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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44)화 (843/1,192)

제844화

지하 감옥에 도작하자 여제는 꽃이 조각된 커다란 의자에 앉아 우아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와 주셨군.”

“태황께서 짐을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무슨 용무 때문입니까?”

“내 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위지불이를 황후로 세우려 하신다고?”

남제화이 냉정하게 말했다.

“짐의 일입니다. 태황에게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헛소리!”

여제가 벌떡 일어나자 화려한 옷자락이 땅바닥을 쓸고 갔다.

“나도 네가 위지불이를 좋아하는 거 잘 안다. 내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지. 누군가를 좋아하는 느낌이 어떤 건지 잘 알아. 세상에서 가장 좋은 물건을 모두 가져다가 그녀에게 바치고 싶겠지. 그러나 화아, 황후의 자리는 물건이 아니란다. 황후는 너를 도와 대업을 이룰 반려자야. 황후의 배경은 가까운 장래에 너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이다.

지금 남원은 동월의 압제를 받고 있지. 이미 상황을 뒤집기는 어려우니, 우리는 외력을 빌려서 스스로 강해져야만 동월을 대적할 수 있단다. 묵용감은 네 누이동생의 체면을 봐서 남원을 건드리지 않겠지만, 그 이후는? 그가 퇴위하고 묵용린이 보위에 오른다면? 그는 부황과 달리 늑대의 자식이라…….”

남제화가 냉소했다.

“죄의 업보를 받으려니 두렵습니까? 전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황께서는 어떻게 외손자를 해하려 하셨습니까?”

“그 아이의 성씨가 묵용이니까!”

여제의 얼어붙은 눈빛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남씨 가문의 사람이다. 나와 그 아이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국가와 국가가 서로 공존할 방법은 전혀 없단 말입니까?”

“뭇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공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인과응보입니다. 그 당시 태황께서 천면인 계획을 실행해서 묵용감의 분노를 사지 않았다면 과연 남원이 오늘날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천면인 계획이 아니었다고 해도 남원은 언젠가 동월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다. 약육강식이야말로 전통적인 생존 법칙이지.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다들 목숨을 걸고 재물을 탐하지. 야심은 버릴 수 없단다. 화아, 황가에 태어났으니 이런 도리를 모르진 않겠지?”

“태황께서 야심이 있으니, 천하의 모든 군왕들이 다 야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여제는 탄식했다.

“되었다. 더 이상 말다툼하기 싫구나. 위지불이가 그렇게 좋다면 곁에 두거라. 하지만, 그녀를 황후로 삼을 수는 없다.”

“짐이 황제입니다!”

“나는 네가 비뚤어진 길로 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여제가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위지불이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으니 알아서 하거라. 참고로 나는 네가 즉시 조서를 내려서 나사 공주를 황후로 세우길 바란다.”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세 개의 부족 중에 태황과 동맹을 맺은 곳이 혁흑철 부족이었습니까?”

이쯤 되었으니, 여제도 더는 숨기지 않았다.

“네가 벌써 알아챘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습니다. 세 부족 중에 마온극 부족이 가장 강한데, 태황께서는 왜 혁흑철 부족과 연합을 결정하셨습니까?”

“네게 좋은 배필을 정해 주고 싶기 때문이지. 마온극 부족의 고여아 공주는 일을 성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망치는 사람이다. 곁에 두면 괜히 발목을 잡을 거란다. 아내를 맞이할 때는 현명한 사람을 골라야 해. 내가 나사 공주를 고른 이유는 그녀의 침착함과 세심함 때문이지.”

남제화이 짧게 탄식했다.

“그랬군요.”

그가 돌아가려는 순간 여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조서는 이틀 안에 내리거라. 조서가 내려지면 위지불이가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남제화가 그대로 등을 보인 채 한참 서 있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 * *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는 법이다. 여제가 황제에게 조서를 쓰라고 강요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모든 사람들이 황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주목하고 있었다.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오늘은 석 달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남제화는 이날 밤 서재에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금박을 입힌 비단 종이가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이 벼루에 놓여 있었지만, 그는 붓을 집어 들지 못했다. 한쪽에서 기다리던 강암룡이 낮은 목소리로 권했다.

“폐하, 위지 아가씨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쓰십시오.”

남제화가 물었다.

“불이는?”

“방 안에 있습니다.”

“불러오너라.”

“폐하, 소인이 보기에, 이 일은……. 그냥 모르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를 리도 없고, 숨기고 싶지도 않구나.”

강암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나가서 위지불이를 불러왔다.

남제화가 여제의 압박에 억지로 조서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위지불이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차례 남제화를 찾아가 타협을 권하려 했지만, 차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남제화를 힘들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애틋한 눈빛을 볼 때마다 그녀는 입가에 맴도는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그가 저렇게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그들의 장래를 위해 노력하는데, 그녀는 도와 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그가 속상해할 언행은 하지는 말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었다.

위지불이는 들어오자마자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비단 종이를 발견했다. 바탕에 어두운 무늬가 있고 금테를 두른 걸 보니 조서를 쓰는 종이였다. 남제화가 이제 결심을 내린 것이다.

“폐하.”

“이리 오너라.”

남제화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남제화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았다.

“불이, 짐은 조서를 내려야 한다.”

“내리세요. 폐하께서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어요.”

“짐이 뭐라고 쓰든 화내지 말거라.”

“당연하죠. 화내지 않을 거예요.”

위지불이가 말을 이었다.

“황후의 자리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제겐 폐하가 가장 중요합니다.”

황제가 쓴 조서는 강암룡이 가지고 나갔다. 동시에 한 가지 소문이 전해졌다. 위지불이가 그 조서를 보고 울며불며 난리가 났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알게 되었다. 황제가 황후로 세운 건 나사 공주라는 사실을.

그러나 조서만 작성됐을 뿐, 성혼을 치르는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여제는 더는 황제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가 많이 양보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화를 삭힐 시간을 좀 줘야 했다.

* * *

옥천전. 나사 공주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사가 한참 침묵하고 있자 향미가 찻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공주, 비록 폐하께서 조서를 내리셨지만 성혼 날짜가 계속 정해지지 않고 있어요. 이렇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다리게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돼요. 태황 전하께 상의를 드려 보는 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태황께선 이미 폐하를 압박했어.”

나사는 그날 감옥에서 태황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나사 공주는 침착하고 대범하며 단아하고 현명해서 과인이 아주 만족스럽다. 하지만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아느냐?”

“태황 전하의 가르침을 삼가 듣겠습니다.”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남편의 사랑을 받는 거란다.”

여제가 말했다.

“황상이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황후의 자리가 공고해지지.”

나사는 그 말을 이해했다. 여제가 남제화를 압박하여 그와 혼례를 치른다고 하더라도 남제화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일은 쉽게 어그러질 것이다. 황제가 언제든 기회를 잡아 황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여인을 내세울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황제의 지지를 얻지 못한 황후는 삶이 고달플 뿐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끔찍하게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황제의 눈에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평생 많은 것을 배웠지만, 하필이면 남자의 환심을 얻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차가 차갑게 식을 정도로 그녀는 오래 고심했다. 그녀는 쓴맛이 가득 배어 있는 차를 마시며 향미에게 분부했다.

“아반에게 나를 보러 궁으로 들어오라고 전해.”

* * *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어 높이 달린 현판을 바라봤다. 현판 위에는 평락전平樂殿이라는 큼지막한 글씨가 금박으로 쓰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에요?”

그녀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남원의 황궁에서 동월의 대전과 비슷한 건물을 볼 수 있다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여긴 옛날에 무양 공주가 살던 곳이다. 공주가 출가한 뒤로 이 궁전은 계속 비어 있지.”

“뾰족한 금 지붕 빼고 동월의 궁전과 비슷한데요?”

위지불이는 궁 주변의 화초를 가리켰다.

“게다가 이런 화단들은 우리 저택에 있는 것과 비슷해요. 그리고 저 푸른 대나무! 큰 저택에는 다들 이런 대나무를 심어 놓아요.”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들어가 보자.”

안으로 들어간 위지불이는 눈앞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안쪽의 장식품들은 모두 동월의 것 같았다. 팔선 탁자, 꽃이 조각된 자단목 의자, 귀비 침대, 장식장, 자수 의자, 꽃 걸상, 팔선인이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조각된 창문 격자, 금으로 채색된 천장 등등…….

그녀는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봤다. 마치 동월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물론 그녀의 집과는 견줄 수 없이 호화로웠지만.

“그… 무양 공주란 분은 동월 사람이에요?”

남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양은 내 손아래 누이다.”

“무양 공주가 시집갔다고 하셨는데 어디로 시집가셨어요?”

“동월.”

“어쩐지.”

위지불이는 혼잣말을 했다.

“무양 공주가 그리워서 이곳을 동월 양식으로 꾸미신 거군요?”

“태황이 그 당시에 무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렇게 꾸민 것이다.”

위지불이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무양 공주는 폐하의 누이동생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동월 양식을 좋아하죠?”

“무양은 어릴 적부터 동월에서 살았고 어른이 되어서야 남원에 돌아왔단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정황을 이해했다.

“그랬군요.”

“여기가 마음에 드느냐?”

남제화가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

위지불이는 정겨운 동월의 물건들을 보자 반가웠다.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럼 이곳에서 며칠 지내라.”

위지불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여긴 공주의 궁전인데, 저는…….”

왜 그녀를 이렇게 먼 곳에 두려고 하지? 위지불이는 의아했다. 여기가 좋긴 하지만, 그녀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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