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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16)화 (815/1,192)

제816화

위지불이는 옥수수 알을 두 줌 집어 풀밭의 공작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옆에 있던 남제화는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붙어 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곁눈으로 그를 힐끗거리던 위지불이는 얼굴이 더 빨개졌다.

“폐하, 왜 그렇게 빤히 보시는 거예요?”

“불이.”

남제화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넌, 어찌 생각하느냐?”

“전…….”

위지불이는 손을 펼쳐 공작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공작 두 마리가 다투다 그녀의 손을 힘껏 쪼았다. 위지불이는 “아잇!”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남제화가 공작을 걷어차며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어디 보자, 다친 것이냐?”

작은 손엔 붉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위지불이는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게 좋았다. 부모님도 이렇게까지 그녀를 걱정하진 않았다. 부모님은 그녀가 넘어지거나 다칠 때면 피부가 두꺼워서 괜찮다고 할 뿐이었다. 남제화는 그녀의 손을 유심히 살피며 가볍게 입김을 불어 주었다.

“아프냐?”

위지불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 손을 빼냈다.

“이제 안 아파요.”

“불이.”

“네.”

“방금 짐이 물어본 건…….”

“폐하.”

위지불이가 남자처럼 뒷짐을 지고 가슴을 활짝 폈다. 하지만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진 못했다.

“폐하의 과분한 총애를 받게 되어 저 불이는… 정말 영광스러워요.”

“하면 너도…….”

“우린 계속 예전처럼 지내요. 제일 좋은 친구로요.”

“하지만, 짐은 네게…….”

“저도 알아요.”

위지불이의 목소리가 천천히 낮아졌다.

“전 페하께 반감도, 거부감도 없어요…….”

위지불이의 마음을 들은 남제화는 크게 기뻐했다. 그는 위지불이의 어깨를 감쌌다.

“불이…….”

그의 목소리는 낮고 먹먹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절로 저릿저릿했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만 더 들면 서로 입술이 닿을 만큼이나 가까웠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불이!”

위지불이는 곧장 황제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아운소가 신이 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는 황제에게 먼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위지불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새로 만든 호로사인데, 한번 불어 보겠어요?”

위지불이는 좋다고 대꾸하고는 남제화에게 말했다.

“폐하, 전 공주와…….”

남제화가 얼굴을 굳히더니 아운소에게 말했다.

“공주, 짐이 그간 공주의 체면을 신경 쓰느라 하지 못한 말이 있소. 남원의 민풍이 개방적이라 자신이 반려자를 고를 수 있다 한들, 공주는 짐의 후궁으로 입궁한 것이 아니오? 어찌 짐 앞에서 다른 사내와 이리 가까이 지낸단 말이오? 짐이 참다 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오. 앞으로 다시는 불이를 찾아오지 마시오.”

남제화는 그대로 위지불이를 끌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놀란 표정을 한 아운소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와 위지불이 사이는 궁 안의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간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더니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황제가 위지불이에게 질투라도 하는 것인가? 설마… 황제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여인이 자신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쳐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연적을 데리고 자리를 뜨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마땅히 그녀를 데리고 가야지. 황제의 눈빛은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차가웠다. 예사롭지 않은 그 눈빛은 꼭 그녀가 연적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아운소는 위지불이를 끌고 멀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위지불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황제의 등쌀에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위지불이는 결국 황제의 손을 뿌리쳤다. 황제는 기분이 조금 나쁜 것 같았지만 화를 내진 않았다.

“폐하, 이러시면 안 돼요.”

고백하자마자 이렇게 포악하게 굴어선 안 되었다.

“짐이 하면 안 되는 게 무엇인데?”

위지불이는 꼭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았다. 남제화는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 불쾌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고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위지불이는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이 한 마디 뱉었다.

“저도 체면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남제화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내에게 사랑 받는 건 위지불이에게 있어서 그리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녀석도 체면이 있을 터.

남제화는 씁쓸한 감정이 몰려왔다. 자신이 위지불이를 난처하게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위지불이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난처하게 만들 순 없었다.

“그래, 알겠다.”

그는 자발적으로 위지불이와 거리를 벌렸다.

“걱정 말거라. 괜히 시답잖은 말이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궁 안의 사람들은 이날부터 남제화가 곁에 두는 사람이 고여아에서 위지불이로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세 공주가 오기 전에도 그의 곁을 위지불이가 지켰기에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사담으로나마 황제의 마음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쑥덕댈 뿐이었다.

* * *

그날 밤, 백화전으로 돌아온 고여아는 진열장에 놓인 도자기를 전부 깨뜨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옥합은 침대 옆에 서서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여아가 말한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게 이런 말인 줄은 옥합도 몰랐다. 몰래 황제의 침대에 올라가다니… 참나! 담도 크지. 여긴 마온극 부락이 아니고 남원의 황궁인 것을.

“공주.”

그녀가 허리를 숙여 고여아를 타일렀다.

“울지 마시어요. 눈이 부으면 보기 좋지 않습니다.”

고여아가 침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보기 안 좋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폐하는 날 싫어하신다.”

“폐하께서 공주를 싫어하시다니요. 나머지 두 공주에 비해 공주께서 폐하 곁에 계신 시간이 가장 긴 걸요. 소인은 폐하께서 분명 공주를 중시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중시는 개뿔!”

고여아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

“폐하께선 날 안고서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셨다.”

옥합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누구 이름을 부르셨습니까?”

고여아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남제화가 아운소나 나사 이름을 불렀다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했겠지만… 황제는 뜻밖에도 위지불이를 불렀다. 그 멍청한 동월 자식! 무려 마온극 부족의 공주가 고작 동월놈에게 진 것이다. 그렇다고 혼자만 알고 있자니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답답해하다가 결국 그 이름을 꺼냈다.

“불이를 부르셨다.”

* * *

위지불이의 체면을 위해 남제화는 그와의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을 땐 어김없이 친밀하게 굴었다. 그래 봤자 손을 잡는 게 다였지만.

자신이 사내를 좋아한다는 건 인정했지만, 사내와 입을 맞추는 건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또 그는 좀 더 친밀한 것들을 좋아했다. 저번엔 위지불이를 벽 앞에 세워 놓은 채 얼굴을 보지 않고 그를 여인으로 대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위지불이는 버럭 화를 내지 않았는가. 만약 또 억지로 밀어붙인다면 분명 화를 내겠지.

성질을 부릴 땐 위지불이도 퍽 무서웠다. 지난번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기에 남제화는 조용히 손만 잡을 뿐이었다.

남제화는 여전히 세 공주와 왕래를 하긴 했지만, 매번 위지불이를 함께 데려갔다. 함께 꽃도 감상하고 가무도 즐기고 다과를 나눴다. 세 공주는 별이 달을 에워싸듯 황제와 위지불이를 둘러싼 채 화목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운소는 지난번 황제에게 꾸짖음을 당한 뒤로, 위지불이와 교류하지 못한 채 황제 곁을 지켰다.

고여아는 웬일인지 그날 밤 일로 위지불이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고여아 또한 자존심 세고 도도한 성격이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남제화가 추궁하진 않았지만 고여아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우울해했다.

다른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매의 눈이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와 얘기할 때 목소리가 한층 더 나긋해졌고 표정도 유난히 다정했다. 공주들과 담소를 나눌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디 두고 보라지. 위지불이, 누가 이대로 넘어갈 줄 알고?

시간은 금방 흘러 며칠이 지났다. 위지불이는 남제화에게 셋째 형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남제화는 보내기 싫은 마음을 꾹 누르고 오히려 몇 가지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 그리곤 일찍 돌아오라며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사랑에 푹 빠진 황제를 보자 모든 게 다 걱정이었다. 그는 위지불이의 안전을 위해 궁을 암암리에 호위를 붙여 주었다.

위지불이는 묵직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채자리에 도착했다.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이 소리쳤다.

“열넷째야, 셋째 형님을 보러 왔구나!”

“네.”

위지불이가 호탕하게 대꾸했다.

“이따가 다들 집으로 오세요. 맛있는 걸 가져왔거든요.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나눠 주세요.”

소식을 들은 위지경용이 다락집에서 달려 나와 그녀를 반겼다.

“불이.”

그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궁에서 별 탈 없었느냐?”

“아주 잘 지냈는걸요.”

위지불이가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형님, 어서 이것 좀 받아요. 무거워 죽겠어요.”

위지경용이 물었다.

“또 무얼 가져온 것이냐?”

위지불이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금화는 가져오지 않았어요. 형님이 금화는 싫다면서요.”

위지경용은 보따리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매번 이런 걸 가져올 필요 없다. 이렇게 무거운 걸 너 같은 여…….”

위지불이의 눈빛에 그가 서둘러 입을 닫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락집 위층에서 한향이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넷째, 집 앞까지 왔는데, 빨리 올라오지 않고요? 경용, 어서 열넷째랑 올라와요.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좀 쉬어야죠.”

위지경용은 서둘러 위지불이와 위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자리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방 안이 가득 찼다. 한향은 위지불이가 가져온 맛있는 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며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했고, 어른들은 목청을 높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옆에서 들으면 꼭 싸우는 것처럼 시끄럽고 떠들썩했다. 위지불이는 한향의 어머니가 만든 차가운 팥소를 먹으면서 다른 이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퍽 재미있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열넷째야, 궁에서 황제도 뵈었느냐? 황제는 어찌 생기셨더냐?”

위지불이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키가 아주 크시고 몸도 탄탄하세요. 이목구비가 잘생겨 외모가 뛰어나세요. 성격이 엄청 좋은 분이에요.”

누군가 의심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잘생겼다고? 황제는 좀 늙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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