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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30)화 (829/1,192)

제830화

말을 마친 그는 약속대로 문을 잘 닫아 주었다. 위지불이는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겨우 마음을 놓았다. 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사실 자신의 성별이 탄로 나는 건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무서운 건 제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더는 남제화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남장을 할 만큼 그를 좋아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매일 댓잎밥처럼 몸을 꽁꽁 감싸고 있어서 등에 땀띠가 잔뜩 났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여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거친 일을 하며 자랐다. 부모님도 그녀를 계집으로 봐 주지 않으셨다. 다른 집 아이들은 열 서너 살 정도부터 신랑감을 물색하는데, 그녀는 시집갈 나이인 열일곱이 될 때까지 혼담을 꺼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인이 자객 훈련을 받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지만 부모님은 이에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녀도 별생각 없이 자라 그게 싫지 않았던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남제화를 만난 뒤에 모든 게 달라졌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도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도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에게 주는 좋은 것들, 그의 다정함, 뜨거운 눈빛을 계속 받고 싶었다. 그가 더 이상 그녀를 봐주지 않고 좋아해 주지 않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허점을 감추고 그의 옆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고여아는 백화전에서 노발대발 성을 내는 중이었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사내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쓸모없는 것! 누가 영사를 공격하라고 했느냐?”

사내는 그녀의 손찌검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이내 반듯이 몸을 엎드렸다.

“공주, 노여움 푸십시오. 소인도 벽사가 왜 갑자기 영사를 공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인이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분을 참지 못한 고여아는 사내를 힘껏 걷어차 넘어뜨렸다. 그리곤 탁자를 짚은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뱀을 부리는 사람을 써서 위지불이를 공격한 사실이 들통난다고 한들 그녀는 겁날 게 없었다. 남원 황제가 일개 동월인 때문에 부족의 체면을 깎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영사를 공격한 것은 큰 문제였다.

옥합은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냥 사건 이후 고여아가 반성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점점 더 정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위지불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성싶었다. 남제화가 어떻게 나오든 전혀 개의치 않고서 말이다. 그녀 뒤에 장로들이 있다곤 하지만… 옥합은 불안했다.

옥합은 이 계획을 알고선 고여아를 타일렀다. 하지만 고여아는 뜻을 굽힐 줄 몰랐다. 위지불이를 자신의 난적으로 생각하고 어떻게든 그녀를 제거할 생각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여아는 황제의 마음을 쉽게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뜻밖의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황제의 마음을 얻은 사람은 가증스러운 동월인… 위지불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싫어하는 것은 없애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궁에서는 싫어하는 걸 마음대로 없애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마음도 얻지 못했다.

그녀는 겉으론 옥합의 권유를 듣는 척했으나 속으로는 어떻게든 끝장을 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시도하면 될 일. 황제가 관문을 닫고 예불을 드리는 건 그녀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위지불이는 뱀을 무서워했다. 남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사는 한 번 물리면 사망에 이를 만큼 맹독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그 순간 영사가 나타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벽사들은 불상 앞에서 상서로운 짐승인 영사를 해쳤다. 그녀가 아무리 공주라 한들 이는 엄청난 죄였다.

이번엔 그녀도 좀처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라 그녀의 소행임을 바로 밝혀내진 못할 것이다. 한참 고민한 끝에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넌 당장 타곤성을 떠나거라. 다시는 나타나지 말고.”

사내가 이마를 땅에 박으며 대답했다.

“예, 공주.”

그는 사곤查坤이라는 자로, 뱀을 조종하는 사수蛇手였다. 뱀을 부리는 능력이 뛰어난 사곤은 지금껏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었다. 이번 사달이 이해되지 않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사를 다치게 했으니 황제는 분명 사건을 낱낱이 조사할 것이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벌인 일이라 쉽게 들통나진 않겠지만, 만일을 대비해 성을 떠나라는 공주의 지시는 옳았다.

사곤은 급히 궁을 빠져나와 역참에 있던 말을 타고 성문으로 내달렸다. 타곤성을 떠나야 한다면 그는 당연히 부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서문을 나온 그는 남쪽으로 내달렸다. 빠르게 산을 넘는다고 한들 부족에 닿으려면 며칠이 걸렸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은 뒤, 건량을 사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황혼에 물든 산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나무 그림자는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고 산바람은 끝없이 불어왔다. 그는 숲을 꺾어 나와 붉은 석양이 산 너머로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몰에 가슴이 벅차오른 그는 말을 멈춰 세우고 붉은 하늘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말이 별안간 고개를 숙이고 재채기를 했다.

사곤은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숲에서 조용히 나와 그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들 손에 들린 굽은 완도는 석양빛에 물들어 피를 묻힌 듯 빨갛게 번득였다.

사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퇴로는 이미 막힌 뒤였기에 도망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죽기만 기다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곧장 고삐를 당기고 말을 돌린 뒤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가장 인원이 적어 보이는 곳으로 내달렸다.

사곤은 마온극 부족의 용사였다. 그는 몇 번 겨루자마자 적들이 비범한 실력을 갖춘 조직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단번에 그의 말을 베어 넘어뜨렸다. 사곤은 공중으로 몸을 날려 포위망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를 포위했다. 사곤의 다리에서는 피가 흘렀고 등도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칼을 땅에 꽂고는 호통쳤다.

“웬 놈들이냐? 죽더라도 죽는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니더냐?”

그들 중 한 명이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넌 우리가 누군지 알 필요 없다. 네가 알아야 할 건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뿐.”

사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공주…….”

“헛소리 집어치우고 얌전히 죽거라!”

자객이 손을 휘두르자 다시 공격이 쏟아졌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곤은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목숨을 걸고 덤비기 시작했다. 그는 적들을 매섭게 바라보며 입가에 묻은 피를 핥았다. 피비린내에 살기가 한껏 차오른 그의 모습은 꼭 숲속의 맹수 같았다.

자객들의 칼이 그의 몸에 수없이 많은 상처를 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내 혈로를 뚫고 비탈길을 내달렸다. 앞으로 내달리며 몸에 지니고 있던 약을 뿌린 그는 입으로 낮고 기괴한 휘파람을 불었다.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무언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순간, 누군가 놀란 듯 비명을 내질렀다.

“뱀이다!”

사곤은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달렸다. 그가 지나간 곳엔 핏자국이 낭자했고 그 위로 각종 뱀들이 득실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은 뱀에게 길이 가로막혔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땐, 사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 *

백화전의 고여아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이번 일을 가만히 곱씹어 봤지만, 겉으로 드러날 만한 허점은 없었다. 설령 남제화가 그녀를 의심한다고 해도 증거도 없는데 어찌 그를 해할 수 있겠는가? 옥합이 다가와 말했다.

“공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최악의 계획을 세워 두어야 합니다.”

고여아가 냉소를 지었다.

“무서운 것이냐?”

“오마 족장의 신뢰를 저버렸으니 소인도 죄가 큽니다.”

옥합이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인은 공주를 타일렀지만, 공주께선 고집을 꺾지 않으셨지요. 동월인을 상대하기 위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다. 공주, 남원의 황궁은 더 이상 공주를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고여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넌 내가 진 것 같으냐?”

“황궁에서는 매사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는 법입니다. 적들이 함정을 파고 있을 때, 공주께선 사사로운 원한을 푸는 데 여념이 없으셨지요. 이제 저들이 공주의 빈틈을 파고들 것입니다.”

“함정? 영사 사건을 말하는 것이냐?”

“벽사가 아무 이유 없이 미쳐 날뛴 것은 분명 수상쩍은 일이니, 사곤에게 떠나라 하신 것은 옳은 처사입니다. 하지만 주도권은 이미 저희 수중을 떠났습니다.”

고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난 그저 달갑지 않았을 뿐이다.”

고여아는 황제의 마음이 동월놈에게 간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옥합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는 천하를 다스리는 어머니입니다. 공주의 성정으로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응석받이로 자란데다 제멋대로 날뛰는 고여아. 이런 성격으로 어찌 황후가 되겠는가?

고여아는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넋을 놓고 있는데 별안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손에 완도를 든 병사들은 두 사람을 겹겹이 포위했다.

깜짝 놀란 고여아가 매섭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문밖에서 들려왔다.

“그건 짐이 공주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남제화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늘 따스하던 황제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여아는 차가운 시선에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공주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폐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짐의 말뜻을 모르겠소?”

남제화가 냉소를 지었다.

“그간 짐은 공주에게 섭섭하지 않게 대해 준 듯한데… 공주는 어째서 짐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이오?”

이쯤 되니 고여아도 그에게 미움을 받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폐하의 한계가 위지불이란 말씀이십니까?”

남제화도 감출 생각이 없었다.

“맞소.”

고여아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황실의 체면을 위해 사내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인정하다니! 그녀는 심장이 쥐어뜯기는 것처럼 아팠다. 두 눈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른 듯 시야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폐하.”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위지불이는 사내입니다.”

“짐은 그 애가 좋은 것이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소.”

“…….”

세상에 이런 감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성별과 귀천을 무시할 만큼 좋아한다니. 저 고귀한 머리를 낮출 만큼 좋아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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