 한 일이 아니오? 그 궁녀의 죽음은 공주의 짓이지 않소.”
“굳이 왜 물으십니까? 이미 다 아는 사실이시면서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침묵하셨죠. 제 손을 빌려 두 공주를 궁에서 쫓아내려고요. 위지불이에게 아운소를 따라 출궁하라고 한 것도 폐하의 생각이셨죠?”
위지불이가 끼어들었다.
“그 일은 폐하께서 저에게 이미 설명하셨어요.”
“설명?”
나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폐하가 당신에게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알려줬나요?”
“짐이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계산했지만, 공주의 흉악함은 빠뜨렸소. 설마 공주께서 사람을 보내 불이를 죽이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먼저 고여아, 그리고 아운소 그다음엔 위지불이. 저의 길을 막아선 것들은 모두 없애야죠. 고귀한 천자를 얻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요?”
나사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을 말해 볼까요? 공주 두 명이 모두 황궁을 나갔는데, 폐하께서는 계속 황후 책립을 미루셨죠. 시간을 끌어서 저를 초조하게 하실 생각이셨어요. 제가 태황의 손을 빌어 폐하를 압박할 거란 걸 이미 예상하고 한바탕 연극을 꾸며서 위지불이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밝히셨죠.
비록 조서는 내리셨지만, 혼례 날짜를 정하지 않으니 제가 가지고 있는 공문서 한 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저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죠. 폐하께서는 제 심사를 이미 잘 알고 계셨어요. 이쯤 되면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것도요.
이렇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공격하는 게 나았죠. 어차피 조서도 받았겠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전 예비 황후로서 궁중의 모든 일을 맡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이 모든 건 폐하께서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일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그녀는 위지불이를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폐하의 바둑알에 불과했어요. 폐하는 당신을 이용해 고여아를 심기를 건드렸고, 당신을 이용해 아운소를 홀린 것이죠. 당신을 이용해 내가 반역을 도모하도록 종용했고요.”
여기까지 말한 나사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위지불이가 기억하고 있는 온유한 나사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위지불이는 외톨이로 지내던 때, 나사가 자신을 옥천전으로 초청하여 동월 요리를 만들어 주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걸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이해심이 많고 점잖았던 그녀의 모습에 나사가 황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어떻게 이리 변할 수 있을까?
“공주는 말솜씨가 좋군.”
남제화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위지불이를 바라봤다.
“짐이 너를 바둑알로 여겼다는 말을 믿느냐?”
위지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는 믿지 않아요.”
“그럼, 짐이 너를 무엇으로 여기는 것 같으냐?”
위지불이는 어안이 벙벙해서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뇌리에 좀 모호한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긴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남제화는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나의 여자, 짐의 아내가 되어라.”
나사는 깊은 정을 나누는 그들을 보고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갑자기 입안에서 피맛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입술이 세게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사는 다시 병사들에 의해 끌려 나갔다. 위지불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나사를 죽이실 건가요?”
남제화는 나사의 모습이 전각 문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럴 작정이다.”
“그녀가 역모를 꾀했기 때문에요?”
“그녀가 너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이다.”
남제화는 고개를 돌려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너를 위해 공정하게 처리하겠다고.”
* * *
여제는 산지목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화려한 옷자락이 커다란 꽃송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냉랭한 시선으로 남제화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폐하께서 먼저 찾아오시다니. 어째, 과인이 황상의 귀염둥이를 해할까 두려우셨나?”
“짐이 온 것은 태황께서 늑대를 황실로 끌어들이려 한 것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여제의 냉소를 지었다.
“그중에는 아마 황상이 부추긴 것도 있을 텐데?”
남제화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혁흑철 부족이 역모를 꾀한 게 짐이 안배한 일이란 말입니까? 짐이 무슨 짓을 했든,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권력자는 야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더니… 그래서 태황보다 더 야심을 가진 맹우를 찾으셨습니까? 태황께서 혁흑철 부족과 동맹을 맺었을 때 저들은 황후의 자리가 아니라 남원 전체를 원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