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6화
강암룡이 곧장 가슴을 쥔 궁녀의 손을 들어 올렸다. 딱딱하게 경직된 탓에 손가락을 펴기 어려웠다. 위지불이가 강암룡을 도와 주려고 하자 남제화가 그녀를 막아섰다.
“불이, 가만히 있거라.”
위지불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안 무서워요.”
그녀와 강암룡은 힘을 합쳐 움직였다. 한 사람은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사람이 힘껏 손가락을 펼쳐 겨우겨우 손을 열자 동으로 만든 자그마한 호각이 드러났다.
강암룡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는 이 호각의 쓰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뱀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늘 이 호각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그는 남제화와 재빨리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고 침묵만 지켰다. 위지불이도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남제화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남제화가 대꾸했다.
“뱀을 조종할 때 쓰는 호각이다.”
위지불이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럼 그날 영사를 공격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남제화가 칭찬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반응이 제법 빠르구나.”
영사가 공격을 받은 일은 불과 며칠 전 일이라 아직도 그 여파가 가시질 않았다. 사람들은 사적인 모임에서 늘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오늘 뱀을 부릴 때 쓰는 호각까지 나왔으니 자연스레 그날 일을 연상할 수밖에 없을 터.
* * *
소상은 뜨거운 솥 위를 걷는 개미처럼 아운소 주변을 맴돌았다.
“공주, 어서 방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죽은 이가 공작전 궁녀랍니다. 게다가 몸에서는 뱀을 부릴 때 쓰는 호각까지 나왔대요. 폐하께서 영사를 해한 게 공주와 관련이 있다고 여기실 겁니다. 소인은 공주께서 고여아 공주처럼 쫓겨나시는 건 싫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아운소는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차를 마셨다.
“급할 게 뭐 있니. 폐하께서 공작전 주변에 병사들을 세우신 것도 아닌데.”
소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소인이 보기엔 곧 그리될 것 같습니다.”
아운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리하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그녀가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불이 공자를 모셔와. 내가 공자를 찾는다고.”
소상은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막 입구를 나서는데 아운소를 찾아온 위지불이와 마주쳤다. 소상은 평소 위지불이를 반기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공주가 이 동월 사내 때문에 나쁜 길로 빠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구원의 손길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반갑게 맞이하며 안으로 청했다.
“공자,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 공주께서 공자를 모시고 오라던 참이었습니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아운소 공주께서 무슨 일로 절 찾으시죠?”
“공주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위지불이가 안으로 들어가자 소상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준 것이다. 지금 아운소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위지불이뿐일 것이다. 부디 위지불이가 공주의 편을 들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아운소는 환하게 웃으며 위지불이를 맞이했다.
“공자, 어서 오세요. 차를 준비해 두었어요.”
위지불이는 의자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무이차가 아직 남았네요?”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거의 다 마셔갑니다. 다 마실 때쯤이면 아마 전 떠나겠죠.”
“떠나요?”
위지불이가 황급히 물었다.
“어디로요?”
“오늘 무슨 사달이 났는지 아직 모르세요?”
아운소가 말했다.
“제 궁에 있던 궁녀 하나가 수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손에는 뱀을 부릴 때 쓰는 호각을 쥐고 있었죠. 누군가 영사를 해한 사건을 빌미로 고여아를 내쫓았어요. 아무래도 그다음이 제 차례인가 봐요.”
“폐하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운소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바보도 알아차릴 겁니다. 하지만… 저도 이해 안 가는 게 하나 있어요. 폐하께서 왜 이런 판을 짜셨을까요? 절 내쫓고 싶다 한들, 굳이 사람을 죽일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에요.”
“폐하가 왜 공주를 내쫓고 싶어 하시겠어요?”
이미 일이 이리 됐으니 아운소도 더는 감출 필요 없었다.
“당연히 당신 때문이죠, 불이.”
위지불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여아는 제 목숨을 노렸기 때문에 쫓겨났어요. 하지만 저와 공주는 친분이 매우 두텁잖아요. 폐하께서 왜 그리하시겠어요?”
아운소가 찻잔을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날 폐하께서 제게 경고하신 거 기억하나요?”
그녀의 말에 위지불이도 그날 일이 떠올랐다. 분명 그런 일이 있긴 했다. 남제화는 자신과 아운소가 함께 있는 걸 보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운소를 혼낸 뒤 자신만 데리고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 당시 남제화는 자신을 사내라고 알고 있었다. 아마 그래서 질투를 한 것이었겠지.
“불이, 정말 폐하의 마음을 모르겠어요?”
“뭐가요?”
“폐하께선… 당신을 좋아해요. 공자를 향한 폐하의 마음이 제 눈에도 훤히 보여요.”
“…그래요?”
“물론이죠. 고여아가 공자를 해치려고 하자 폐하께선 고여아를 내쫓았어요. 그리고 제가 공자와 너무 가깝게 지내니 이번엔 절 쫓아내시겠죠. 오늘 일어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어요.”
위지불이는 침묵 끝에 조심스레 물었다.
“영사를 해한 일 말이에요. 정말 공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아운소는 조금 화가 났다.
“불이, 폐하께서 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전 황후 자리에는 관심 없어요. 굳이 그 자리를 쟁탈하고 싶지도 않고요. 하지만 누군가 제 악담을 퍼붓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그게 누구든지요.”
아운소의 말에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마다 제 생각을 굽히지 않으니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불이, 전 당신이 출중한 사내라는 거 잘 알아요. 사내에게 사로잡히고 싶진 않겠죠. 차라리 우리… 함께 떠나요!”
위지불이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아운소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 가슴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솟구쳤다.
“불이, 나랑 우리 부족에게 가요.”
아운소가 계속 그녀를 설득했다.
“타곤성처럼 번화한 곳은 아니지만, 풍경도 예쁘고 매일 사냥도 할 수 있어요. 고기도 맘껏 먹고 술도 실컷 먹고요. 그런 삶이 이곳 궁에서의 삶보다 훨씬 자유롭지 않겠어요?”
아운소가 간절하게 위지불이를 불렀다.
“불이.”
거기다 위지불이의 손까지 잡았다.
“저랑 함께 가요. 이곳에서 멀리 떠나요. 이거 봐요.”
그녀가 머리에 꽂은 깃을 빼냈다.
“불이가 준 거예요. 이미 머리에 꽂았어요. 어때요, 예뻐요?”
아운소는 훌륭한 솜씨로 예쁜 장신구를 만들었다. 위지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요.”
“나랑 함께 갈 거죠, 불이?”
아운소의 눈빛은 점점 더 간절해지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궁녀에 대한 일을 물어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한데 아운소가 별안간 함께 떠나자고 할 줄 누가 알았을까. 위지불이가 바싹 마른 입술을 할짝대며 조용히 물었다.
“공주, 죄를 지은 게 무서워서 잠적하려는 건 아니죠?”
아운소는 그녀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폐하께서 공자에게 미혼탕을 먹이신 거예요? 어떻게 폐하는 믿고 나는 믿지 못한단 말이에요? 예전엔 이러지 않았잖아요! 불이, 정신 차려요. 폐하께서는 이미 날 내쫓으려고 판을 짜 놓으신 거라고요. 모르겠어요? 설마 내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걸 지켜만 볼 생각이에요?”
“결백하다면, 대체 왜 떠나려는 거예요?”
“제가 떠나려는 건 다 당신 때문이에요. 불이, 폐하께서 당신한테 손을 쓸까 봐 무서워요. 폐하는 황제잖아요. 원하는 건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다고요.”
“…….”
대체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한담…….
“공주, 시신으로 발견된 궁녀 말이에요. 공주도 아는 궁녀예요?”
“잘 기억나진 않아요. 소상 말로는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대요.”
“그러니까… 공주는 그 궁녀를 잘 알지 못한단 말이네요?”
“그 궁녀는 애당초 남원 황궁에 있던 사람이고 제 가까이에서 시중들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잘 모르죠.”
“그 궁녀가 손에 호각을 쥐고 있었다는 건… 혹 그 궁녀가 뒤에서 뱀을 조종한 걸까요?”
“불이, 지금 전 당신과 떠나는 얘길 하고 있잖아요. 왜 자꾸 그 궁녀 얘기를 꺼내고 그래요. 그건 그저 폐하께서 짠 함정에 불과하다고요.”
아운소는 점점 마음이 급해졌다.
“너무 뻔하잖아요. 공작전의 궁녀가 죽었어요. 사달이 나자마자 화살 끝은 저를 향했죠. 고여아의 금 화살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그리 뛰어난 계략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아마 폐하께선 너무 복잡한 판을 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궁녀 사건을 통해 모든 시선을 제게 돌리면 범인은 자연스레 제가 되겠죠. 불이, 저한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어요. 어서 준비해야 해요. 때가 되면 제가 기별을 보낼게요.”
위지불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공주는 왜 제가 공주와 함께 갈 거라고 확신하는 거죠?”
“공자가 저한테 깃털을 줬고, 제가 그걸 받았잖아요. 안 그래요? 설마…….”
아운소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지금 후회하는 거예요?”
“…….”
깃털을 주었다고 아운소와 함께 떠나야 한다니……. 혹 그사이에 그녀는 알지 못하는 일이 더 있는 건 아닐까?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들지?
* * *
위지불이가 정전으로 돌아오니 남제화는 복도 기둥에 기대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나른하게 웃는 모습이 어딘가 조금 야시시해 보였다.
“어찌 이 황제보다 더 바쁜 것이냐. 온종일 집에 붙어 있질 않는구나. 보고 싶은데 찾을 수가 있어야지.”
위지불이가 허리춤에 찬 칼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폐하는 고귀한 황제이시잖아요. 제가 사건을 조사하지 않으면 누가 그리하겠어요?”
남제화가 실소를 터뜨렸다.
“해서 뭔가를 알아내었느냐?”
위지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성가신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위지불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아운소가 저더러 함께 떠나자더군요.”
남제화는 조금 놀라는가 싶더니 곧장 냉소를 지었다.
“죄가 탄로 날까 두려워 도망을 치려고?”
“저도 그렇게 물어봤는데… 아니래요. 폐하께서 공주를 처리하려고 한다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