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37)화 (836/1,192)

제837화

“짐이 처리하는 거라니? 어째서?”

“아운소는 폐하를 오해하고 있어요. 폐하께서 저를…….”

“오해가 아니지. 짐은 널 좋아하지 않느냐.”

“공주는 모르잖아요. 제가 사내인 줄 알고 있다고요.”

“하면 영웅이 미인을 구하듯 공주가 널 구해 주려 한단 말이냐? 널 짐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남제화가 이마를 쓸어내리며 웃었다.

“너에 대한 짐의 마음을 다들 알아차렸나 보구나. 하지만 널 향한 아운소의 마음은 짐만 알아차렸지.”

위지불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운소가 제게 마음이 있다고요?”

“짐이 갖는 마음과 같은 마음이지.”

남제화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불이, 아운소는 널 좋아한다.”

“하지만 전 여인이라고요!”

“공주는 네가 여인인 걸 모르지 않느냐.”

방금 전 공작전에서 아운소의 말을 들을 때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제화의 말에 그녀는 곧장 모든 걸 깨달았다. 아운소가 자신을 좋아했다니……,

“남원에서 사내가 여인에게 깃털을 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이제야 묻는구나.”

남제화가 그녀의 이마를 한 차례 찔렀다.

“남원의 사내들은 직접 사냥한 새의 깃털을 흠모하는 여인에게 선물하지. 여인이 그 깃털을 받고 장신구로 만들어 머리에 꽂으면 사내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제 알겠느냐. 네가 먼저 여인을 건드린 것이다.”

위지불이는 입을 쩍 벌린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운소 탓만 할 게 아니었다. 남원의 풍습을 몰랐던 그녀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어쩐지 아운소가 절 데려가려고 했어요.”

위지불이가 괴로워하며 말했다.

“폐하, 이제 어떡해요?”

남제화가 고개를 들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 떠나고 싶어 하니 떠나게 해 줘야지. 물이 이미 흐려진 이상, 이곳에 계속 남겨도 아무 의미 없다.”

“폐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네가 보기에 그 궁녀는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살해당한 것 같으냐? 아니면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희생된 것 같으냐?”

“그건…….”

위지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아운소의 혐의가 가장 컸고, 죄를 전가하기 위해서라면 나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 보느냐?”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또 짐을 의심하는 것이냐?”

그때,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저 멀리 아리따운 궁녀들이 모습을 보였다. 궁녀들은 머리에 쟁반을 이고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똑같은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황제에게 어선을 올리기 위한 행렬이었다.

“들어가서 밥부터 먹자꾸나.”

공주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더는 형식적으로 굴지 않아도 되니 굳이 그들을 부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위지불이와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식사를 마친 뒤, 차가 올라가자 궁녀와 내관들은 전부 밖으로 물러났다. 위지불이는 걱정 때문에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남제화 말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엥, 다들 나갔어요?”

“곁에 있으면 눈에 거슬리지 않느냐?”

남제화가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짐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똑똑하지.”

위지불이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목청을 가다듬었다.

“폐하,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진지한 얘기 좀 해요.”

“짐에게 진지한 얘기를 할 게 또 있더냐?”

“아운소 일이요…….”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가고 싶어 하니 보내 주어야지. 여길 떠나는 게 공주한테도 더 좋을 거다.”

“궁녀가 죽은 일도 공주에게 떠맡기고요?”

“칼끝이 이미 공작전에 겨눠졌다. 조사를 한다고 한들 공주에게 불리한 정황들만 쏟아지겠지.”

근심에 잠긴 위지불이는 턱을 괸 채 미간을 찌푸렸다.

“제 생각에 궁녀의 죽음은 아운소와 상관없는 것 같아요. 전 공주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면 공주와 함께 가거라.”

“잉?”

위지불이는 그의 말이 너무 의외였다.

“폐하, 저더러 아운소와 함께 가라고요?”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이 짐도 떠오르지 않는구나.”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공주에게 누명을 씌우기 싫어하니 별수 있겠느냐? 공주가 짐의 남총을 빼앗아 가게 하는 수밖에.”

“폐하, 장난해요?”

“지금 짐은 아주 진지하단다.”

남제화가 좀 더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짐도 네 직감을 믿고 싶다. 그러니 공주를 떠나게 하려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해. 그게 바로 널 데리고 떠나는 것이다. 궁 안의 모든 이들이 짐과 너의 관계를 알지 않느냐? 공주가 짐의 사내를 빼앗아 간다면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게 좋을까요?”

위지불이가 물었다.

“공주가 황제의 사내를 빼앗아 가면… 아운소의 명성뿐만 아니라 폐하의 명성에도 해가 된다고요.”

“남원에서 이 정도 일로 풍속을 해친다고 볼 수 없다. 한동안 백성들의 놀림거리가 되겠지만, 금방 잊힐 것이다. 짐은 상관없다. 아마 아운소도 그리 신경 쓰지 않을 테지. 하지만, 영사를 해하고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알려진 자는 모든 이들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 네가 직접 고르거라. 공주가 널 데리고 달아나게 하든지, 공주에게 궁녀를 죽이고 영사를 해한 죄명을 씌울 것인지.”

위지불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절 데리고 도망치는 게 더 낫겠어요.”

“그래, 내일 가서 아운소에게 전하거라. 너도 공주와 함께 떠나고 싶다고. 나머지 일은 짐에게 맡기고.”

“폐하께서 절 다시 데려오실 거예요?”

“물론이지. 내 여인은 그 누구도 감히 빼앗아 갈 수 없다.”

“싸움이 일어날까요?”

“때가 되거든 아운소에게 진실을 밝히거라. 그리하면 싸움이 나는 일은 없을 테니. 하지만…….”

남제화는 진실을 들은 아운소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고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상심이 크겠구나.”

위지불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물었다.

“왜?”

“사실 폐하께서도 궁녀의 죽음이 아운소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저더러 공주와 함께 떠나라고 하시는 거죠?”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똑똑해진 것이냐?”

“폐하, 궁녀의 죽음이 아운소와 상관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꼭 공주에게 죄명을 붙이시려는 거예요?”

“반드시 공주는 궁을 떠나야 하니까. 짐이 공주를 내쫓지 않아도 다른 이가 공주를 내쫓지 않겠느냐? 아운소가 이번에 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 또다시 그녀를 몰아세울 것이다.”

“폐하, 나사 공주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세 공주 중 두 공주를 제거하면 남은 이가 수면 위로 떠오를 터.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불이, 궁 안의 세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하단다.”

위지불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사 공주 말고 또 누가 있는데요?”

“넌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

남제화가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짐을 정리해서 아운소를 따라가거라.”

위지불이가 말했다.

“그냥 연극일 뿐이잖아요. 짐을 쌀 것도 없죠.”

“연극을 할 거면 제대로 상대를 속여야지. 짐을 싸서 내일 아운소를 찾아가거라.”

여전히 일의 진상은 오리무중이었지만,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믿고 그의 분부대로 따랐다. 그녀는 정말 궁을 떠나려는 것처럼 상자에서 이것저것 골라 보따리에 담은 뒤, 방 안에 숨겨 두었다. 그리곤 공작전으로 찾아가 아운소에게 함께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운소는 그녀의 말에 크게 기뻐했고 매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니 안전할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아운소의 마음을 알게 된 후로 위지불이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운소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도 그녀는 너무 어색했다.

“결정을 내렸으니, 서두를수록 좋지요.”

아운소가 말했다.

“제가 볼 땐, 오늘 밤이 좋겠어요.”

위지불이도 서둘러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기에 당장에 승낙했다. 아운소는 그녀를 서둘러 돌려보냈다.

“먼저 돌아가요.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물면 폐하의 의심을 살 거예요.”

위지불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죄책감이 컸다. 아운소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 주는데, 그녀는 아운소를 속이는 중이니까.

사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었다. 그녀는 아운소가 남제화에게 시집가는 게 싫었다. 또 아운소가 상처를 받는 것도 싫었기에, 그녀를 떠나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일부러 아운소에게 물었다.

“공주, 정말 황후 자리에는 관심 없어요?”

아운소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오기 전, 아포 족장께서 사탕발림하지 않았다면 저도 오지 않았을 거예요.”

“부족에는 다른 공주들도 더 있잖아요. 왜 족장께선 공주를 보내신 거예요?”

“공주들 중에서 제 춤 솜씨가 가장 훌륭하니까요. 남원의 사내들은 춤으로 배우자를 골라요. 아포 족장께선 폐하께서 제 춤에 빠져드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안타깝게도 족장의 추측은 틀렸죠. 폐하께선… 여인을 좋아하지 않으시니까요.”

위지불이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닐 거예요. 폐하께선… 여인을 좋아하세요.”

“지금은 이런 걸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아운소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요. 폐하를 조심하고요. 폐하의 마음은 그 누구도 꿰뚫어 보지 못하니까요. 약속한 시간이 되면 그때 다시 오세요.”

위지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위지불이는 애당초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운소를 안전하게 궁 밖으로 보내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신중하고 진지한 아운소의 모습에 그녀도 조금씩 긴장이 돌기 시작했다.

이날, 황제는 줄곧 서재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위지불이 또한 방 안에 앉아 구석진 벽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위지불이는 검은색 야행복으로 갈아입었다. 미리 준비해 둔 보따리를 짊어진 채 조용히 정전을 빠져나왔다.

밖을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남원에서 지내면서 비가 오는 걸 본 건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어째서 갑자기 비가 내린단 말인가?

밤이 된 남원 황궁은 원래도 어두웠다. 여기에 비바람까지 불자 위지불이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랜 시간 편안한 삶을 살아서 그런지 이런 일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도 처마 위로 뛰어오를 땐, 손발이 아직 재빠른 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붕에 엎드린 그녀는 가만히 전방을 주시했다. 한 무리의 병사들이 순시를 돌고 있었다. 저들이 사라지면 그녀는 단번에 공작전까지 달려갈 것이다.

저 멀리 등불이 하나 보였다. 등불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콩알만 한 불꽃은 곧 바람에 꺼질 것 같았지만, 바람이 지나가니 약한 빛이 또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불꽃을 지켜보던 위지불이도 한결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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