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4화
남제화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면 짐이 괜히 얻어맞았단 말이냐?”
위지불이는 빙긋 미소를 짓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제 됐죠?”
충분할 리가.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위지불이가 막았다.
“욕심부리지 말아요. 그럼 제 몸도 이미 보셨겠네요.”
“그날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짐에게 다시 한번 보여 다오.”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폐하는 황제잖아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황제도 사람인지라 감정과 욕망이 있단다.”
남제화가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달랬다.
“어서, 짐에게 보여 달래도.”
위지불이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얘기하면, 또 주먹이 날아갈 줄 알아요!”
남제화는 그녀가 또다시 주먹을 쓸까 봐 정말 겁이 났다. 그녀는 좀처럼 힘 조절을 할 줄 몰랐다.
“그래, 더는 놀리지 않겠다. 짐은 네가 이리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게 걱정이다. 앞으로 짐 앞에서는 그리 싸맬 필요 없다. 더위를 어찌 견디겠느냐.”
위지불이가 말했다.
“이미 땀띠가 잔뜩 났는걸요.”
남제화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큰일이구나. 어서 풀어 보거라. 짐이 준 청초靑草 연고는? 어서 찾아오거라. 짐이 발라 주마.”
위지불이는 자신이 튼튼한 체질이라고 생각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딱지가 앉았으니 곧 나을 거예요.”
하지만 남제화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 이 여인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설령 바늘에 찔렸다 해도 한나절이나 마음을 애태울 텐데, 땀띠가 잔뜩 났다니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녀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그가 직접 찾는 수밖에. 다행히 연고는 화장대에 놓여 있어 찾기 쉬웠다. 그가 연고를 들고 와서 뚜껑을 열었다.
“어서 침대에 엎드려 보거라! 짐이 발라 주마.”
위지불이는 얼굴을 붉힌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제화가 말했다.
“뭐가 그리 겁난단 말이냐. 이미 다 본 것을. 게다가 조만간 내 사람이 될 것인데 짐과 가까이하는 것도 익숙해져야지.”
위지불이가 고민 끝에 대꾸했다.
“폐하는 나가 계세요. 제가 직접 바를게요.”
남제화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등에 눈이라도 달렸단 말이냐? 약만 바를 뿐 다른 건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거라.”
그가 몸을 돌아 세웠다.
“천을 풀고 침대에 엎드리거든 다시 짐을 부르거라.”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슴을 감싼 천을 조심스레 풀었다. 안 그래도 땀띠 난 부위가 점점 가려워지던 참이었는데, 약을 바르면 분명 편해질 것이다. 매듭을 풀자 그녀의 어깨가 드러났다. 침대에 엎드린 그녀는 웅얼거리며 그를 불렀다.
“폐하, 다 됐어요.”
남제화가 그녀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계집은 침대에 꼿꼿이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등은 땀띠투성이였다. 어떤 곳은 살이 짓무른 곳도 있었다. 여인의 등이 이리 되다니! 가슴이 쓰라려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이리 땀띠가 났는데 무엇 하러 그 천 조각을 둘러맸단 말이냐?”
“들킬까 봐 그랬죠.”
“들키면 또 어떻다고. 네가 여인인 걸 진작 알았다면 짐도 그리 고생하지… 되었다. 다 지나간 일이니.”
연고의 청량한 느낌이 아주 좋았다. 위지불이는 긴 숨을 내쉬며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고생을 하셨는데요?”
남제화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땐 짐이 네가 여인이라는 걸 몰랐으니 사내에게 가져선 안 될 감정이 생겼다고 여겼지. 해서 그 화를 너에게 분출했다. 그것 때문에 네가 궁에서 도망치지 않았느냐?”
위지불이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어쩐지 남제화가 거리를 두더라니…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정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그는 위지불이를 사내라 여기고, 그녀는 그를 남색가라 생각했다. 그 오해는 서로를 한참이나 엇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마음은 저버리지 못했으니 두 사람의 사랑이 세속을 이겨 냈다고 할 수밖에. 모든 오해가 풀리자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가 되었다.
남제화는 연고를 꼼꼼하게 발라 주었다. 다 바른 뒤에는 약이 마를 수 있도록 계속 엎드려 있게 했다. 그가 침대 옆에 걸터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동여매지 말거라.”
위지불이가 물었다.
“여인이라는 걸 밝히란 말씀이세요?”
남제화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남자인 척하는 게 좋겠구나. 시일이 좀 더 지난 뒤에 밝히고.”
위지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요?”
“그게 네게 좀 더 안전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그리 많은 걸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어차피 저도 그게 편해요.”
“하지만 이 천은…….”
남제화가 말했다.
“네게 헐렁한 옷을 만들어 주라고 분부할 테니 앞으로는 동여매지 말거라. 땀띠가 그리 많이 나지 않았느냐.”
위지불이가 시시덕거리며 말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세요. 전 어릴 때부터 튼튼하게 자라서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에겐 아주 큰일이다.”
남제화가 자그마한 부채로 부채질해 주었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 위지불이는 잠이 솔솔 왔다.
“불이.”
“네?”
위지불이는 반쯤 뜬 눈으로 대꾸했다.
“왜요?”
“네 목소리는… 날 때부터 이러했느냐?”
“아뇨.”
위지불이는 자기 팔을 베고 엎드려 태연하게 말했다.
“어릴 때 몸이 심하게 아픈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약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목구멍이 다 데었죠. 병은 다 나았는데, 목소리는 이렇게 됐어요.”
“병이 그리 위중했느냐?”
“네. 죽을 뻔했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름을 불이라고 바꿔 주신 거예요.”
남제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불이, 그녀의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었다니.
“앞으로 짐이 잘 보살펴 주마.”
그가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마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자 위지불이는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눈을 감은 채 졸고 있는데,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앞으로는 짐을 마음대로 때리지 말거라.”
위지불이가 눈을 뜨며 물었다.
“왜요?”
남제화가 최대한 위엄 있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짐은 황제이니라.”
위지불이는 그가 무섭지 않았다.
“폐하는 남원의 황제고 전 동월 백성이에요. 폐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실 수는 없어요.”
남제화가 물었다.
“내가 네 부군이라면?”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녀는 그렇게 먼 미래의 일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당장 내일도 알 수 없는 사람…….”
“허튼소리!”
남제화가 목청을 높여 꾸짖었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짐 곁에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위지불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폐하의 후궁에는 공주가 둘이나 있잖아요. 전 다른 이들과 부군을 나누고 싶지 않아요.”
남제화가 웃으며 물었다.
“동월의 사내들은 처첩이 수도 없이 많거늘.”
위지불이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동월의 황상은 황후 마마 한 분뿐이거든요.”
“너희 황후 마마와 혼인하기 전, 동월 황제에게도 다른 약혼녀가 있었다. 이건 모를 테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어요.”
“황가의 비밀이니 모르는 게 당연지사지.”
위지불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정말요?”
“내가 널 속여 무엇 하겠느냐?”
“그, 그럼 그 약혼녀는요?”
“황제가 죽였다.”
“에?”
위지불이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너희 황후 때문에.”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너희 황제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내라고 할 수 있지.”
위지불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럼 폐하는요?”
“짐은…….”
남제화가 옛일을 떠올렸다. 사앵앵과 있었던 일도 사랑인 셈인가? 하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마치 전생의 일인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네가 있으니 짐도 사랑에 빠진 사내가 되었구나.”
“흥, 제가 기억 못 할 줄 알고요? 폐하께서 그러셨잖아요.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다고.”
남제화는 굳이 이 사실을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과거의 일을 무엇 하러 언급한단 말이냐?”
“폐하께서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인데요? 영원히 알려 주지 않으실 거예요?”
“언급하지 말라 했거늘… 기어이 묻다니.”
“그냥 궁금하잖아요. 대체 어느 여인이 황제를 거부했는지 말이에요.”
남제화는 그녀의 주먹이 무서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고여아가 출궁한 건 알고 있겠지?”
“네, 알아요.”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아운소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후다닥 몸을 일으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선 그에게 물었다.
“고여아가 떠난 게 폐하께서 꾸미신 일이에요?”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사냥 사건은 그렇다 쳐도… 영사를 다치게 한 건 너무 큰일이잖아요. 폐하께선 부처님이 책망할까 두렵지 않으세요?”
남제화는 조금 의아했다.
“영사를 다치게 한 게 짐이 한 짓이라 여기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운소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영사는 부처님의 영수잖아요. 고여아가 아무리 제멋대로라 한들, 영사를 해치진 않았을 거예요.”
남제화는 그녀의 논리가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자는 영사를 해치지 않을 것 같은데, 짐은 영사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으냐?”
“폐하는 황제잖아요. 황제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던데요.”
사실은 아운소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었다. 남제화는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종종 잔꾀를 부리긴 했지만 위지불이는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깊이 생각하며 그를 의심할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짐을 의심하는 것이더냐?”
“황상이 저 때문에 도를 넘는 짓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짐의 나이가 몇 살인데 해도 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모를까.”
남제화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것이냐?”
“아무도 안 했어요.”
위지불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아운소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혼자 생각한 거예요.”
남제화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짐은 영사를 해하지 않았으니 걱정 말거라.”
“정말이에요?”
남제화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짐이 맹세라도 할까?”
위지불이가 그를 말리며 활짝 웃었다.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