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3화
그때 더 많은 사람이 숲속에서 몰려나왔다. 아운소, 나사 그리고 고여아도 있었다. 그녀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시위가 금빛 화살을 뽑아 와 남제화에게 두 손으로 바쳤다. 위지불이는 어쩐지 그 금빛 화살이 낯에 익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의 뇌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 이거 화전 시합 때 폐하께서 하사하신 금 화살 아니에요?”
보면 볼수록 똑같았다. 황금빛 화살대에 알록달록한 화살 깃까지. 남제화는 어두워진 안색으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세 공주는 말을 몰아서 가까이 다가왔다. 고여아는 금빛 화살을 보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 걸음 더 빨리 황제에게 다가간 그녀는 다급하게 변명했다.
“폐하,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남제화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하더니 팔을 휘두르며 말했다.
“병영으로 돌아간다!”
병사들이 호각을 불자 대규모 인원이 우르르 숲 밖으로 뛰어나갔다. 위지불이의 말이 도망가 버렸기에 걸어서 움직일 참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허리가 꽉 조이더니 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남제화가 그녀를 땅에서 직접 잡아 올려 말에 태운 것이다. 그의 앞가슴에 그녀의 등이 밀착했다. 조금 쑥스러운 위지불이가 발버둥을 치면서 낮게 속삭였다.
“폐하, 그냥 저 혼자 갈게요.”
남제화는 팔을 더욱더 조이고 위지불이를 품 안에 가두었다. 그의 심장박동은 아직도 완전히 진정되지 않아서 그녀의 등까지 울리고 있었다. 그가 방금 전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지 위지불이가 알기나 할까.
그는 자신이 위지불이를 위험에 빠트린 것 같았다. 그는 위지불이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수많은 화살이 녀석을 향해 쏟아질 땐 정말이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았다.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미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관심이 많으면 마음이 흐트러지는 법. 활을 쥔 그의 손은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반면 위지불이는 그 순간에도 겁먹지 않고 오히려 반격까지 했다. 적에게 상대가 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녀석. 경탄할 정도의 용맹함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가만히 있어.”
남제화는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녀석의 귓불에 살짝 입맞춤했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돌려 눈을 부라렸지만, 시야에 들어온 건 약간 피곤한 듯 웃는 남제화였다. 그녀는 곧 마음이 누그러져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으나, 그녀의 귀는 불이 붙은 듯 한참이나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행히 주위에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녀와 남제화는 무리를 먼저 보내고 느릿느릿 앞으로 향했다.
사방에 푸른 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햇빛이 때때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왔다. 위지불이는 조용하게 흐르는 세월의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계속 그와 함께 걸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남제화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위지불이는 아예 등을 그에게 기대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을 사냥하셨어요? 저는 꿩 한 마리를 잡았어요. 깃털이 참 예뻤는데 아쉽게도 화살이 쏟아지는 바람에 어디로 던졌는지 알 수가 없어요.”
“너의 사냥감은 잘 챙겨 두었다.”
남제화가 말했다.
“막사로 돌아가면 있을 것이다.”
“정말요?”
위지불이는 정말 놀랐다. 그녀는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다.
“물론이고말고. 짐이 약속하는데, 돌아가면 분명 볼 수 있을 거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왜 말을 풀어 주었느냐?”
“도망가지 않았으면 화살에 맞았을 거예요.”
“말을 타고 가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을 보내고 넌 어찌하려 했느냐?”
“말은 몸집이 커서 쉽게 눈에 띄잖아요. 그러다 화살을 맞으면 어떡해요? 그리고 말이 도망가서 원군을 찾아올 수도 있고요.”
“말이 돌아오기 전에 네가 위험을 당하면 어쩌려고?”
위지불이는 말문이 막혔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내 팔자죠. 저를 가르친 사부가 그러셨어요. 자객의 목숨은 값어치가 없으니 임무를 완수하는 게 중요하다고.”
“너는 더 이상 자객이 아니다. 불이, 너의 목숨은 매우 값진 거란다. 짐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해.”
그는 녀석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짐에게 약속하거라. 어느 순간에든 네 목숨을 먼저 지키겠다고.”
위지불이는 마음이 솜사탕처럼 말랑말랑해졌다. 그녀는 그의 품에 기대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약속할게요.”
남제화의 막사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남제화는 짐승 가죽이 깔린 큰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고여아는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곧게 세우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짐이 그대에게 발언할 기회를 주겠소. 말해 보시오. 왜 그랬소?”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금 화살이 바로 증거요.”
“폐하께서 하사하신 금 화살은 백화전에 있어요.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걸 증명할 거요?”
“환궁하면 증명할 수 있어요.”
남제화는 턱을 만지며 침음했다. 위지불이는 그의 곁에서 자신이 잡은 꿩을 들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꿩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꿩의 몸에는 화살이 여러 대 꽂혀 있었다. 모두 회색의 화살 깃이 있는 평범한 화살이었다. 꿩은 피에 엉켜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다행히 꽁지깃은 상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운소에게 꿩을 살짝 들어 보이며 웃었다.
그런데 아운소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엄숙했다. 눈길이 마주쳐도 의아할 정도로 피하기 급급했다. 오히려 아운소 곁에 서 있던 나사가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위지불이는 살짝 미소를 짓고 시선을 거뒀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있는 고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고여아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건 적나라한 적의敵意였다.
위지불이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을 죽이려고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여아에게 미움을 산 적 없는데……. 도대체 무슨 깊은 원한이 생겨 그녀를 쏴 죽이려 한 걸까? 한참 뒤, 남제화가 말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짐도 더 이상 사냥할 마음이 없다. 즉시 환궁한다.”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규모의 무리는 우르르 황궁으로 돌아왔다. 다시 궁으로 돌아와 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이번 일을 유심히 지켜봤다. 다들 백화전의 사람이 금 화살을 가져오기만 기다렸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하지만 엄숙함에 짓눌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고여아는 머리를 쳐들고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도도하게 고개를 들고 이번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화살을 가지러 간 사람이 돌아왔다. 역시, 남제화의 예상대로 빈손이었다. 그 사람은 고여아의 시녀 옥합을 데려왔다. 옥합은 당황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릎을 꿇은 고여아의 모습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여아는 순간 멍해졌다.
“옥합, 화살은? 네가 받아서 놔뒀잖아!”
옥합은 얼른 다가와서 무릎을 꿇었다.
“공주, 소인이 분명 금 화살을 받아서 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조금 전에 상자를 열어 보니 금 화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여아는 오히려 냉랭하게 몰아붙였다.
“안 보인다고? 그게 왜 안 보여?”
그녀는 급히 남제화를 바라봤다.
“폐하, 이건 틀림없이 누군가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폐하께서 명확히 밝혀 주십시오.”
“누가 공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단 말이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명명백백하게 밝혀 주세요.”
남제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공주, 오늘 일이 공주와 전혀 무관하다고 장담할 수 있소?”
“물론입니다. 이번 일은 저와 무관해요.”
“짐이 듣자 하니 공주는 평소에도 불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소?”
고여아는 입술을 깨물고 남제화 곁에 앉아 있는 위지불이를 힐끔 쳐다봤다. 동월의 평민인 그가 폐하의 왼편에 앉을 수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제화가 희미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보군. 짐은 이미 공주의 표정에서 답을 찾았소. 공주는 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번 사냥을 기회 삼아 공격을 한 것이오. 그렇지 않소?”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고여아가 정말 손을 썼다면 어찌 폐하께서 하사하신 금 화살을 썼을까요? 그건 일부러 증거를 남기는 일이잖아요?”
남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일리가 있는 말이오. 다들 금 화살이 공주의 손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그렇게 할 리가 없지.”
고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역시 현명하십니다.”
남제화가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그런데 짐은 공주가 겁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소.”
고여아는 눈이 번쩍 뜨였다.
“폐하, 대체 어디에서 그런 말을……?”
“사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소. 공주께서 짐에게 직접 보여 주지 않았소?”
남제화는 냉소했다.
“공주가 한밤중에 짐의 침소를 찾아온 것만 봐도 공주가 겁 없이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지.”
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고여아의 대담하고 저돌적인 태도를 알게 된 이들은 여러 상황들을 짐작해 냈다.
고여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람들 앞에서 그 일을 언급해 창피를 주다니!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폐하, 그 두 가지는 서로 무관한 일입니다. 추측만으로 저의 죄를 단정하시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남제화가 강암룡에게 눈짓을 보내자 강암룡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시위가 한 궁녀를 끌고 들어왔다. 그 궁녀는 털썩 무릎을 꿇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말하라. 무슨 죄를 지었느냐?”
“고여아 공주께서 입궁한 후, 소인은 백화전에 배치되었습니다. 공주와 옥합 언니가 불이 공자를 비난하는 대화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감히 겁이 나서 이 일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소인,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소인은 폐하의 노비이고, 불이 공자는 폐하의 귀한 손님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만일 공자에게 사달이 났다면 노비는 만 번 죽어도 그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부처님의 은혜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강 총관에게 제가 들은 이야기를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