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9화
남제화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놓쳤다? 어찌 놓쳤단 말이냐?”
“도중에 갑자기 똑같은 마차가 세 대가 나타났습니다. 서로 이리저리 섞이더니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추적하던 이가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여… 다른 무리를 쫓았습니다.”
남제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그 꿈이 불길한 징조였단 말인가?
“다른 무리를 쫓았다면… 어찌하여 추가로 인력을 파견해 다시 뒤쫓지 않았단 말이냐?”
“소인도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다시 인력을 보내 세 방향으로 뒤쫓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젯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길에 남은 흔적이 없었습니다. 쫓을수록 갈림길이 더 많이 나왔고, 곳곳이 숲과 마을로 통하는 길이라… 소인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그가 힘껏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퍽퍽 소리를 냈다. 남제화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아운소를 얕잡아 봤구나. 아운소가 정말 만반의 준비를 했어.”
* * *
위지불이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발을 들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날이 솥 바닥만큼이나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슴푸레 희미한 그림자가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바깥에 누가 쫓아왔어요.”
아운소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긴장할 것 없어요. 제 사람들이에요.”
위지불이가 물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아운소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지요.”
위지불이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눈꺼풀을 드리운 채 초조한 표정을 감췄다. 남제화가 알 수 있도록 길에 흔적을 남기면 좋으련만. 그녀의 짐은 모두 아운소에게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드니 아운소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불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 보따리는요?”
“잘 챙겨 두었습니다.”
“어디에요?”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짐을 챙겨 둔 게 못 미더우십니까? 혹 보따리 안에 귀중한 것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본 거예요.”
일문일답에 좀처럼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이제야 남제화의 말이 옳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아운소의 태도에 위지불이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렇게 시선을 분산하는 방법으로 상대를 현혹한 것만 봐도 결코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점점 바깥의 소리가 잦아들었고 빗소리만 들렸다. 위지불이는 발을 들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흐릿한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암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또 한참을 달리다 보니 빗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빗방울은 기름을 먹인 방수포 지붕에 떨어지며 후드득후드득 소리를 냈다. 소상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공주, 비가 너무 많이 오네요. 물이 새지 말아야 할 텐데요.”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마차가 얼마나 튼튼한데. 물이 새는 일은 절대 없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지붕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절대 빗소리가 아니라는 건 모든 이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안색이 급변한 아운소는 위지불이에게 눈짓했다.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위지불이는 굉음을 들은 순간 이미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자객 훈련을 받은 덕에 다른 이들보다 경계심이 더 강했다.
“누구냐?”
소상이 허둥대며 묻자 아운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차 밖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으니 그들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에 탄 세 사람은 굳은 얼굴로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던 마차는 이따금 멈추었다가 출발하길 반복했다.
위지불이는 마부가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아마 공주에게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어찌 알아차리지 못할까. 마부는 상처를 입은 게 틀림없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우리가 나가서 도와야 해요.”
“공자는 여기 있어요.”
아운소가 말했다.
“내가 가요.”
“아뇨. 제가 가요. 공주는 여기 있어요.”
아운소가 그녀의 말을 거절하기도 전에 위지불이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상이 웃으며 말했다.
“공주, 불이 공자가 겉으로 보기엔 문약해 보여도 중요한 순간엔 용감하시네요.”
아운소는 조금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물론이고말고. 본 공주가 사람을 잘못 볼 리 없지.”
마차에서 달려 나온 위지불이는 순간 누가 자신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 헷갈렸다. 어둠 속에서 낮게 앓는 소리가 이어졌다. 허리에 찬 주머니에 화절자가 있었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소용없었다. 그녀가 큰소리로 호통 쳤다.
“어디서 온 좀도둑이냐. 어서 이리 나오거라!”
그 목소리에 어둠 속에서 나타난 여러 개의 칼자루가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바닥을 굴러 칼날을 피했다. 하지만 이미 그녀를 목표물로 삼은 적들은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공격이 가해졌다. 다행히 아운소의 병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을 막아 주었다.
“불이 공자, 어서 가십시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어디로 가란 말인가? 위지불이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또다시 그녀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미 어두운 환경에 적응된 그녀는 대략적인 상황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칼을 휘두르는 자는 두 명이었는데, 각각 앞쪽과 오른쪽에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그녀는 남제화가 그녀에게 알려 주었던 방법을 써서 손에 든 완도를 휘두르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앞쪽에서 달려오던 자는 낮은 함성을 내지르며 순간 동작을 멈추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오른쪽에 있던 이의 칼끝이 그녀의 얼굴 위를 미끄러지듯 스쳤다. 위지불이는 몸을 뒤로 젖힌 힘을 이용해 그 사람이 몸을 돌리기 전, 팔을 힘껏 휘둘렀다. 그녀의 칼이 그자의 허리를 베었다. 그자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 명을 무찔렀다는 기쁨도 잠시. 더 많은 이들이 그녀 주변을 에워쌌다. 그녀 주위에는 온통 서늘한 검광뿐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이들이 전부 다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들은 남제화의 사람이 아니라 진짜 저를 노리고 온 적이었다.
오랜 시간 무예를 익혔지만 진정한 살육은 난생처음 접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겁이 나진 않았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주변의 적들을 둘러보았다. 길어진 전투 탓에 적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예전에 남제화에게 이 초식을 썼을 땐, 위지불이는 병아리처럼 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제 실력을 갈고닦은 덕에 몇 합이나 연이어 싸울 수 있었다.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녀는 적을 두세 명씩 쓰러뜨렸고 다행히 자신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자신감이 불쑥 솟아오른 그녀는 아예 양쪽 손에 하나씩 칼을 들었다.
수많은 그림자가 빗속을 뛰어다녔다. 금세 체력이 떨어진 위지불이는 조금 힘에 부쳤다. 정수리 위로 날아드는 칼을 막자마자 다시 오른쪽에서 칼이 날아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피할 힘이 없었다. 칼이 눈앞까지 온 순간, 비스듬히 내민 칼날이 날아오던 칼끝을 막았다. 두 칼은 서로 부딪치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위지불이의 팔을 잡고 옆으로 잡아끌었다.
“조심하세요.”
위지불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운소.”
“도와주러 왔어요.”
위지불이는 긴말하지 않고 아운소와 등을 맞댄 채 적들을 예의주시했다. 그때, 아운소가 무언가를 입에 물고 불기 시작했다. 낮고 긴소리가 비바람을 뚫고 아주 멀리까지 전해졌다. 몰려들던 적 중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뱀을 부르고 있다. 어서 빼앗거라!”
낮았던 소리는 갑자기 높아지더니 순식간에 숲을 울렸다. 그때 무언가 동쪽에서 날아왔고 누군가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아악, 내 눈!”
새였다. 아운소는 새를 조종할 수 있었다. 하늘에서 수많은 새가 날아들며 전투에 합세했다.
위지불이는 아운소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숨어 숨을 돌렸다. 그녀는 그제야 어깨에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상처를 입지 않은 줄 알았더니, 적을 죽이는 데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의 상처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다.
손으로 어깨를 훑자 역시나 상처가 깊었다. 손에 피가 묻어 끈적해졌다. 아운소도 그녀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놀라 소리쳤다.
“불이, 상처를 입었어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어서 지혈해야 해요.”
아운소는 소매의 천을 끊어 위지불이의 상처를 동여매려 했지만, 위지불이가 그녀를 말렸다.
“제가 할게요.”
그녀는 가슴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이로 끊은 뒤, 한 손으로 능숙하게 자신의 어깨를 처치했다. 그녀는 어떻게 상처를 처치해야 하는지 수도 없이 연습해 왔다. 배운 걸 직접 써먹는 날이 올 줄이야. 훈련은 비록 고되지만, 이렇게 보아하니 전부 가치 있는 일이었다.
비는 점점 잦아들었고 전투 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아운소와 나무 아래에 서서 아침 햇살이 대지를 한 뼘 한 뼘 밝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차는 외로이 한쪽에 멈춰 서 있었다. 소상은 발을 들고 밖을 내다보다 두 사람을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주, 불이 공자! 괜찮으십니까?”
아운소가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지만, 불이가 다쳤다.”
소상은 천으로 감싼 위지불이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하얀 천은 이미 선홍색으로 물든 뒤였다.
“불이 공자, 심하게 다치신 겁니까?”
“살갗이 베인 것뿐이에요. 괜찮습니다.”
숲은 흐릿한 안개가 피어올랐지만 바람이 불자 금세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곳곳의 참상이 여지없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몇몇은 아운소의 병사들이었고 몇몇은 적들이었다.
아운소의 병사 중 두 사람은 살아 있었는데, 한 사람은 땅에 앉아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마차 옆에 기대앉아 있었다. 밝아진 하늘빛에 아운소를 발견한 두 사람은 곁으로 걸어와 예를 갖췄다.
“공주.”
아운소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담담히 대꾸했다.
“어젯밤에는 너희가 고생 많았다. 우선은 잠시 쉬었다가 체력을 보충한 후에 다시 길을 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