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5화
넋을 놓고 있는데 허리춤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그녀의 요대를 풀고 바지를 벗기는 중이었다. 깜짝 놀란 위지불이는 죽을힘을 다해 바지를 꼭 붙잡았다.
“폐하, 안 돼요! 그만 해요. 미쳤어요? 이런 개자식…….”
등 뒤에 서 있는 사내는 불덩이처럼 그녀의 등을 뜨겁게 달구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는 그녀의 손을 빼내며 실랑이를 벌였다. 그가 애원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불이, 겁내지 말거라. 살살 하마…….”
위지불이는 부끄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녀는 두 손을 뒤로 뻗어 남제화의 허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그제야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무릎을 올려 힘껏 그를 찼다. 남제화는 아랫배를 움켜쥔 채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고 부릅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이.”
위지불이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자 흉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부르지 말아요.”
엄청난 통증에 남제화도 조금은 이성을 되찾았다.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는 사실에 그 역시 믿기지 않은 표정을 했다. 머리가 복잡했던 위지불이는 대체 무슨 일이 난 건지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제화가 조금은 가엾기도 했다.
“어서 가요.”
남제화가 애원했다.
“불이.”
위지불이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라냈다.
“가라니까요!”
남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웅얼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불이…….”
위지불이는 다시 한번 그를 걷어찼다.
“꺼져요. 가라고요.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요!”
그녀는 꼭 새끼 원숭이처럼 성질을 냈다. 위지불이의 주먹과 발에 몇 차례 얻어맞은 남제화는 결국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밖으로 나온 남제화는 괴로움에 이마를 두드렸다. 그가 미향에 중독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위지불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능력으론 충분히 미향을 해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그릇된 힘을 빌려 위지불이의 방으로 달려가 마음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었다. 그간 너무너무 오랜 시간 동안 억눌러 왔기 때문이다.
가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조차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 역시 여인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앞으로 십여 년간 고독한 삶을 살아가며 남은 생을 이렇게 마감하리라 생각했는데… 고목이 봄을 맞듯 한 사내를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위지불이는 그에게 개자식이라며 욕을 퍼부었다. 남제화가 느끼기에도 자신은 개자식이었다. 체면도 없이 어쩌다 사내를 좋아하게 되어서는, 조상들을 뵐 낯이 없었다. 참고 또 참고, 어떻게든 이 비밀을 가슴 속에 묻어보려 했건만. 결국 참지 못했다. 미향이 작용하자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수준이었다. 황제씩이나 돼서 얻어맞고 다니다니. 밖으로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 낯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강암룡이 유령처럼 앞에 나타났다.
“폐하.”
남제화는 곧장 허리를 펴고 담담히 물었다.
“이곳엔 무슨 일이냐?”
“소인, 폐하가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뭐가 걱정된단 말이냐?”
남제화가 그를 흘겨보며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암룡은 고개를 돌려 위지불이의 방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 * *
위지불이는 무릎을 감싼 채 탁자 위에 놓인 자그마한 불꽃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남제화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함께 있는 게 좋았고 그가 보이는 관심이 좋았다. 그가 여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기쁨에 잠기기도 했다. 가슴을 짓누르던 엄청난 무게의 돌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의 진짜 신분을 밝힐 기회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새도 없이 세 명의 공주가 입궁했다.
그녀가 여인이란 걸 알게 된다고 한들 바뀌는 것이 있을까? 자신은 동월에서 온 자객일 뿐이었다. 설령 남제화가 그녀를 후궁으로 들인다고 한들 세 여인과 한 사내를 나눠야 했다. 그럴 바엔 사내로 그의 곁에 벗으로 머무는 지금이 더 나았다.
어차피 중독되어 집에도 돌아갈 수 없는 마당이니 남제화가 계속 이렇게 잘해 준다면…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제게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였다. 그녀가 좋다면서, 사내를 좋아한다니. 앞서 내뱉은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지는 뒷말에는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깨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남자의 신분으로 그의 구애를 받아 줘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그에게 솔직히 털어놔야 한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면 남제화는 단념하겠지?
그는 여인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세 공주도 좋아하지 않을 터. 그간 공주들에게 보인 다정함은 세간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막탄이었다. 그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남장한 상태의 그녀였다…….
위지불이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기뻤다가 서글펐다가 슬펐다가 또 조금은 달콤했다. 저 혼자 하는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니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뜨거웠던 그의 몸을 떠올렸다. 거칠게 몰아쉬던 그의 숨결, 그가 내뱉던 말도…….
탁자에 놓인 촛불이 몇 번 일렁이더니 결국 꺼졌다. 방 안은 한순간 암흑이 되었다. 위지불이는 암흑 속에서 홀로 얼굴을 붉히며 입꼬리를 올렸다. 사내가 거칠게 덮치려 드니 꼭 황소 같았다. 그래도 자신이 무술을 배운 사람이니 다행이지,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정말 어찌 되었을까?
밤새 그녀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에 보니 두 눈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세안을 마친 그녀는 몰래 방문을 나섰다.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남제화를 피하려고 했건만…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남제화가 걸어오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꼭 그 꼴이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거리를 유지한 채 멀찍이 서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두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할 말이 있는데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남제화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어제 일로 위지불이가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을까? 이제 다시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 하진 않을까? 죽어도 궁을 나가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기에 우물쭈물 망설이느라 위지불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위지불이는 밤새도록 고민했던 일이 남제화를 보자마자 쉽게 해결되었다. 답은 그녀의 마음이 말해 주었다. 그녀는 그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가 그녀를 남자로 보든, 여자로 보든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를 속이는 건 불편했지만, 애당초 남제화도 여제인 척하지 않았던가. 똑같이 비긴 셈 치면 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다가가 그를 불렀다.
“폐하.”
남제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황급히 대꾸했다.
“어, 그래”
“폐하, 어젯밤 푹 주무시지 못하셨나 봐요. 눈 밑이 시퍼레졌어요.”
“짐은, 잘 못 잤다.”
남제화는 마른침을 삼키며 위지불이의 어두운 눈가를 바라보았다. 그가 떠보듯 물었다.
“너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냐?”
“네, 푹 자지 못했어요.”
뒤이어 또다시 침묵에 잠겼다.
“불이.”
“폐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동시에 불렀다.
“폐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네가… 어젯밤 일로 많이 놀랐을 거란 거 안다. 짐도… 불이, 짐은 널 강요할 생각 없다. 만약 네가 짐을 보기 싫다면… 출궁을… 허락하마.”
오랜 시간 괴로움을 견디느니 한순간 고통을 참는 게 나았다. 그가 위지불이를 좋아하는 만큼 그를 망가뜨릴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폐하께서 그러셨잖아요. 제가 폐하 곁에 있어야 살 수 있다고요.”
“네가 타곤성에서 머물고 있으면 짐이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물론 짐 곁에 있겠다면 더 좋고…….”
“그럼 폐하 곁에 있을래요.”
남제화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불이…….”
위지불이가 얼굴을 붉혔다.
“저는 죽는 게 두려운 사람이거든요. 폐하 곁에 있어야 더 안전할 것 같아요.”
남제화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망울엔 따뜻한 다정함이 스며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얼굴이 붉어지는 어린 자객이 좋았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은가…….
“폐하.”
“불이.”
“폐하.”
“불이.”
“…….”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강암룡은 질겁한 얼굴로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온몸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기둥 뒤로 걸어간 뒤, 힘껏 헛기침을 내뱉었다. 두 사람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동시에 그쪽을 쳐다보았다. 강암룡은 기둥 뒤에 숨어 큰소리로 말했다.
“폐하, 어선을 올렸습니다.”
“불이, 짐과 함께 아침을 들자꾸나.”
“네.”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곁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사실 아직도 마음이 복잡했다. 한 사내에게 사내로서 사랑을 받아야 하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평소와 다르게 식사 시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우스갯소리를 하지도, 서로 음식을 덜어주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를 힐끔거리며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궁녀와 시종들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분위기가 이리 이상하단 말인가.
밥을 다 먹은 뒤, 남제화는 슬쩍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눈치를 살피니 위지불이 또한 그를 따라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한 차례 헛기침하며 물었다.
“불이, 오늘은 공작에게 먹이를 주지 않을 것이냐?”
위지불이는 흠칫 놀라더니 꾸물대며 그를 따라 나왔다.
짝사랑할 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제법 잘 숨기는 편이었다. 남제화가 공주들에게 다정히 대할 때에도 그녀는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방관했다. 하지만 남제화의 마음이 저와 같다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을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남제화가 그녀를 부르기만 해도 그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붉게 물든 위지불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괜히 그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또다시 헛기침한 뒤, 허리를 곧게 펴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