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31)화 (830/1,192)

제831화

고여아가 어렵사리 반박할 말을 찾았다.

“그자는 폐하의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남제화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살이가 워낙 고통스러우니 짐은 아이가 필요 없소.”

“하지만 황실에는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남제화가 그녀 앞으로 두 발짝 걸어갔다.

“공주, 알고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오? 황권은 이미 땅에 떨어졌소. 짐도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소. 백성들이 모른다고 공주도 모른 척한단 말이오?”

고여아는 질겁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평소 온순한 어린 양 같았던 황제가 지금은 먹이를 노리는 무서운 늑대 같았다. 날카로운 눈빛은 서슬이 시퍼렜다.

그녀는 대체 어느 것이 진짜 남제화의 모습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평소 양가죽을 덮어쓰고 위장했단 말인가? 아니면 그녀가 그의 안에 있던 흉악함을 자극한 것인가?

“공주는 이미 장로들과 손을 잡지 않았소?”

남제화가 그녀 가까이 걸어왔다.

“공주가 입궁한 건 황후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지. 오마 족장도 주판을 꽤 잘 굴렸소. 분립된 삼권 중 공주를 황후로 세우면 두 권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을 테니까. 짐의 추측이 틀렸소?”

고여아는 탁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자 그녀는 몸을 젖힌 채 허둥댔다.

남제화의 추측이 맞았다. 오마 족장은 암암리에 장로들과 손을 잡았다. 그녀가 황후만 되면 황제의 권력을 수중에 넣을 생각이었다. 부족의 왕으로는 오마 족장의 야심을 채울 수 없었고, 산속 험악한 환경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가장 예쁜 공주를 보내 미인계로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원의 황제는 여인이 아닌 사내를 좋아했다.

오마 족장의 모든 계획은 고여아도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청초한 용모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뺏긴 건 황제가 아니라 고여아였다.

황제는 거칠기만 한 부족 용사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늠름하고 탄탄한 몸집, 다정하고 우아한 성격, 그는 꼭 새벽에 떠오르는 햇살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날부터 그를 향한 감정은 점점 뿌리가 깊어지고 싹을 틔우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운소는 춤을 잘 추었고 나사는 단정하고 고상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녀만큼 얼굴이 예쁘진 않았다. 고여아는 사내들의 마음을 뺏는데 결정적인 건 용모라고 믿어 왔기에 두 공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황제의 입에서 위지불이의 이름이 나오던 순간. 그녀의 가슴엔 날카로운 칼이 꽂히는 것 같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듯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질투에 눈이 멀어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다. 옥합이 아무리 타일러도 그녀는 위지불이를 제거할 생각뿐이었다.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대도 어떻게든 그 동월 놈을 없앨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건 무섭지 않았지만, 영사를 해한 건 마온극 부족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었기에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서슬 퍼런 눈을 피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폐하, 아직도 사냥 때의 일을 추궁하시는 것입니까?”

남제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공주의 체면은 세워 주고 싶었는데. 왜, 짐이 증거가 없어서 당신을 어찌하지 못할 성싶소?”

고여아는 끝까지 모른 체했다.

“전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남제화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자를 들여보내거라.”

두 병사가 한 사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여아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입을 들썩였다.

“넌…….”

남제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자를 보고 크게 놀란 듯하군.”

고여아는 옥합에게 빠르게 눈치를 보내고는 계속해서 잡아뗐다.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전 모르는 자입니다.”

사곤은 그녀의 말에 냉소를 지었다.

“소인에게 뱀을 부려 위지불이를 공격하라고 하셨을 땐… 소인을 잘 아시지 않으셨습니까?”

“무엄하다!”

고여아가 성을 내며 남제화에게 말했다.

“폐하, 이자가 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전 전혀 모르는 자입니다.”

“공주가 이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증명하는 건 어렵지 않소. 이자를 궁 밖 역참으로 데려가면 많은 이들이 이자를 알아볼 테니.”

고여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오늘 일은 그리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남제화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공주가 불이에게 맞서는 건 그렇다 쳐도, 어찌 감히 영사까지 해할 수 있단 말이오? 공주는 영사가 부처님의 영수靈獸라는 걸 모른단 말이오? 영사를 다치게 했으니 부처님께서도 분명 공주를 책망하실 것이오.”

“전 아닙니다.”

고여아는 단칼에 부인하며 사곤을 가리켰다.

“저자가 한 짓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옥합은 눈을 감았다. 심장이 깊은 골짜기 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면… 저자를 안다고 인정하는 것이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자는 공주의 사람이니 당연히 공주의 분부대로 따를 터. 공주가 영사를 해하라는 분부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들 모든 책임은 주인인 공주에게 있소. 늘 공주답게 행동하고 그에 걸맞는 책임을 지지 않았소? 이번 일은 공주답지 않소.”

“저는…….”

“영사를 해친 건 아주 큰 죄라 장로들도 공주를 지켜 주지 못할 것이오.”

남제화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다가왔다.

“짐이 이미 전서구를 보내서 오마 족장에게 이번 일을 알렸소. 분명 오마 족장도 할 말이 없겠지. 공주는 그만 짐을 싸시오. 반 시진 후에 출발할 것이오.”

“폐하, 절 어디로 보내신단 말입니까?”

“짐은 늘 부처님을 공경하는 인자한 황제요. 살생은 하지 않을 것이니 부족으로 돌아가 오마 족장의 벌을 받으시오.”

고여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쫓겨나면 체면이 깎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엄중한 벌을 받아야 했다. 설령 족장의 친자식이라 해도 소용없었다.

오마 족장이 장로들을 포섭하느라 얼마나 큰돈을 썼는데… 거의 다 된 일을 그녀가 그르쳤으니 분명 노발대발할 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오마 족장의 화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째서 날 배반한 것이냐?”

사곤이 냉소를 지었다.

“공주께서 소인의 목숨을 노리셨으니까요. 한마디면 될 일을 어째서 그런 안배를…….”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남제화가 손을 흔들었다. 두 병사는 곧장 사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고여아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폐하, 어째서 저자의 말을 끊으시는 겁니까?”

“이미 이 지경이 되었는데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어서 짐을 싸시오. 해가 지기 전엔 출궁해야 하니까.”

* * *

지하 감옥. 여제는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은색 가면을 쓴 자가 분주히 걸어와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태황 전하, 폐하께서 벌써 고여아 공주를 궁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여제가 뾰족한 호갑투로 화려한 치맛자락을 가볍게 털었다.

“줄곧 조용히 있더니 석 달 중 반이 지나서야 겨우 한 명을 해결하는구나. 마온극 부족은 장로들과 결탁했으니 처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전하, 하면 저희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지켜봐야겠지.”

여제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은 너무 오랜 시간 황폐한 삶을 살지 않았는가. 과인은 정말 그 애가 못 쓰게 된 줄 알았단다. 당분간은 그 애의 능력을 지켜보자꾸나. 황상에게도 과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늑대와 같이 흉악한 성질이 있으니 절대 그 애를 압박해서는 안 된다.”

“태황 전하께서는 역시 영명하십니다.”

“아운소와 나사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거라. 황제와 과인이 합의한 그날, 과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가 가만히 있진 않을 거란 걸.”

“하면, 위지불이는…….”

“그자는 과인이 황제를 견제하는 귀한 도구지. 아직은 건드려선 안 돼.”

여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예쁜 공주에게 넘어가지 않고 사내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아마도 과인의 죄업이 너무 큰 탓이겠지.”

“전하, 자책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전부 남원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 말에 퍽 위안이 되는구나. 과인의 고충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니.”

여제는 몸을 축 늘어뜨리고 의자에 기댄 채 손을 흔들었다.

“피곤하니 이제 그만 물러가 보거라.”

은색 가면을 쓴 사람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촛불이 이따금 타닥 소리를 내며 불꽃을 터뜨렸다. 여제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낮게 탄식을 내뱉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 들어 자꾸만 옛일이 떠올랐다. 그녀와 연이 닿았던 사내들… 그녀의 친아들과 친딸.

그녀는 용맹한 성격이지만, 아들딸은 그녀의 성격을 닮지 않았다. 남제화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인자함도 필요하지만, 강력한 수단과 야심이 더 필요한 법. 그래야 강산과 사직 그리고 남원의 백성들을 지킬 수 있었다.

이번엔 백천범을 떠올렸다. 낳자마자 떠나보낸 딸이었기에, 그녀는 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은 언제나 감정보다 앞섰다. 존귀한 남씨 가문의 사람으로서 그녀는 남원을 지켜야 했다. 남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천면인 계획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후회하는 것. 그녀가 자신의 딸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백천범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굳건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백천범이 대제사의 법력을 깨고 도망치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천범은 대제사의 법력을 깬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무 순수해서 오히려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딸아이의 부부를 생이별시켰다. 딸아이는 분명 제 어미를 증오할 테지.

동월의 황제는 아직 여제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건대 백천범을 생각해서 그녀를 죽이지 않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남제화처럼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기나긴 기다림은 사람의 의지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동월의 천하는 조만간 묵용린의 손에 들어갈 터. 그녀는 묵용감보다 자신의 외손자가 더욱 꺼려졌다.

돌잔치 때 감히 그녀의 옥좌에 올랐던 동월의 어린 태자는 지금쯤 장성해 있겠지. 그는 묵용감과는 다르게 그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그날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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