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8화
허공에 비가 가볍게 흩뿌렸다.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떨어지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위지불이는 고양이처럼 몸을 숙인 채 지붕 위를 요리조리 걸어 다녔다. 위로 솟아오른 추녀를 밟고 무사히 착지를 끝냈다.
이제 더는 병사들이 지나가지 않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공작전으로 달려갔다. 아운소는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소리 없이 창문으로 들어오자 아운소가 활짝 웃었다.
“오셨군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운소가 고개를 돌려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딱 맞게 왔네요.”
그녀가 위지불이의 보따리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무얼 가져가길래 짐이 이렇게나 많아요?”
“평소에 조금씩 모아 둔 것들이에요. 버리기는 아까워서요.”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남제화가 알려 준 것이었다. 아운소는 아무 말 없이 소상에게 눈짓을 보냈다. 소상은 병사들이 입는 옷을 위지불이에게 건넸다.
“공자, 갈아입으시지요.”
위지불이는 옷을 받아 들고 입고 있는 야행복 위에 그대로 껴입었다.
아운소가 말했다.
“비를 맞아서 옷이 다 젖었는데 갈아입지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어서 가야죠.”
아운소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상과 방으로 들어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운소가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가시죠.”
바깥엔 그들과 똑같은 옷을 입은 이들이 몇 명 더 서 있었다. 아운소의 계획은 이 병사들 틈에 끼어 출궁하는 것이었다.
“다들 저희 부족 사람들입니다. 오늘 총 여덟 명이 들어왔고, 지금 여덟 명이 나가니 수가 딱 맞죠.”
아운소가 요패를 그녀에게 건넸다.
“허리에 차십시오. 출궁할 때 검사할 겁니다.”
아운소는 연고를 꺼내 위지불이의 얼굴에 발라 주었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되었습니다.”
아운소가 직접 위지불이의 얼굴에 분장을 해 준 것이다. 평소 위지불이는 궁 밖을 자주 오갔기 때문에 보초들이 그녀를 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변장을 하지 않으면 분명 쉽게 들통 날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과정은 매우 순탄했다. 궁 문 앞에 다다르자 보초가 그들에게 물었다.
“어느 소속인가?”
한 병사가 요패를 내보이며 말했다.
“우린 파목 부족 사람들이오. 아운소 공주의 명을 받아 입궁했고, 이제 역참으로 돌아가려 하오.”
보초가 투덜거렸다.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출궁한단 말이오?”
병사가 웃으며 말했다.
“공주께서 자꾸만 질문하시니 우리도 어쩔 수 없었소.”
보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손을 내저어 그들을 빠르게 내보냈다. 병사들 틈에 끼어 있던 위지불이, 아운소, 소상도 침착하게 밖으로 나왔다. 모퉁이를 도니 더 이상 궁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아운소가 긴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결국 나왔군요.”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암암리에 분부를 내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나올 리가. 그때, 누군가 빠르게 걸어와 고했다.
“공주, 바로 앞에 마차가 있습니다.”
“알았다.”
아운소가 위지불이의 팔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말했다.
“어서 가요. 여길 떠나야 해요.”
마차가 청석판 위를 구르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비도 점점 거세졌다. 위지불이는 마차 벽에 기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운소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긴장돼요?”
“괜찮아요.”
이미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긴장할 게 뭐 있단 말인가. 지금은 성문이 닫힌 시간이었지만, 아운소에게는 성을 나가는 영패가 있었다. 그녀의 영패를 본 보초병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차를 내보냈다.
고개를 돌려 성문이 천천히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던 위지불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떠나면 이제 영영 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원인 모를 불안에 그녀의 마음이 축 가라앉았다. 아운소는 줄곧 위지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변하자 아운소가 물었다.
“불이, 왜 그래요?”
위지불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요.”
분명 별일 아닐 것이다. 그저 괜한 걱정이겠지. 아마 날이 밝으면 남제화가 그녀를 찾으러 올 것이다.
* * *
한밤중이 되자 별안간 빗줄기가 굵어졌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창문을 때리는 게 꼭 수많은 말이 내달리는 듯했다. 남제화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게 맺혀 있었다.
방금 전 꿈에서 위지불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꿈속에서 남제화는 동월인 복장을 한 채 머리를 높게 묶고 있었다. 손에는 검을 든 채 강호를 떠돌며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헤맸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벽 모퉁이에 놓인 모래시계를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위지불이가 멀리 떠났을 시간이다. 하지만 그녀를 놓칠 리 없었다. 그의 수하가 암암리에 뒤를 바짝 쫓고 있는데, 어찌 놓치겠는가?
잠에서 깨니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었다. 창을 때리는 요란한 소리에 마음이 자꾸만 소란스러웠다.
비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멈췄다. 떠오른 태양은 초지를 밝게 비췄고 아름다운 색채를 반영하며 탄식이 나올 만큼 멋진 풍경을 만들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전에서 소식이 전해졌다. 아운소 공주와 그의 시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그가 아끼는 사람인 위지불이 또한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이 일은 궁 안에 한바탕 큰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다들 저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았지만, 감히 황제를 찾아와 성가시게 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늘 온화하던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는 서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안에서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굉음이 나자 문 앞을 지키던 이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황제는 한바탕 성질을 부리더니 곧장 명을 내렸다.
“당장 그자들을 쫓거라. 살아 있든 죽었든 짐 앞에 끌고 와라!”
궁문이 열리고 황성 금군들이 급히 말을 몰고 달려 나갔다. 말이 지나간 거리엔 뿌옇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백성들은 하나둘 길옆에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금군 무리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편 궁 안에서 남제화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예를 갖췄다.
“폐하, 태황 전하께서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가지 않을 것이다.”
남제화가 차갑게 거절했다.
“태황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위지불이의 몸에 있는 고충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제화는 고개를 들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매섭게 그자를 노려보았다.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여제가 그의 약점을 쥐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하 감옥에 도착하자 여제가 그를 바라보며 고소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운소 공주가 네 사람을 데리고 도망쳤다지?”
남제화가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부르셨습니까?”
“짐은 황상의 상심이 클까 봐 달래 주려 불렀단다.”
“말씀하십시오.”
“짐도 폐하가 위지불이를 좋아한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그자는 사내야. 고상한 자리에는 올릴 수 없으니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지. 이왕 도망쳤으니 저대로 내버려 두거라. 잠시 방탕한 삶을 즐겼으니 이제 다시 정도를 걸어야지.”
남제화가 말했다.
“짐의 일은 태황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가 잊었나 본데, 위지불이가 어딜 가든 그자의 목숨은 과인에게 달려 있다. 과인이 살게 하면 사는 것이고, 과인이 죽게 하면 죽는 것이지.”
“태황께서도 잊으셨나 본데, 애당초 짐이 세 공주의 입궁을 승낙한 것은 태황께서 불이의 목숨을 지켜 준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설마 태황께서는 약조를 개나 줘 버리실 생각입니까?”
“과인을 자극할 필요 없다. 과인이 한 말은 꼭 지킬 테니까. 하지만 황상.”
여제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세 공주가 입궁했지만, 지금 두 명이 궁을 떠났다. 그 이유가 폐하와 무관하진 않은 듯한데?”
남제화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짐을 탓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렇다 치지. 지금 궁 안엔 오직 나사 공주만 남았지. 분명 나사 공주는 분수를 알고 본분을 지켰을 거야. 그러니 더는 고민할 것도 없이 나사 공주에게 황후의 자리를 내어주어야지. 폐하는 어찌 생각하는가?”
“약속한 석 달이 되려면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태황께서도 조급히 구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한 명 남았는데 더는 고민할 것도 없지.”
“태황께서는 짐이 지금 이런 얘기를 할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 더는 늦어져선 안 돼.”
“짐이 태황의 제안에 응했을 때, 석 달을 기한으로 정했습니다. 짐은 언약을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니 부디 태황께서도 짐의 신용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무로 돌리는 건 태황께서도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여제는 자기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유순한 성격이었지만 한 번 결정한 일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 그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좋다. 과인도 황상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니, 이 일은 추후에 다시 꺼내도록 하지. 부디 황상께서 잘 처신하길 바라네. 과인도 그리 오래 기다리고 싶진 않아.”
남제화는 옷자락을 뿌리치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전으로 돌아오니 나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다가와 예를 갖췄다.
“폐하, 아운소와 불이 공자가 함께 떠났다 들었습니다.”
남제화가 매섭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짐을 비웃으러 왔소?”
“제가 어찌 감히… 전 그저 폐하의 근심을 나누러 왔을 뿐입니다.”
남제화가 코웃음을 쳤다.
“어찌 나누겠단 말이오?”
“궁 밖에 도움을 줄 만한 수하가 있습니다. 같은 부족 사람들이라 내막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어떠신지요?”
남제화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사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짐을 돕고 싶다?”
“폐하의 근심을 나누는 것은 나사의 복입니다.”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도주범을 쫓는 일이거늘. 짐은 아직 남의 손을 빌려야 할 만큼 처량하지 않소.”
나사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않고 깊숙이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하면 더는 폐하를 방해하지 않고 그만 물러가겠나이다.”
남제화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전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사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 문을 나섰다. 길고 짧은 두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이며 점점 더 간격을 벌렸다. 나사가 문턱을 넘을 때, 남제화는 마침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드니 가녀린 몸집이 문 옆으로 사라졌다. 그는 금테를 두른 치맛자락이 문턱을 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그는 문득 여제가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 여제는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어딜 가든 어느 곳에 있든 그녀는 바닥에 끌릴 만큼 긴 치마를 입었다.
궁녀가 올린 차를 몇 모금 들이켰다. 한바탕 연극을 하고 나니 사실 그 또한 제법 피곤했다. 그는 창 너머의 황금빛 햇살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견디자. 저녁이면 이 연극도 끝이 날 테니.
하지만 이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나 서재로 돌아오니 은색 가면을 쓴 자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폐하, 소인이 무능하여 뒤를 쫓던 이가 불이 공자를 놓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