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1화
마차 안에 있던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어젯밤 싸움이 끝난 지 겨우 한나절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렇게 빨리 인원을 보충해 따라붙을 수 있단 말인가? 소상이 아운소의 팔을 붙잡았다.
“공주, 어찌합니까?”
아운소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어찌하긴, 싸워야지!”
그녀가 위지불이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깨의 상처는…….”
“괜찮아요.”
자신의 상처를 힐끔 바라본 위지불이가 전혀 문제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별것도 아닌걸요.”
저 멀리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마차 벽에 칼이 푹 꽂혔다. 깜짝 놀란 소상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위지불이가 그녀를 꽉 붙잡아 주었다. 그 위세에도 마차는 멈추지 않고 복병들 틈으로 돌진했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세 사람은 그리 나약하지만은 않았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구토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리라.
바깥에서 납곤이 큰소리로 외쳤다.
“공주, 잘 버티셔야 합니다!”
아운소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안 된다!”
하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뛰어내렸어요.”
홀로 많은 적을 상대하는 것은 목숨을 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공주를 보호하는 것이기에 목숨을 내놓는 것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칼을 쥐며 말했다.
“나가서 죽여 버리겠어요.”
아운소가 소상에게 칼 한 자루를 건넸다.
“이걸로 네 목숨을 지키거라.”
그녀가 바깥에 대고 소리쳤다.
“적에게 돌아간다!”
밖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공주, 아니 됩니다…….”
“이건 명령이다. 마차를 돌리거라.”
아운소가 발을 걷으며 차갑게 말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또다시 목숨을 잃게 할 순 없다.”
“공주께서 무탈하시다면 소인들은 상관없습니다.”
“내 목숨이 너희들보다 더 고귀한 것은 아니다. 설령 내가 죽는다 한들… 아포 족장께서 원한을 갚아 주실 것이다.”
마차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탓에 추격해 오던 병사들이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마차 양옆에서 칼이 들어오자 벌벌 떨던 소상이 밖으로 칼을 내리꽂았다. 뜻밖에도 그녀의 칼은 한 병사의 팔을 베었고, 병사는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며 소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소상은 병사보다 안색이 더 하얗게 질렸다. 소상은 아운소를 측근에서 보필하는 시녀일 뿐, 평소 싸움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을 베어 본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부족의 여인이었다. 자신의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독기를 타고난 몸이었다.
포위망에 갇혀 더는 도망갈 길이 없었다. 납곤은 결국 마차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
납니는 피를 뒤집어쓴 채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듯 위태로워 보였다. 햇빛 아래 피투성이가 된 몸은 끔찍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아운소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큰소리로 기합을 지른 그녀는 칼을 들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그대로 납니를 향해 내달렸다.
공주가 자신을 구하러 오는 걸 발견한 납니의 눈엔 다시 살기가 번득였다. 부족의 내로라하는 용사인 그는 일순간 기운을 차렸다. 아운소와 납니가 적들에게 포위됐다. 침을 꼴깍 삼킨 위지불이가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위지불이는 여기 있다! 내 목숨을 앗아가려거든 얼마든지 덤벼라!”
그녀의 말에 적들은 곧장 칼날의 방향을 바꿨다. 멀리서 지켜보던 아운소는 이를 바드득 갈며 칼을 들고 적들의 뒤를 쫓았다.
어젯밤의 경험 덕에 위지불이는 제법 침착하게 행동했다.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에 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우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남제화가 가르쳐 준 초식을 쓰고 있다는 걸 깨알았다.
동작이 화려하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평소 연습할 때와 달리 지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연스레 동작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그가 동작을 가르쳐 줄 때 했던 말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
한바탕 적들과 격전이 이어지고 있던 그때. 위지불이의 눈에 누군가 아운소를 습격하려는 게 보였다. 그녀는 곧장 그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몸을 뒤로 젖힌 뒤, 그자의 몸에 칼을 꽂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참혹한 비명에 고개를 돌린 아운소는 즉각 상황을 파악하고는 위지불이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그 미소에 하지 않은 모든 말이 담겨 있었기에 위지불이는 마음이 놓였다.
모두가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납니와 납곤도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운소도 적군의 칼에 등이 베였다. 위지불이도 몸에 상처를 입었고, 소상의 몸에도 피가 흥건했다. 그녀의 피인지, 적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은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위지불이가 아운소에게 속삭였다.
“또 새를 불러올 방법은 없어요?”
아운소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새를 부리려면 내력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내력이 얼마 남지 않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그때, 구름 사이로 높은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피리 소리에 놀란 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포위한 자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칼을 가슴 앞에 겨누었다.
피리 소리는 맑은 샘물이 졸졸 흐르듯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내 산바람이 스치고, 온갖 꽃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수많은 금빛 줄기가 흩날리며 하늘은 비 온 뒤 날이 갠 듯 맑고 깨끗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리 소리가 들리자 모든 이들이 겁을 먹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적들은 조심스레 움직였지만 오히려 포위된 자들은 담담했다. 이미 이 지경이 되었는데, 더 나쁠 게 무엇이란 말인가?
마침내 피리를 부는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담청색 장포를 입고 동월인의 차림새를 한 사내였다. 얼굴에 은색 가면을 쓴 그는 그리 멀지 않은 산자락에 서 있었다. 피리를 입가에 댄 채 서 있는 그의 가면 너머로 깊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한가운데 포위된 위지불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불이도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눈이 시릴 정도로 눈물이 차올랐다. 아운소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네요. 직접 데리러 왔으니.”
그를 알아보지 못한 소상만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입니까?”
아운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우린 살았다.”
피리 소리가 멈추었다. 적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위지불이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산비탈에 서 있던 자는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휘두르던 적군의 목에 화살이 내리꽂혔다. 그자의 피로 위지불이의 옷이 붉게 물들었다.
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활들이 쏟아져 내렸고 적들의 목숨이 하나하나 꺼져 갔다. 그들은 그제야 은색 가면을 쓴 자 양옆으로 궁수 대열이 나타난 사실을 깨달았다. 남은 적군들은 곧장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은 땅속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적들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동작이 멈췄다.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은색 가면을 쓴 자는 가볍게 몸을 날려 산비탈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려왔다. 은색 가면이 햇살에 번쩍이며 빛을 발했지만, 가면 뒤의 두 눈만큼 반짝이진 않았다.
그는 검은 옷을 입은 적군의 머리를 밟고 포위망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피리는 이미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이번엔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젊은 시절 동월에서 강호를 누리던 때처럼 나지막한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서늘한 검기劍氣가 주변을 물들이자 검은 옷을 입은 적군은 두려움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위지불이의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한 그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척 물었다.
“더 버틸 수 있겠느냐?”
“아직은 괜찮아요.”
분명 기력이 다하고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그가 오니 정신이 다시금 맑아졌다. 남제화.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그가.
“함께 싸워요.”
남제화가 허리를 굽혔다.
“자, 업히거라.”
위지불이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서.”
그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널 데리고 여길 뜰 것이다.”
“그럼 남은 자들은요?”
위지불이가 아운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부상을 당했어요. 구해 줘야 해요.”
“저들을 구해 줄 자는 따로 있다. 지금 나는 널 구출할 것이다.”
위지불이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자 그가 그녀를 제 등 뒤로 끌어 왔다. 남제화는 그녀를 조심히 업고 포위망 밖으로 향했다. 그의 기백이 너무 강해서인지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쉽게 길을 터 주었다.
위지불이를 등에 업은 남제화는 매우 안정적으로 적군을 헤치고 나아갔다. 하지만 발걸음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 그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다.
남제화와 위지불이가 포위망을 빠져나오자 새까만 화살이 검은 옷을 입은 적들을 향해 마구 날아들었다. 그들은 허둥대며 저항했고, 아운소는 그 틈에 자신의 수하들을 데리고 마차 옆으로 도망쳤다. 마차 뒤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공주, 마차에 올라타십시오. 소인이 상처를 동여매 드리겠습니다.”
남제화는 그리 멀리 가지 않았다. 그의 마차는 숲 안에 있었는데, 외관은 무척이나 평범해 보였지만 내부는 전혀 달랐다. 마차 안엔 은은한 향내가 진동했다. 편안한 침상에 푹신한 베개, 정교한 탁자와 화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화로에서는 차를 끓일 수 있도록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내려놓고 가면을 벗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다.
“짐이 늦게 와서 고생이 많았구나.”
위지불이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 제때 오셨는걸요. 조금만 늦으셨으면 염라대왕을 만날 뻔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절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남제화가 품 안에서 찢어진 천 조각을 꺼냈다.
“이걸 찾았다.”
위지불이가 가슴을 동여매던 천 조각의 일부였다. 남제화에게 흔적을 남기려고 일부러 길에 흘렸는데 그가 정말 찾았을 줄이야. 위지불이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물었다.
“제가 좀 똑똑하죠?”
장난 섞인 그녀의 말에 남제화는 오히려 가슴이 시큰했다. 그녀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사지로 내몰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