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0화
남제화는 그의 속뜻을 알아듣고 얼굴을 붉혔다. 솔직히 말해서… 그도 남자에게 어떻게 승은을 내리는지 알지 못했다. 위지불이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는 만족했다. 그는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짐도 무슨 뜻인지 잘 알겠다.”
남제화는 허리춤에서 요패 하나를 떼어내 위지경용에게 던졌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 보거라. 누가 너를 막거든 그 요패를 보이거라.”
요패를 받아든 위지경용은 몸을 돌아서며 위지불이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는 그를 마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긋 웃었다. 그는 속으로 모자란 놈이라며 그녀를 욕했지만 결국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위지불이가 그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셋째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잘 지낼 테니까요. 이틀 뒤에 출궁해서 찾아갈게요.”
누이동생의 마음이 굳어졌으니 위지경용도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폐하가 너한테 잘해 주지 않으면 당장 출궁해서 이 셋째 형을 찾아오너라.”
남제화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잘해 줄 것이다.”
그 말에 위지불이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위지경용은 조금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분명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목소리를 한껏 눌러 말했건만. 남제화는 어떻게 들은 것이란 말인가?
위지불이는 셋째 오라버니를 문밖까지 배웅했다. 전각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복도에 서서 위지경용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휘영청 밝은 빛이 마치 얇은 비단처럼 대지를 뒤덮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가 천천히 전각으로 들어왔다. 남제화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오늘 일로 남제화가 화가 났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그녀는 그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방금 목욕을 마친 남제화는 흰 장포를 입고 까만 머리카락을 등 뒤로 풀어헤쳤다. 궁녀들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말리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다가가 그를 불렀다.
“폐하.”
남제화는 의자에 기댄 채 나른하게 응수했다.
“그래.”
위지불이는 이런 그의 모습에 속이 점점 더 타들어 갔다. 다시 우물거리며 그를 불렀다.
“폐하.”
“할 말이 있으면 하여라.”
“혹시, 제 셋째 형님 때문에 화가 나셨습니까?”
남제화는 손을 내저으며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는 냉랭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짐이 용상에 앉은 이후, 감히 아무도 짐의 목에 칼을 겨누지 못했다. 너의 셋째 형은 참으로 방자하구나. 남원의 율법에 따르면 즉시 참수에 처해야 한다.”
위지불이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 오늘 저의 셋째 형이 몹시 무례했던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이미 용서해 주신 것 아닌가요?”
“만약 그가 너의 해독을 위해 짐을 협박한 게 아니었다면, 짐은 분명 그에게 죽음을 내렸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얼른 마른 수건을 들고 와 남제화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다 저를 위해서 그런 거니까… 폐하께서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으실 거죠?”
“잘잘못은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구나.”
“어떻게 하면 폐하께서 화가 풀리실까요?”
남제화가 위지불이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지금까지 그와 이렇게 가까이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수줍음에 고개를 떨구며 남제화를 살짝 밀쳤다.
“불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남제화의 시선은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지만 아직 마음은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가 안고 있는 사람은 어쨌든 남자였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고 남제화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는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행동에 옮기진 않았다.
위지불이는 그가 혹시라도 자신을 놀라게 할까 봐 걱정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턱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순식간에 입술로 그를 들이받았다.
남제화는 녀석이 적극적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다만, 녀석의 동작은 퍽 어색했고, 당황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녀석이 그의 입술에 힘껏 돌진하는 바람에 딱딱한 이가 서로 맞닿았다. 다행히 입술을 다치진 않았지만, 그는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는 녀석의 부드러운 촉감에 취해 자그마한 뒤통수를 지그시 누르고 몸을 더욱더 가까이 붙였다.
남제화는 사내의 입술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게 너무 불가사의했다. 녀석의 숨결에서는 옅은 향기까지 났다. 그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는 드디어 어떤 문턱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색함이 전혀 없었고, 그저 놀라움과 기쁨만 가득할 뿐이었다.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마음을 크게 먹고 힘껏 위지불이의 이빨 사이를 비틀어 열었다.
이건 그들의 첫 입맞춤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위지불이가 황제를 독살하기 위해 입을 맞춘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는 임무와 사명이 있었기에 부끄러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하자 서로에 대한 갈망이 본능처럼 일어났다. 두 사람은 천천히 입맛을 다시며 아직 낯선 두근거림과 설렘을 음미했다.
위지불이는 낮게 탄식했다. 나른한 입맞춤은 온몸이 물렁물렁해질 정도로 좋았다. 머리가 아찔하고 행복했다. 열일곱 해를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제화를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입맞춤에 사로잡히면 넋이 나가고 감정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남제화의 손이 그녀의 허리춤에 닿더니 다급하게 입구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위지불이는 벌떡 일어났다.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남제화는 어리둥절한 표정과 함께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불이, 너…….”
위지불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몸을 돌려 밖으로 도망쳤다. 남제화는 쫓아가지 않고 도망가는 야윈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눈길을 돌리던 중, 무의식적으로 탁자 위에 놓인 구리 거울에 시선이 스쳤다.
구리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입꼬리는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조금 멍청하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또 기세등등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비비면서 낮게 탄식했다.
“저 웬수!”
젊은 시절, 그는 한 여자를 사랑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막일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다. 그녀 곁을 지키면서 언제든 그녀를 볼 수 있기만 바랐다. 그는 그것이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열정을 그녀에게 모두 쏟았기에 그는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사랑이란 기대 없이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며 죽음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십여 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후, 고목이 봄을 맞았다. 열일곱 살의 소년을 사랑하게 된 것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평생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쟁취해 본 적이 없는 그는 위지불이를 꼭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위지불이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가슴을 움켜쥐며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들뜬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다가는 들통나겠어. 너무 위험해!’
방금 남제화의 손이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갔다면 모든 게 다 들통났을 것이다. 그녀는 문 앞으로 걸어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밖은 고요했다.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가슴을 동여매고 있던 천을 풀었다. 흐느적거리며 침대에 쓰러진 그녀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내일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날 밤, 위지불이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남제화의 뜨거운 입술과 따뜻한 호흡, 그리고 그녀를 강하게 움켜쥐던 팔…….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이튿날, 그녀는 매우 늦게 일어났다. 준비를 끝내고 방문을 열자 멀지 않은 창가 앞에 남제화가 서 있었다. 위지불이를 바라보던 그는 막상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위지불이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그에게 걸어갔다. 위지불이가 그에게 두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폐하, 여기서 뭐 하세요?”
“아무것도.”
남제화가 대답했다.
“짐은 그저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아, 그래요? 그럼, 천천히 보세요.”
그녀가 막 걸음을 돌릴 때 뒤에서 강한 힘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넓은 남자의 품에 쏙 빨려들어 갔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라 낮게 속삭였다.
“폐하! 이게 무슨 짓이에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해요?”
“아무도 없다. 짐이 모두 물러나라고 했다.”
그는 그녀를 풀어 주고는 그녀의 입술만 응시했다.
“어젯밤에는 왜 그렇게 도망갔느냐?”
“졸려서 자고 싶었어요.”
그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짐이 너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잠을 자고 싶었단 말이냐?”
“…….”
남제화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금 무안했다.
“짐도 이쪽 방면으로는 경험이 없어서… 아님 다시 해볼 테냐?”
이번에는 위지불이가 의아했다.
“폐하께서는… 그간 입을 맞춘 적이 없으세요?”
“없다.”
“거짓말, 예전에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사랑했지만, 그런 걸 하진 않았다. 그 사람은 짐을 사랑하지 않았지.”
위지불이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남제화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은 있었지만, 입을 맞춘 적은 없었다. 그녀와 한 것이 그의 첫 입맞춤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정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남제화의 입술을 쪼듯이 부딪치고는 몸을 돌려 도망갔다. 잠자리가 수면을 건드리듯이 한 입맞춤에 어떻게 성이 차겠는가? 사악한 미소를 지은 남제화는 긴 팔을 쭉 뻗어서 그녀를 창틀에 밀어붙였다.
“불을 붙이고 도망가려고 하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잘못했어요.”
위지불이가 용서를 빌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요.”
“여기엔 너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누군가 감히 이 모습을 보거든 짐이 그자의 눈동자를 파낼 것이다.”
위지불이가 더 말하기도 전에 남제화는 자신의 입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젯밤 자신과의 입맞춤에 졸음이 쏟아졌다니. 어떻게든 그 인상을 바꿔야 했다. 그와의 입맞춤은 지루해선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