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45)화 (844/1,192)

제845화

“괜찮아. 여기서 지내도 된다.”

남제화가 말했다.

“무양 공주가 알게 된다 해도 뭐라고 하진 않을 거다.”

그의 말은 단호했다. 남제화는 분명 그녀가 이곳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가 원한다면 그녀도 이유를 묻지 않고 이곳에서 지낼 것이다.

“알겠어요. 이곳에서 지낼게요.”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그래도 폐하께서 저를 보러 매일 오셔야 해요.”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은 그는 그녀를 데리고 평락전 곳곳을 소개해 주었다.

남제화는 평락전에서 위지불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돌아갔다. 위지불이는 모처럼 친근한 궁전에서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매우 깊이 잠든 탓에 깨어났을 때는 이미 황혼이 질 무렵이었다. 너무 많이 잤는지 온몸이 나른했다. 그녀는 무릎을 껴안고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그 시각, 남제화는 정전의 복도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강암룡은 조용히 다가와 권했다.

“폐하, 식사를 드실 시간입니다.”

그는 짧게 대답했지만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가만히 웃음을 보였다. 잠시 후, 기운 없이 몸을 돌려 정전으로 돌아갔다.

* * *

황혼이 내려앉고 나면 곧이어 먹물 같은 어둠이 겹겹이 스며들며 대지를 암흑 속으로 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싸늘한 달빛이 궁궐을 비추고 있었다.

남제화는 헐렁한 침의 차림으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가만히 눈을 뜨고 평락전에 있을 위지불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지금쯤 편안한 잠에 빠져있을 것이다. 모래시계 속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처마 위에서 누군가 가볍게 지붕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낯선 소리가 그의 귓가에 크게 울렸다. 왔구나. 결국 정말로 왔어.

그가 천천히 일어나 앉자 날카로운 칼날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남제화가 소매를 흩날리자 등잔의 불꽃이 크게 일렁거렸다. 그리고 밖에서 숨어든 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복면 위엔 두 개의 눈구멍만 보이는 상태였다.

그의 뒤를 따라서 몇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남제화가 깨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경량 감옷을 입고 완도를 손에 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침묵하며 서로를 훑어보며 탐색했다. 남제화가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음성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다.

“드디어 왔군.”

“폐하께서 다 짐작하신 이상.”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칼을 가슴에 겨누었다.

“반항하지 말고 항복하시오. 괜히 고생하지 말고.”

“짐이 반항하지 않고 항복한다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냐?”

“폐하께서는 총명한 분이 아니시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쓸데없는 싸움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소?”

이와 동시에 먼 곳에서는 전투가 벌어진 듯했다. 창밖에서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 꽤 많은 사람이 몰려온 것 같았다. 우두머리인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보이시오?”

남제화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짐도 보인다.”

우두머리는 남제화의 표정에 잠시 멍해졌다. 그는 재빨리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창밖을 살폈다. 일행은 얼른 우두머리 곁으로 돌아와 우두머리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복면 아래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두머리인 남자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사실 이번 일은 짐작하기 쉬웠다. 그자의 야심을 알았으니 그의 예상대로 일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창밖에서 칼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횃불은 점점 늘어났고, 칼싸움 소리도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네 이름이 아반이라 알고 있다. 맞느냐?”

남제화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완도를 쥐고 있었지만 그는 평소의 온화함을 잃지 않았다. 우두머리인 사내가 바로 아반이었다. 그는 남제화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특하시군.”

남제화는 조금도 겸손해하지 않고 하하 웃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짐이 황제가 될 수 있었겠느냐?”

“그러나 폐하께서 멍청한 짓을 하셨소.”

“그게 무엇이냐?”

“폐하께서는 천자를 등에 업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는 말을 들어 보셨소?”

남제화는 경멸하듯 비웃음을 지었다.

“겨우 너희들 몇 명이 짐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때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문으로 들어오더니 아반에게 소리쳤다.

“위지불이를 못 찾았습니다.”

아반은 손을 뻗어 복면을 벗었다. 그는 진한 눈썹과 번뜩이는 눈빛을 가진 영민한 청년이었다. 그는 날카롭게 남제화를 쏘아봤다.

“과연 우리 폐하께서 만반의 준비를 하셨군. 이렇게 되었으니, 저도 뭐라 할 말이 없소이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뒤에 서 있던 자객들이 남제화를 포위했다. 남제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보아하니 한바탕 칼싸움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객 대여섯 명이 남제화를 에워쌌고 아반은 그 모습을 냉정하게 보고만 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들은 모두 고수였다. 남제화를 가운데에 두고 상하좌우를 모두 봉쇄했다. 칼날이 사방에서 번쩍거리며 빈틈없는 공격진을 펼쳤다.

남제화는 비록 버틸 수는 있었지만, 금방 파진破陣하지 못했다. 게다가 아직 공격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남제화는 적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적들은 계속 그를 관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몇 합을 겨루자 남제화는 이들의 진법이 범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몇 번이나 포위를 뚫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속으로 고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반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검은 옷의 사내들은 아주 빠르게 이동해서 다시 공격진을 쳤고 아반에게 자리를 내줬다. 아반은 교묘하게 우세한 자리를 선점했다. 한 병사가 관문을 지키면 장사 만 명도 뚫지 못한다는 말처럼, 정말 뛰어난 자리 선점이었다.

아반의 합류로 공격진의 위력이 크게 커지자 남제화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그는 위기가 닥쳤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장포가 몇 군데 찢어졌을 뿐 부상을 입진 않았다.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뛰어난 정예였다. 다행히 미리 예상하고 준비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 남원의 하늘이 바뀌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눈앞에서 그를 겨냥한 칼날이 갑자기 세 자루가 되어 나타났다. 깜짝 놀란 남제화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초식을 똑바로 봐요!”

익숙한 굵은 목소리에 남제화의 심장이 뜨끔했다. 이때에 위지불이가 그의 처소로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위지불이가 그를 향해 돌진해 왔다. 달빛처럼 하얗게 빛나는 칼날이 검은 옷 사내를 행해 쏘아졌다. 뒤에서 기습을 당할 줄 몰랐던 검은 옷의 자객들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빈틈없던 진형에 구멍이 뚫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남제화의 칼날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힘차게 발차기를 해서 검은 옷 사내를 멀리 걷어찼다. 저들의 공격진이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이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 저들이 어찌 남제화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일사천리로 검은 옷 사내들은 묵사발이 되었다. 그런데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싸늘하게 소리쳤다.

“칼을 내려놓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

남제화가 고개를 들어 보니 위지불이가 자객에게 붙잡혀 있었다. 그자는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위지불이의 머리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을 버려라!”

남제화가 머뭇거리는 사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던 자객들이 일어나 그를 노려봤다.

“어서 칼을 버리라니까!”

자객이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칼날이 그녀의 목 위를 눌렀다. 날카로운 칼날에 위지불이의 피부가 길게 찢어지고 있었다. 남제화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막 칼을 내던지려는데 위지불이가 소리쳤다.

“폐하,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위지불이를 보던 남제화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이, 짐이 어찌 너를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너는 짐이 유일하게 아끼는 사람이다. 너를 위해 짐은 목숨도 버릴 수 있다.”

“폐하.”

위지불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더 흥분했다.

“어차피 저의 목숨은 반쪽짜리 아닙니까? 폐하, 뭐 하러 고심하십니까? 남원 백성들을 위해, 폐하께서는 저를 버려야 합니다.”

남제화의 얼굴은 고통으로 구겨졌다.

“아니! 짐은 그럴 수 없다.”

위지불이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다. 짐은 그럴 수 없다.”

“폐하,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짐은 그럴 수 없다니까!”

“폐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자객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한 명은 절망하고 상심했고, 다른 한 명은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했다. 그들은 이쪽을 봤다가 또다시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편의 가슴 아픈 연극이 따로 없었다. 남제화는 크게 고함을 쳤다.

“짐은 못한다!”

“폐하,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위지불이도 지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이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불협화음이 들렸다.

“헉!”

그건 위지불이를 칼로 위협하고 있던 검은 옷 사내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놀랍게도 작은 단도가 그의 복부에 꽂혀 있었다. 그 단도의 손잡이는 위지불이의 손에 있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여우처럼 교활하게 웃었다. 그녀가 단도를 뽑자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옷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검은 옷 사내는 그제야 속았다는 걸 알아챘다. 위지불이와 남제화가 일부러 연극을 연출해서 자신들의 시선을 끈 것이다. 그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위지불이가 그의 복부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아반은 부리나케 달려와 위지불이를 제압하려 했지만 남제화가 그보다 한발 빨랐다. 그는 순식간에 머리 위로 날아올라 위지불이를 제 등 뒤에 숨겼다.

“잘했다.”

위지불이는 가볍게 웃었다.

“폐하께서 호흡을 잘 맞춰서 다행이었죠.”

“네가 무슨 꿍꿍이인지 짐이 모를 리 있겠느냐?”

그녀가 ‘폐하, 저를 신경 쓰지 마십시오.’라고 입을 연 순간부터 남제화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챘다. 그녀가 흐느끼며 연기를 한 것이다. 그도 시치미를 떼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그녀의 연극에 협조했다. 뜻밖에도 그녀는 정말로 검은 옷 사내들을 깜빡 속였다. 남제화가 그녀에게 말했다.

“뒷일은 네가 나설 것 없다. 넌 네 자신만 잘 보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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