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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40)화 (839/1,192)

제840화

소상은 건량과 물을 가지러 마차로 돌아갔다. 두 병사는 각각 납니納尼와 납곤納坤이라 불리는 자였는데, 나무 밑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위지불이는 나무에 기대 바닥에 쓰러진 수많은 시체를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그녀로서는 난생처음 죽음과 부상으로 얼룩진 전투를 겪은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저 연극을 하는 것이라 여긴 채 아운소를 따라온 것뿐인데, 저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다니……. 침묵에 잠겨 있던 아운소가 말했다.

“폐하의 사람이 아닙니다.”

위지불이도 알고 있었다. 남제화가 어찌 그녀의 목숨을 노릴까?

“그럼 저자들은 대체 누구의 수하예요?”

그녀가 물었다.

“누가 알겠어요.”

아운소는 고개를 들고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섬섬옥수가 햇빛 사이로 가볍게 흔들리더니 별안간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접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살짝 구부린 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이따금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쪼더니 이따금 고개를 돌려 깃을 정돈하는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닥에 민첩한 공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위지불이는 그 모습에 취해 빤히 바라보았다. 아운소는 한 손만 써서 동작을 이어갔지만, 공작 연기는 생동감이 넘쳤다. 정말인지 그녀는 타고난 무용수인 것 같았다.

손가락을 펴니 공작도 사라졌다. 그녀는 두 손을 교차해 세찬 파도가 일듯 기다란 손가락을 힘차게 움직였다. 꼭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점점 더 높이 날아오르며 광활한 하늘로 향하는 독수리……. 위지불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림자 춤을 출 마음이 생기십니까?”

아운소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고난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지요.”

소상이 건량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바닥에 앉아 각자 찐빵을 들고 조금씩 뜯어 먹었다. 소상이 간장에 조린 고기를 펼쳐 놓으며 말했다.

“공주, 불이 공자. 소고기도 곁들여서 많이 드십시오.”

위지불이는 황량한 교외에서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게 퍽 재미있었다. 아운소가 말했다.

“드실 만하십니까? 부족에서는 용사들이 사냥감을 가져오면 풀밭에 모닥불을 피우고 다 같이 고기와 술을 먹지요. 또 함께 모여 앉아 노래하고 춤도 춘답니다. 이것보다 훨씬 더 즐거우실 겁니다.”

위지불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만약 남제화의 사람이 그녀를 찾지 못한다면, 정말 아운소와 그녀의 부족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걸까…….

밥을 먹고 잠시 쉰 뒤, 다섯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마부는 진작에 숨을 거둔 뒤라 납니와 납곤이 끌채에 끼어 앉아 한 사람은 말을 몰고, 한 사람은 주변을 경계하며 교대로 움직였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리느라 마차 안에 있는 위지불이의 몸도 계속 흔들렸다. 점점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졸음이 쏟아졌다.

아운소는 위지불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자신에게 기댈 수 있게 했다. 위지불이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기댔다. 잠시 졸 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으면 아주 편하지 않은가. 어쨌든 아운소는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아운소는 편히 기대는 위지불이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또 한편으로는 마차가 너무 심하게 흔들려 위지불이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소상이 쓰고 있던 방석을 위지불이의 등에 받쳐 주었다.

소상은 다정다감한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막 등에 방석을 대 주는데 소상의 시선이 위지불이의 어깨로 향했다. 곧장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운소는 소상이 고개를 숙이고 마차 벽면을 짚은 채 멍하니 앉아 있자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 앉으라는 의미였다.

소상은 아무 말 없이 위지불이의 가슴을 가리켰다. 아운소도 고개를 숙였다. 불룩 솟은 위지불이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 무언가를 쑤셔 넣은 듯했다. 그러나… 그 위치에 뭘 어떻게 그리 잘 넣었길래, 꼭… 여인 같았다. 아운소는 얼이 빠진 얼굴로 소상만 빤히 바라보았다.

때마침 마차가 덜컹거리며 돌에 부딪혔고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눈을 뜬 그녀는 의아해하는 아운소와 소상의 얼굴을 발견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래요?”

아운소가 그녀의 가슴을 가리켰다.

“이게… 뭐죠?”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황급히 그들 눈치를 살폈다. 이게 무엇이겠는가, 사실이 들통 난 것이지……. 그녀는 몸을 꼿꼿이 일으키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이건 제가.”

“무얼 숨긴 거죠?”

“숨긴 건 없어요.”

“꺼내서 좀 보여 주시겠어요?”

“…….”

위지불이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애당초 도주 중에 아운소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계획이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니 어찌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고개를 숙인 위지불이는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운소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녀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인이었군요.”

질문이 아니라 단정을 짓는 말투였다. 위지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와 손을 잡고 절 음해하려 한 겁니까?”

“아니에요.”

위지불이가 서둘러 해명했다.

“폐하께서는 공작전 궁녀의 죽음은 영사가 다친 사건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이번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공주한테 불리할 거라고 하셨어요. 차라리 사사로운 이유로 궁을 도망치는 게 더 낫다고요.”

아운소가 냉소를 지었다.

“궁녀의 죽음은 폐하께서 손을 쓰신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폐하께서는 공주들을 내보내고 싶어 하시지만… 누군가를 쉽게 죽이실 분이 아니에요.”

“당연히 폐하 편에서 이야기하시겠지요.”

“그런 게 아니에요.”

위지불이가 해명했다.

“저도 눈이 있어요. 저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보셨고요. 폐하께서는 처음부터 공주를 의심하지 않으셨어요.”

“하면 누굴 의심하신답니까? 나사요?”

“폐하께서는 궁 안의 세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어젯밤 우릴 죽이려던 사람은 태황일 수도, 나사일 수도, 그것도 아님 장로들일 수도 있어요. 폐하께서는 궁 안에서 그리 좋은 나날을 보내고 계시지 못하세요. 공주들이 입궁한 것도 태황이 강제로 폐하를 몰아세운 거죠.”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감싸느라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전부 털어놓았다. 아운소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태황이 무엇으로 폐하를 몰아세운단 말입니까?”

“저요.”

위지불이가 왼쪽 팔을 뻗었다.

“태황께서 제게 고충을 심으셨어요. 이걸로 폐하를 협박하셨죠. 폐하께서 승낙하지 않으셨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아운소는 그녀의 팔을 자기 앞으로 가져와 손가락으로 혈 자리를 눌러 보았다. 역시나 피부 아래에 콩알만 한 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였다. 소상이 헉하고 놀라며 말했다.

“고충입니다.”

아운소는 그녀의 팔을 내려놓고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 후,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운소는 위지불이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위지불이를 용서하겠단 뜻은 아니었다. 마음을 다했는데 돌아온 건 고작 기만이라니. 아무리 마음 넓은 사람이라고 한들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침울해했고 또 누군가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민망해했다. 위지불이와 나란히 앉아 있던 아운소는 소상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한참 뒤, 아운소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날 계속 따라와 무얼 하겠어요?”

“저는…….”

당연히 남제화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아운소를 내버려 두고 가는 것 또한 못할 짓이었다.

“어젯밤 그자들… 당신을 찾아온 거죠?”

위지불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알아차렸다니.

“그자들은 태황 사람이 아니에요.”

아운소가 말했다.

“태황께서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일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그런 짓까지 하겠어요?”

소상은 아운소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소인은 태황과 폐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태황께서 고충으로 불이 공자의 목숨을 앗아가신다면… 아니, 위지 아가씨의 목숨을 앗아가신다면 폐하와의 관계가 더욱 안 좋아지시겠지요. 그래서 수하들을 보내 쥐도 새도 모르게 위지 아가씨를 제거하려던 게 아닐까요. 폐하 면전에서 끝까지 잡아떼실 수 있으니까요.”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자식과 평생 원수로 지내고 싶은 어머니는 없을 테니까. 소상이 이어 말했다.

“물론… 나사 공주도 의심이 가긴 합니다. 공주가 떠나면 황후의 자리는 나사 공주가 차지할 테니까요.”

아운소가 냉소를 지었다.

“참 단순한 생각이구나. 폐하께서 우리를 다 내쫓았는데 나사라고 남겨 두시겠느냐?”

그녀가 위지불이를 힐끔거렸다.

“폐하 마음속 황후는 저기 있는데 말이다.”

위지불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 중독되어서 언제 죽을지 몰라요. 게다가 전 동월의 평민인걸요. 황후라니… 당치도 않죠. 설령 폐하께서 원하신다 해도 태황과 장로들이 반대할 거예요. 전 폐하를 성가시게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폐하를 그렇게나 위하는데 안타깝게도 폐하는 당신을 바둑알로 쓰셨군요.”

아운소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을 이용해 날 끌고 나오다니요. 당신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죠.”

“폐하께서 절 데려올 사람을 보내신댔어요.”

“그래요? 그자들이 어디 있는데요?”

“…공주가 눈속임하는 바람에 아마 절 놓쳤을 거예요.”

“무려 남원 황제의 수하들이 이리 형편없는 실력이라니? 또한, 폐하께서 상황을 그리 명확히 파악하고 계신다면 당신을 죽이러 올 사람들이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실상 남제화가 초조해하고 있을 거란 걸 아운소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 위지불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 도무지 마음이 편해질 것 같지 않았다. 소상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주, 그자들은 왜 위지 아가씨를 해하려 쫓아오는 걸까요?”

“위지 아가씨를 향한 폐하의 마음이 너무 크니까. 위지 아가씨가 자신의 길을 망칠까 걱정하고 있는 자가 있을 거다.”

소상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소인 생각에는 나사 공주가 더 의심됩니다.”

그때 별안간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밖에서 납니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 복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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