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7화
“누가 그래요?”
위지불이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주 젊으신 걸요. 스물 언저리 정도일 거예요.”
“아닐걸. 황제로 즉위했을 때 이미 스물이 넘어 있었는걸? 지금은 거기서 십여 년이 더 흘렀으니…….”
그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했다.
“어쨌든 서른이 훌쩍 넘었을 거다. 나보다도 많아.”
위지불이가 그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거무튀튀한 피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누런 이가 툭 튀어나온 사람이었다. 이런 얼굴로 감히 황제보다 자신이 어리다고 하다니… 황제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수준이었다.
“분명 잘못 알고 있는 걸 거예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황제는 정말 젊으세요. 아주 많이 잘생기셨고요.”
그 실랑이를 듣고 있던 위지경용은 눈살을 찌푸렸다. 위지불이와 언쟁을 하는 이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래도. 황제가 몸보신을 잘해서 젊어 보이는 것뿐이야.”
위지불이는 더 이상 그자의 헛소리를 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남제화가 조각한 말과 강아지, 닭 목각 인형을 나눠 주었다. 누군가 목각 인형을 들고 유심히 살피더니 혀를 내둘렀다.
“궁 안의 물건은 역시 정교하구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표현하다니… 정말 대단하군.”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칭찬하는 말에 서둘러 대꾸했다.
“이건 황제께서 아이들을 위해 직접 조각한 거예요. 팔다리 부러뜨리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부모들은 서둘러 아이들의 손에 있던 인형을 빼앗아 갔다. 장난감이 뺏긴 아이들은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이 아버지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열넷째야, 어째서 황제가 만드신 거라고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냐. 이걸 어찌 아이들에게 줄 수 있겠어. 고이 모셔 놔야지.”
“맞네, 맞아. 집에다 모셔 두어야지. 부처님상 옆에 모셔야겠어.”
다들 소맷자락으로 목각 인형을 깨끗이 닦더니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마을 사람들이 황제를 이리 존경하다니……. 위지불이는 그 모습에 저절로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반면 위지경용의 미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산허리를 향해 기울어졌다. 위지경용은 위지불이를 배웅하며 태연한 척 물었다.
“불이야, 황제와 사이가 제법 좋아 보이더구나.”
위지불이는 조금 뒤가 켕겼다.
“네, 저번에도 말한 것처럼 좋은 친구 사이예요.”
“어쩐지 황제가 네 체면을 신경 써 주는 것 같더구나. 지난 일도 더는 추궁하지 않고.”
위지경용이 말했다.
“불이야, 황궁은 예쁘냐?”
“엄청 예쁘죠.”
위지불이가 말했다.
“휘황찬란한 궁전과 무성한 숲, 넓은 풀밭도 있어요. 또 두 사람이 두 팔 벌려도 다 못 끌어안는 보리수나무도 있고요. 꽃은 어딜 가나 볼 수 있고, 공작이랑 사슴도 있고요. 숲속에는 사자랑 호랑이도 있어요. 자주 나오진 않지만요. 궁이 워낙 커서 꽤 오래 머물렀는데 아직 다 못 가 본 곳들도 있는 걸요…….”
그녀는 신이 나서 손짓을 해가며 설명했다. 생글생글 웃는 게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불이.”
위지경용이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이 셋째 오라비를 도와줄 수 있느냐?”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얼마든 지요. 어서 말해 봐요.”
“황궁을 구경해 보고 싶구나.”
“그건…….”
“안 될까?”
“오라버니, 왜 궁을 들어가려고 하세요? 제가 오라버니면 평생 남원 황궁에 가는 날이 없기만 바랄 텐데요.”
“겁낼 게 무엇이냐. 황제가 옛일은 추궁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난번엔 너무 어두운 밤에 가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러니 네가 이 오라비를 데리고 구경 좀 시켜 주렴.”
“알겠어요.”
위지경용의 부탁이니 위지불이도 단칼에 거절하긴 어려웠다.
“돌아가서 폐하께 먼저 여쭤볼게요. 폐하께서 허락하시면 오라버니를 데리러 올게요.”
* * *
궁으로 돌아온 위지불이는 남제화에게 셋째 형이 궁전을 구경하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했다. 지금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승낙했다.
“오라고 해라. 마침 잘 되었구나. 짐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위지불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폐하께서 제 셋째 형님을 왜 만나고 싶으신데요?”
남제화는 잔뜩 긴장한 위지불이를 보며 웃었다.
“긴장하지 마라. 그는 남원에 있는 너의 유일한 혈육이 아니냐? 네가 짐의 옆에 왔으니 당연히 너의 집안사람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느냐?”
위지불이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갔다는 거예요? 전 남자라고요.”
“짐도 안다.”
그는 위지불이의 손을 끌어당겨 쓰다듬었다.
“짐에게 온 일 때문에 너 또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
상처를 받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그러게… 왜 남자만 좋아해서는.
황제의 승낙이 떨어지자 다음날 위지불이는 위지경용을 데리러 갔다. 신이 난 그녀는 얼른 채자리로 달려가 셋째 오라버니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위지경용은 그녀를 끌어당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조용히 하거라. 나 혼자 갈 거다.”
위지불이는 의아했다.
“왜요? 올케언니랑 어머니는 안 가요?”
“집에 남아서 아이를 돌볼 거다.”
“조카도 함께 데려가야죠.”
“그건 안 될 일이다. 그곳은 황궁이다. 혹여 아이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이 오라비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리 없어요. 폐하는 성격이 좋아요. 어쩌면 아이들을 좋아할지도 몰라요.”
“불이.”
위지경용이 정색했다.
“너와 황제는 친구이지만 나와 그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비록 이 오라비가 복수는 포기했지만, 위지 가문과 남원의 황실은 아직도 원수 사이가 아니더냐? 우리가 조심하는 게 좋다.”
위지불이는 셋째 오라버니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그럼 이번엔 오라버니가 먼저 입궁해서 구경해요. 올케언니랑 어머니는 나중에 제가 또 데리고 갈게요.”
한향은 아래층에서 얘기 중인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위지경용에게 말했다.
“경용, 어째서 열넷째를 데리고 들어오지 않고요? 앉아서 얘기 나누세요.”
“바로 나갈 거요. 열넷째랑 장터에 좀 다녀오겠소. 저자 구경도 하고 식사도 하고 들어오겠소.”
그는 곧장 위지불이를 끌고 나가 버렸다. 위지불이가 물었다.
“입궁하는 걸 왜 올케언니에게 숨기는 거예요?”
“지금은 알리지 않는 게 좋겠구나. 아마 무서워할 거야. 돌아와서 알려 주는 게 더 나아.”
“올케언니가 무서워해요? 왜요?”
“남원 백성들은 황제를 신처럼 떠받들지. 황제의 의장이 지나가는 날이면 이곳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한단다. 감히 고개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만약 내가 황제를 만나러 간다는 걸 알면 집에서 안절부절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위지불이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궁에 들어간 위지경용은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황제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게나. 이리 와서 여기 앉도록.”
위지불이는 얼른 위지경용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그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황제가 성격 좋은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어서 가서 앉아요.”
황제가 위지경용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자네를 기억하고 있다.”
위지경용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중상을 당했던 것을 기억한다. 중상을 입고도 도망쳐 버렸지. 짐의 앞에서 도망친 자객은 자네가 유일해.”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에 위지불이의 마음 한편이 섬뜩해졌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위지불이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빠져나가지 못한… 자객들은 다 죽였어요?”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짐은 그들이 왜 왔는지 알고 있다. 짐은 그 당시 위지문우의 업적을 인정했기에 위지 가문 사람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어. 너의 셋째 형을 제외한 자객들은 모두 풀어 줬다.”
위지불이는 말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들은 창피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너의 셋째 형처럼 남원에 정착했을 수도 있고.”
계속 침묵하고 있던 위지경용이 물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위지 가문 사람들을 죽이신 적이 없습니까?”
남제화가 위지불이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짐은 불이를 속이지 않는다.”
위지경용은 남제화를 향해 공수한 손을 들어 올렸다.
“가족들을 죽이지 않은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때 네가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짐은 너를 치료한 후에 풀어 주었을 것이다.”
“제가 아둔했습니다.”
남제화는 손사래를 쳤다.
“예전의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지. 황궁은 넓지만, 몹시 쓸쓸해. 자네는 남원에 있는 불이의 유일한 가족이니 앞으로 자주 왕래하길 바라네.
짐이 보니,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불이가 짐처럼 친한 형제자매 하나 없는 외톨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다행히도 불이가 짐과 인연이 닿아서 함께 있어 주니, 궁에서의 나날들이 그리 쓸쓸하지 않다네.”
위지경용이 옆을 힐끗 보니 어린 누이는 남제화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커져 가는 불안을 겨우 삼켰다.
“폐하를 모시게 된 불이는 참 복이 많은 아입니다. 하나 어린 제 동생이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힐까 걱정입니다. 부디 폐하께서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남제화는 하하 소리 내서 웃었다.
“자네는 동생을 잘 아는군. 녀석이 한 번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면 황제인 짐도 어쩔 바를 모르겠네. 지난번에는 몰래 궁을 빠져나가 하마터면 짐이 타곤성을 발칵 뒤집을 뻔했다네. 결국 영사를 보내서 찾아왔지.”
위지경용은 불이를 꾸짖는 척했다.
“열넷째, 앞으로 절대 폐하께 성질을 부리면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위지불이는 가볍게 웃었다.
“알겠어요.”
위지불이가 기뻐한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이 기쁘면 남제화도 기뻤다. 그는 연회를 베풀어서 위지경용을 후하게 대접했다.
남자들이 함께 있으면 당연히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위지경용은 주량이 상당했다. 남제화는 모처럼 좋은 술 상대를 만나 즐거웠다. 벌컥벌컥 마시기도 하고, 너 한 잔 나 한 잔 대작을 나누기도 했다. 옆에서 구경하는 위지불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셋째 형님, 조금만 마셔요. 좀 있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잖아요.”
“괜찮아.”
남제화는 취기로 흐려진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취하면 궁에서 쉬었다 가면 된다. 설마 궁에 잘 곳이 없겠느냐?”
강암룡은 줄곧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 남제화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폐하, 이미 취하셨으니 이제 그만 드시지요.”
“이깟 술에 짐이 취하겠느냐.”
남제화는 빈 잔을 탁자에 밀어 놓았다.
“가득 채워라. 짐은 경용과 통쾌하게 마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