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9화
생각해 보면 녀석은 키가 작았고 그가 하는 행동에 얼굴을 자주 붉혔다. 그 외에도 위지불이의 언행에는 여자라고 의심할 구석이 많았지만,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녀석은 귀를 뚫지 않았고 남자보다 더 굵은 목소리를 지녔으며 말투도 거칠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들은 한 달에 며칠씩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 않은가? 하지만 위지불이는 그런 낌새가 전혀 없었다. 잔꾀가 많은 놈이니 다른 방법을 고안해서 숨겼을지도…….
이제야 그는 진실을 마주했다. 위지불이는 여인이었다. 남자로 위장한 여자였다.
그녀의 가슴을 바라보자니 입안이 약간 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헝겊을 느슨하게 감은 뒤, 그녀의 옷을 다시 입혀 주었다. 다만 맨 윗부분 매듭단추 두 개는 채우지 않았다.
그는 탁자로 가 물을 한 잔 따랐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달아올랐던 열기가 식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위지불이의 진짜 성별을 알릴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남자로 위장해 있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그는 가만히 턱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이놈의 계집이 자신을 그렇게 고민하게 만들었겠다? 그는 그녀를 쉽게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연거푸 석 잔의 물을 마시자 침대 위에 누운 그녀가 기척을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를 부드럽게 불렀다.
“폐하.”
그녀 목소리는 여전히 굵은 편이었지만, 남제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았다.
“일어났느냐? 몸은 좀 어떠하냐?”
“폐하께서 다시는 뱀이 나타나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늘… 많은 뱀이…….”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는 손짓까지 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어린 처녀였다. 남제화는 그녀를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짐이 잘못했다. 짐이 약속을 제대로 안 지켜서 네가 많이 놀랐구나.”
위지불이는 시퍼런 뱀들과 싸우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남제화의 품에서 바스락거리더니 마침내 편안한 자세를 찾아 그에게 몸을 기댔다.
“이제 안심하거라. 오늘 일은 짐이 책임지고 처리할 것이다.”
“폐하, 영사가 저를 구해 주었어요. 저를 위해 상처까지 입었는데, 치료는 해 주셨어요?”
“영사의 상처는 저절로 낫는다. 치료할 필요 없단다.”
남제화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이제 영사가 무섭지 않으냐?”
“그래도 무서워요.”
위지불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영사가 싫지 않아요. 걘 좋은 뱀이에요. 만약 걔가 없었다면 저는 폐하를 다시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아니다. 짐이 말했지 않았느냐? 넌 죽지 않았을 거다.”
남제화는 말했다.
“그놈들은 벽사라는 뱀인데, 독이 있어서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지만 넌 죽지 않았을 거야. 네 몸에 있는 고충이 뱀독보다 강해서 뱀독을 억제할 수 있다.”
위지불이가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 지금 백독불침이 된 건가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여제가 너에게 고충을 심었으니 당연히 남의 손에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위지불이가 냉소를 지었다.
“그럼, 고맙다고 인사해야겠네요.”
남제화는 시선을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눈으로 위지불이의 옷깃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옷 안으로 헐거워진 천이 보였다. 그는 헛기침하며 눈길을 거두었다.
위지불이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으로 앞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불안함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떻게 매듭단추가 두 개나 풀려있지? 대체 누가 푼 거야? 설마, 비밀이 들통났나?
그녀는 가슴을 감싸 안고 천천히 남제화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곤 손을 뻗어 베개를 끌어안았다. 남제화의 눈빛을 슬쩍 살펴보니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기색이었다. 아마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폐하, 땀을 잔뜩 흘려서 좀 씻어야겠어요.”
남제화가 말했다.
“그래, 그럼 가 보아라.”
그는 그녀에게 왜 베개를 껴안고 가는지는 묻지 않았다. 위지불이가 문가에 이르렀을 때, 남제화가 그녀를 불렀다.
“불이, 날씨가 너무 더우니 옷을 많이 껴입지 말아라. 더위를 먹기 십상이니 헐렁한 옷을 입거라.”
위지불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베개를 더 꽉 껴안았다. 가슴을 꽉 여미고 있던 천 조각들은 이미 허리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서둘러 천을 정리하러 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비밀이 들통날 터였다.
위지불이가 떠나자 남제화는 서재로 향했다. 강암룡이 조용히 다가와 그를 불렀다.
“폐하.”
“영사는 어떠하냐?
“다행히 큰 탈은 없습니다. 지금은 푹 쉬고 있습니다.”
“찾아낸 건 있느냐?”
“남원엔 뱀을 부리는 사람들이 워낙 많지 않습니까? 벽사도 흔한 뱀이다 보니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남제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럼 범위를 축소하거라.”
강암룡은 곧장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폐하의 말씀은 세 공주를… 알겠습니다. 그렇게 분부하겠습니다.”
강암룡이 나가자 남제화는 동으로 만든 호각을 들어 불었다. 호각을 세 번 부니 이윽고 누군가 창문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는 남제화에게 절한 뒤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엔 은색 가면이 덮여 있었다.
“폐하.”
“바깥 상황은 어떠한가?”
“세 부족 모두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소보다 황궁 내부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부족마다 뱀을 부리는 사람이 있어 어떤 부족의 소행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남제화가 물었다.
“다만… 무엇이냐?”
“파목 부족의 움직임이 유독 분주합니다.”
남제화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파목 부족이라면… 아운소 공주?”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겼다.
“오늘 일은 아운소의 소행 같진 않은데. 말해 보거라. 파목 부족의 움직임이 어떠하길래?”
“파목 부족의 누군가가 영패를 받고 성을 나갔습니다. 게다가 역관에 마차를 넉 대나 더 들였습니다. 그 밖에도 며칠 사이에 인부를 더 증원한 것 같습니다.”
“그래?”
남제화가 미간을 더욱 좁혔다.
“계속 예의 주시하거라. 다른 소식이 있거든 곧장 짐에게 보고하고.”
“예, 폐하.”
“마온극 부족은?”
“황궁과의 연락이 평소보다 더 잦습니다. 입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출입궁하는 인원엔 변화가 없었습니다.”
남제화가 냉소를 지었다.
“어쩌면 뱀을 조종하는 자가 그 안에 섞여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알아내야 하는 것은 그 뱀이 어떻게 들어왔냐는 것이다.”
자신의 턱을 만지던 남제화가 물었다.
“혁흑철 부족은 가만히 있더냐?”
“마찬가지로 황궁을 오가는 빈도가 잦아졌습니다. 하지만 입궁하는 인원은 평소와 똑같습니다.”
남제화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금불사 근처의 숲을 조사해 보거라.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예. 소인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제화는 창문을 닫고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섰다.
* * *
방으로 돌아온 위지불이는 아직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들고 목욕간으로 향했다. 그녀가 이곳에 온 뒤로 이곳 목욕간은 그녀만 쓸 수 있었다. 남제화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면 뭐든 다 들어주었다.
커다란 욕탕에 물을 채운 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물 온도는 딱 알맞았다. 물속 깊숙이 몸을 담그고 욕통에 몸을 기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자胰子(비누)로 몸을 닦고 있는데 바깥에서 남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안에 있느냐?”
화들짝 놀란 위지불이는 옷을 입고 싶었지만 불시에 그가 들어올까 봐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는 수건으로 가슴만 가리고 물속 깊숙이 몸을 담갔다. 하지만 얇고 작은 수건으로 뭘 얼마나 가릴 수 있겠는가?
“불이, 안에 있는 것이냐?”
남제화가 문을 몇 차례 두드렸다. 위지불이는 두려움에 떨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뒤이어 그가 문을 미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하러 갔다던데, 대체 어딜 간 것이야.”
“들어오지 말아요!”
위지불이는 두 눈만 물 밖으로 내놓았다. 그녀가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들어오지 말라고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녀의 외침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속으론 웃음 짓고 있었다. 정말이지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그녀를 놀렸다.
“어째서… 내가 남도 아니고.”
“남녀유별이라고요.”
위지불이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라 곧장 말을 바꾸었다.
“남원과 동월은 유별하니까요. 동월 사람들은 목욕하는 모습을 남한테 보이지 않아요.”
“뭐가 그리 걱정이냐.”
남제화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차피 사내들뿐인데.”
“안 돼요. 들어오지 말아요!”
위지불이는 목욕통에 바짝 엎드린 채 얼굴을 살짝 내놓았다. 그녀가 매섭게 소리쳤다.
“폐하는 제가 기분이 상해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다가갈 수 없었다. 남제화는 이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실보다 그녀의 기분이 그에겐 더 중요했다. 그는 십여 년을 외롭게 지낸 끝에 어렵사리 귀한 여인을 만났다. 손에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아껴 줘도 모자란데… 어찌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들어가진 않고, 여기 이렇게 서서 얘기만 하마.”
“아, 정말…….”
그녀는 여전히 성이 가시지 않았다.
“목욕 중인데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다 닦고 나면 그때…….”
그녀는 별안간 무언가 떠올랐다.
“분명히 문을 잠갔는데… 어떻게 열고 들어온 거예요?”
남제화가 얼렁뚱땅 대꾸했다.
“문을 잠갔다고? 밀어 보니 바로 열리던데?”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죠? 제가 옷을 벗은 틈에 절 농락하려고요.”
예전에 친척 오라버니들이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친 적 있었다. 목욕하는 동안 옷을 훔쳐가 개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야만 옷을 돌려주었다.
“은애하기도 바쁜데 내가 널 어찌 농락한단 말이냐?”
그의 말에 위지불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황제가 은애라는 말을 저리 쉽게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녀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
“문 닫아요. 폐하의 말을 믿을게요.”
남제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문 닫으마. 걱정하지 말고 씻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