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5화
잠시 뒤, 그녀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하신 것도 아니고 아운소도 아니면… 남은 건 나사 공주밖에 없네요. 설마 나사 공주일까요?”
남제화가 물었다.
“어째서 아운소는 빼는 것이냐?”
“아운소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아운소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고… 짐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고?”
“그러니까, 제 말은…….”
“짐은 오히려 아운소가 의심되는구나.”
“왜요?”
“네게 그런 말을 해 자신의 죄를 감추고 싶은 거겠지.”
위지불이가 흠칫 놀랐다.
“아운소가 한 말이란 걸 어찌 아셨어요……?”
그저 한 번 떠본 것인데 위지불이는 바로 걸려들었다. 그가 산발이 된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웃었다. 정말 어찌 이리 단순한지.
“사실 짐 외의 모든 이들이 다 의심스럽다.”
남제화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우선은 고여아다. 고여아가 데려온 사수가 영사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벽사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적 없다고 했지. 하지만 그걸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느냐. 어쩌면 벽사들이 다른 자극을 받아 기질이 변했을 수도 있지.
이번 일은 고여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모든 책임은 고여아에게 있다. 부족으로 돌아가더라도 고여아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야.”
고여아. 위지불이에게 숨김없이 발톱을 드러낸 자를 해결했으니 그나마 한숨 돌린 셈이다. 물론 아직 위험 요소는 많았지만.
“다음은 아운소다. 세 공주는 다들 황후 자리에 오르기 위해 궁에 들어왔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친해 보이지만 뒤에선 어떤 암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르지.
공주들은 궁 밖에 자신의 사람을 두고 있다. 역참에 있는 사람은 요패를 가지고 있으니 매일 황궁을 오갈 수 있지. 그러니 공주들이 무슨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운소는 황후의 자리에 별 흥미 없이 보이지만 짐이 생각하기엔 그게 이상하다. 황후 자리에 관심도 없다면 어째서 궁에 들어왔단 말이냐?”
위지불이에게 꿩 깃을 받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문제 될 게 없었다. 위지불이는 엄연한 여인이 아닌가.
“마지막은 나사다. 나사는 고여아처럼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아운소처럼 황후 자리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아니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진짜 성격일 수도 있고… 혹은 위장일 수도 있다.”
위지불이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폐하, 어째서 모두를 그렇게 나쁘게 보는 거예요?”
“나쁜 자는 자기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적어 두지 않는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너처럼 짐을 죽이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쉽게 간파할 수 있지. 하나 부족에서 자란 공주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위지불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운소가 한 말과 똑같기 때문이었다. 역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생각은 정말 치밀했다. 머릿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 두지 않는 그녀와는 딴판이었다. 그녀는 늘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으로 사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폐하, 조사 안 하실 거예요? 만에 하나라도 고여아가 억울한 일을 겪은 것이라면…….”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이번 일은 고여아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응당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아운소와 나사는 좀 더 두고 볼 것이다. 석 달이 다 차면 두 사람 모두 가만히 있을 순 없을 거다.”
“황후 자리가 그들한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그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부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지. 부족과 황실은 지금껏 혼인 관계를 맺었던 적이 없었다. 부족에게 이번 일은 숲을 나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지.”
“예전에 그런 선례가 없었다면, 어째서 이번에는…….”
“네가 태황의 고독蠱毒에 걸리는 바람에 태황과 짐이 거래를 했다. 짐이 부족의 공주를 궁에 들이는 게 네 목숨을 지켜 주는 조건이었지.”
위지불이는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세 공주가 입궁한 게 자기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폐하.”
그녀가 눈시울을 붉혔다.
“저 때문에 폐하께서 그리 고생을…….”
“고생이 아니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널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가치 있단다.”
* * *
아운소는 남제화를 의심했고, 남제화는 아운소를 의심했다. 위지불이는 둘 중 누가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남제화에게 더 많이 기울었다. 사실 남제화와 적대적인 사이였을 때부터, 까닭 없이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남제화를 말을 들으니 더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누군가 또 다른 모략을 쓸 것만 같았다.
세 공주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다. 고여아는 이것저것 떠벌리며 나서기 좋아했다. 그녀는 이미 궁에서 떠났지만, 아직도 궁 안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아운소는 소탈한 성격으로, 궁 안을 자주 돌아다녔다. 인기도 제법 많았고 평판도 좋았다. 나사는 큰 존재감이 없었다. 처음 입궁했을 때만 해도 자주 밖을 돌아다니더니 요즘은 두문불출했다.
위지불이는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옥천전을 찾아갔다. 나사는 위지불이가 찾아온 게 조금 뜻밖이었지만,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불이 공자, 정말 오랜만에 찾아와 주었군요.”
위지불이가 물었다.
“공주,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서 무얼 그리하는 거예요?”
“조용히 있는 게 좋아서요. 전 떠들썩한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나사가 그녀를 불렀다.
“공자, 어서 이리와 앉으세요. 이렇게 와 주셨으니 식사를 하고 가시는 게 어때요? 동월 요리를 해 드릴게요.”
위지불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공주께선 제가 온 이유를 알고 계셨군요.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어요.”
“공자께서 그리 좋아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시녀 향미가 차를 내어다 주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위지불이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공주께서는 통 밖을 안 나가시니, 고여아 공주가 출궁한 사실을 아시나 모르겠네요.”
나사가 말했다.
“제가 밖을 나가지 않은 건 맞지만, 소식에 어둡진 않습니다. 이미 들어 알고 있지요.”
위지불이가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아무리 제가 싫어도 그렇지… 영사를 다치게 하다니요. 소탐대실이 따로 없다니까요. 전 이렇게 멀쩡한데 고여아 공주는 궁을 나갔잖아요.”
“영사를 공격한 건 아마 다른 사람일 겁니다.”
“네? 공주께선 무슨 근거로 그리 말씀하시는 거예요?”
나사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그저 직감일 뿐입니다. 남원 백성들에게 영사는 부처님과 다름없거든요. 고여아의 담이 아무리 커도 감히 영사를 해하진 못할 것입니다.”
위지불이는 이번 일에 대한 그녀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생각도 아운소와 똑같을 줄이야. 두 공주 모두 고여아가 영사를 다치게 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나사가 한 일이라면… 고여아가 한 짓이라고 우겨야 했다.
위지불이는 안개 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세 공주 중 누군가 뒤에서 이번 일을 꾸몄다는 것.
고향 음식을 먹으며 임안성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어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옥천전을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는데, 나사는 여전히 문 앞에 서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빙긋 웃고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사는 정말 황후로 제격이었다. 다만… 위지불이는 그 누구와도 남제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황혼으로 물든 남원 궁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하늘은 옅은 붉은 빛을 내뿜었고 꽃으로 뒤덮인 대지에는 공작새가 꽁지깃을 흔들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짹짹 소리를 내며 공작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석양빛을 뚫고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눈을 가진 사내였다. 하늘에 뜬 밝은 달처럼 그의 눈빛은 위지불이의 가슴속을 비췄다. 그녀도 서둘러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폐하, 무슨 일로 나오셨어요?”
“널 데리러 왔지.”
그가 한 말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모으고 배시시 웃으며 그와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어떠했느냐?”
남제화가 물었다.
“음식이 아주 맛있었어요.”
위지불이가 속도를 조금 늦춰 남제화의 발걸음에 맞췄다.
“나사 공주는 늘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하는 것 같아요. 소란스러운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이해심도 많고, 예쁘고, 단아하고. 사내라면 아마 다들 그런 부인을 얻고 싶어 할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말이 조금 우스웠다.
“짐은 그런 얘길 물은 게 아니다. 오늘 나사를 찾아간 건 영사 사건을 떠보려던 게 아니었느냐?”
“그것도 물어봤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나사 공주의 생각도 아운소와 같아요. 고여아가 영사를 다치게 한 건 아닐 거래요.”
“네 생각은 어떠하냐?”
위지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별안간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아직도 폐하가 가장 의심스러워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갔다. 남제화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리 단순한 아이가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나서다니.
* * *
평온했던 날도 잠시, 며칠 뒤 궁에 큰 사달이 났다. 사람이 죽은 것이다. 남원 황궁에서 살인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남원은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매년 인구가 줄어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제가 천면인 계획을 실행한 게 아닌가.
백성이 매우 중요한 탓에 남원에서는 사형을 내리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파거나 혀를 자르는 한이 있어도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 황궁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 것이다.
변을 당한 사람은 궁녀였다. 궁녀의 시신은 외진 수풀 속에서 발견되었다. 소식을 접한 남제화는 곧장 수풀로 달려갔고, 위지불이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남제화가 수풀에 도착했을 땐 병사들이 이미 현장을 봉쇄한 뒤였다.
궁녀의 시신은 그늘진 나무 아래에 놓여 있었다. 시체는 다리를 굽힌 채 한 손은 가슴을 짚고 있었다. 표정은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짐작건대, 숨을 거둘 때 엄청난 흉통을 느낀 것 같았다. 시신을 유심히 살피던 강암룡이 궁녀를 알아보았다.
“폐하, 공작전의 궁녀입니다.”
그가 세 공주에게 보낼 궁녀들을 안배했기에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남제화가 말했다.
“자세히 살펴보거라. 사망 시각이 언제인 것 같으냐?”
강암룡은 시신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사후 경직이 끝난 것을 보니 사망한 지 제법 지난 듯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사망한 것 같습니다. 이곳은 외져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지요. 그래서 이제야 발견된 것 같습니다.”
위지불이도 쪼그려 앉아 시신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남제화를 불렀다.
“폐하, 손에 뭘 쥐고 있는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