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819)화 (818/1,192)

제819화

“네가 알고 있다고?”

위지경용은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알고 있어요. 일단 칼부터 내려놓아요.”

위지경용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불이, 날 속여서 칼을 내려놓게 하려는 거지?”

위지불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폐하, 뭐 하러 더 기다리세요?”

그 찰나 별안간 위지경용의 손목이 저릿하더니 그의 칼이 남제화에게 넘어가 있었다. 위지경용의 반응도 느리지 않았다. 곧바로 몸을 비틀어 간격을 벌린 위지경용은 남제화와 싸울 태세를 취했다. 위지불이가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셋째 형님, 아직도 모르겠어요? 형님은 폐하를 어찌하지 못해요. 폐하께서 가만히 앉아 있었던 건 형님께서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방금 남제화의 동작은 너무 빨라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자신은 남제화의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위지경용도 알고 있었다.

“저기로 가요.”

위지불이가 그를 밀쳤다.

“내 방으로 가요. 내가 알려 줄 테니까.”

하지만 위지경용은 가려고 하지 않았다.

“네 방에 가서 뭘 하려고? 그냥 여기서 말하거라.”

위지불이는 좀 난처한 듯 남제화를 힐끔 쳐다봤다. 결국 그녀는 위지경용에게 사납게 소리쳤다.

“가자고 하면 제발 말 좀 들어요! 이러다 궁 안의 시위들이 들이닥치면 저도 어쩔 도리가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위지경용을 힘껏 잡아당겼다. 위지경용은 순간 몸을 비틀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니 그도 어쩔 줄 몰랐다. 여기서 더 이상 소란을 피워 봤자 십중팔구 좋지 않은 결과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잠시 위지불이의 말을 들어 보는 게 나았다.

위지불이는 위지경용을 끌고 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문을 꼭 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 오라버니, 일단 앉으세요.”

위지경용은 방 안을 훑어보면서 탁자에 앉았고, 위지불이는 물을 한 잔 건넸다.

“물부터 마셔요.”

위지경용은 물 잔을 건네받았다.

“빨리 말해 보아라. 황제가 네게 왜 이렇게 잘해 준단 말이냐?”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위지불이는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좋아하십니다.”

그녀의 말에 위지경용은 방금 머금었던 물을 푸 하고 내뿜었다. 그런 의심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사실을 듣게 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가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궁에 들어와 위지불이의 몸에 심은 고충을 없애 그녀를 동월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비록 여제보다 기량이 떨어져 원수를 갚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위지 가문과 남원 황실이 인척 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공자의 원수를 갚을 수 없는 것도 불충인데, 어찌 원수의 아들에게 몸을 맡길 수 있겠는가.

위지불이는 그가 크게 놀라는 것을 보고 조금 난감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셋째 오라버니, 나 욕할 거예요?”

그녀를 혼내야 마땅했지만 막상 겁먹은 누이를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이, 너도 황상을 좋아하느냐?”

위지불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정신이 있는 것이냐? 남원 황실은 우리 위지 집안의 원수이다. 공자의 죽음이 설사 남제화와는 무관하다고 해도 원수의 아들과 가까이 지낼 수는 없어!”

“여제는 여제이고, 폐하는 폐하잖아요. 게다가 모자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아요. 여제는 계속 감옥에 갇혀 있다고요.”

“여제가 정말 감옥에 갇혔다면 어떻게 너에게 고충을 심은 것이냐?”

“그건 제가 부주의해서 그런 거예요.”

위지불이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도 그 일로 궁녀 두 명의 혀를 베었어요. 저한테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요. 그 궁녀들 덕분에 제가 여제의 소재를 알게 되었거든요.”

“설마 황상이 일부러 꾸민 덫은 아니겠지? 여제 앞에 너를 유인하려고 일부러 계략을 세운 것 아니더냐?”

“제가 뭐 그리 중요한 인물이라고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겠어요? 게다가 저를 죽이는데 뭐 하러 여제의 손까지 빌리겠어요. 폐하가 독을 쓰면 되죠.”

위지경용도 그녀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너무 속상했다.

“불이, 이 오라비의 말을 잘 듣거라. 넌 남원 황제를 좋아하면 안 된다. 이 일이 동월에 전해진다면 네 부모님은 얼굴을 들지 못하실 거야.”

“전해지지 않을 거예요.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 부모님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부모님을 언급하자 위지불이의 목이 잠겼다.

“저는 불효녀예요. 만약 셋째 오라버니께서 생전에 동월로 돌아가게 되면 저 대신 부모님을 좀 돌봐 주세요.”

“불이.”

위지경용은 노파심에 거듭 충고했다.

“어찌 되었든, 원수의 아들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셋째 오라버니, 지금 올케언니를 버리라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위지경용은 그 물음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한향을 깊이 사랑했고, 그녀를 위해 목숨도 걸 수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도 올케언니를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저도 폐하를 떠날 수 없어요.”

출가도 안 한 어린 처녀가 하기엔 뻔뻔한 소리였지만, 위지불이는 제 결심을 오라버니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불이, 너의 올케언니는 평민 처녀일 뿐이다. 하지만, 황제는…….”

“난 이곳을 떠나면 죽어요. 셋째 오라버니는 날 죽일 작정이에요?”

이번에는 위지경용도 할 말을 잃었다. 만일 하늘 아래 불이를 구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남제화뿐일 것이다. 그 어떤 일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위지경용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셋째 오라비는 당연히 너를 죽이고 싶지 않지. 하지만, 불이야… 잘 생각해야 한다. 황제에게는 이미 세 명의 공주가 있어. 공주들은 신분이 귀하고 각자 부족의 후원을 받고 있단다. 네가 황제 곁에 있으면 분명 억울한 일을 당할 것이다. 셋째 오라비는 그것이 걱정인데…….”

“셋째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는 내가 여자인 줄 몰라요.”

위지경용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말인즉슨, 폐하께서 남색가란 말이냐?”

위지불이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위지경용은 분노를 쏟아 냈다.

“너 정신이 있는 것이냐? 어떻게 남색가를 좋아할 수 있어? 불이, 황제는 네가 남자인 줄 알고 널 좋아했다. 나중에 네가 여인인 걸 알게 된다면 군주를 기만한 죄 하나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후환을 겪을 것이야.”

위지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채지 못하게 할 거예요.”

위지경용은 탁자를 내리쳤다.

“네가 완전히 홀려 제정신이 아니구나! 위지불이, 남자를 위해 남자인 척하다니. 너의 존엄은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

위지불이는 목을 꼿꼿이 세웠다.

“어쨌든 전 폐하가 좋아요. 항상 같이 있고 싶어요.”

위지경용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아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정말 너 때문에 내가 화병으로 죽겠구나.”

“셋째 오라버니, 저 때문에 화난 거 알아요. 저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고충에 중독되고 나서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어요. 어차피 내 목숨이 남의 손에 달린 이상,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신세잖아요? 그러니 하루하루 내 마음 가는 대로 살려고요.

전 폐하를 좋아해요. 아마 오래전부터 좋아했을 거예요. 그동안은 서로의 신분 때문에 마음을 억누르기만 했어요. 하지만 폐하가 제게 주는 마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요. 남은 생을 그와 함께하고 싶어요.”

위지경용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자못 감동했다. 그도 누이동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이, 네가 여인의 몸인 걸 폐하께서 알게 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생각해 봤느냐? 그가 불같이 화를 내며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거예요.”

위지불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쩌면 제가 폐하를 보통 남자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죠.”

* * *

혼자 정전에 앉아 있던 남제화는 초조한 마음에 주위를 서성거렸다. 위지불이가 셋째 형에게 무어라 해명할까. 혹 진실을 듣는다면 아연실색할 위지경용의 얼굴이 꽤 볼 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건 정상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두 사람이 나오지 않자 그는 뒷짐을 지고 전각 입구를 서성였다. 그리곤 조용히 문을 살짝 열었다. 밖에는 전각을 에워싼 시위대와 겁에 질린 강암룡이 보였다.

황제의 얼굴을 본 강암룡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가 폐하를 부르려는데 남제화가 그를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는 강암룡을 곁으로 불러서 몇 마디 속삭였다. 강암룡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짓을 해서 시위대를 해산했다.

남제화는 다시 전각 문을 닫고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위지불이와 위지경용이 나왔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위지불이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그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뒤따라오는 위지경용의 안색은 잔뜩 굳어져 상심한 모습이었다.

“폐하.”

위지불이는 조용히 예를 표하다 슬쩍 위지경용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위지경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굳은 채 서 있었다. 위지불이는 옆에 서서 슬쩍 웃었다.

“폐하, 제 셋째 형님이 아까는 술에 취해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술이 깼고 잘못을 알았으니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남제화는 곧바로 위지경용을 바라봤다. 그는 차갑게 눈을 흘기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남제화는 위지불이가 그들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니 짐도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겠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위지불이가 또다시 위지경용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그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폐하,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셋째 형님은 이제 출궁해야 합니다.”

남제화는 그래도 황제였다. 한 번은 용서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거듭 무례하게 구는 건 봐줄 수 없었다.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말할 입이 없느냐?”

똑똑한 사내는 뻔히 보이는 손해를 피해 갈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위지경용의 마음은 몹시 답답했다. 황제가 그의 누이를 남자라고 생각해 좋아하고 못난 누이는 남장을 하고 그를 받아들이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가 끝내 입을 열었지만 태도는 여전히 불손했다.

“폐하의 환대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떠난다고 말했지만 그는 정작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 침묵에 빠져 있던 위지경용은 마침내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불이를 잘 보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아직 어려 철이 없으니 폐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불이를… 진정으로 아끼신다면… 그건… 너무 서두르지 않으시는 게… 폐하께서는 소인의 뜻을 잘 아시겠지요?”

황제가 당장이라도 위지불이에게 승은을 내릴까 봐 그는 몹시 걱정이었다. 일단 옷을 벗겨 여자임이 들통나면 황제는 분노에 휩싸일 것이고, 위지불이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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