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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14)화 (813/1,192)

제814화

남제화는 기쁜 표정으로 염색된 깃털이 달린 금 화살을 상으로 내렸다. 그가 다정히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역시 마온극 부족의 공주답소. 대단하오.”

황제의 칭찬에 고여아는 감정이 격해졌다. 그녀는 승리의 상징인 금 화살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이내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아운소와 나사의 얼굴을 가볍게 훑었다. 그리고 잊지 않고 위지불이도 훑어보았다.

위지불이는 눈을 희번덕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여아는 미소를 풀고 똑같이 갚아주려 했지만, 위지불이는 아운소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위지불이의 모습에 고여아는 이를 갈았다.

백화전으로 돌아온 고여아는 금 화살을 조심스럽게 벽에 걸어 놓고 옥합에게 말했다.

“보았느냐. 그저 한번 떠보려는 마음에 위지불이에게 화살을 쏘았는데, 폐하께서 날 질책하지 않으셨다. 그간 네가 괜한 걱정을 한 거야.”

옥합이 말했다.

“소인 생각엔 공주께서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공주를 질책하진 않으셨다고 해서 개의치 않아 하시는 건 아닐 겁니다. 어쨌든 불이 공자는 폐하께서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공주께서 공자에게 상처라도 입히셨다면 폐하께서 어찌 나오실지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옥합이 그녀에게 물었다.

“공주, 정말 화전 시합으로 불이 공자를 죽일 생각이셨습니까?”

“그건 아니다. 난 그저 겁을 주려던 것뿐이야.”

고여아가 말했다.

“더구나 폐하께서 계신 이상, 그 애를 죽일 수도 없었다. 화살이 격추되어 떨어지지 않았느냐? 내가 원한 건 나에 대한 폐하의 태도다.”

“폐하께서 공주를 대하는 태도는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고여아가 입술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폐하께선 이미 내게 걸려드셨지.”

옥합이 말했다.

“공주, 쇠뿔도 단김에 빼시는 게 어떠십니까?”

고여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본공주도 그럴 참이었다.”

* * *

그날 밤, 남제화는 궁에 연회를 열고 고여아의 승리를 축하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으로 장식한 덕에 짙은 꽃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기다란 탁자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졌고 은은한 곡조가 허공을 울렸다. 아리따운 무희들은 탁자 앞을 나풀거리며 춤사위를 더했다. 기둥에 걸린 거대한 유리 등잔이 연회장을 밝게 비췄고, 보리수나무 잎은 바닥에 얼룩덜룩한 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위지불이는 저편에 앉아 히히덕거리는 남제화와 고여아를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고여아는 남제화에게 찰싹 달라붙어 교태를 부렸다. 바라만 봐도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붉게 상기된 남제화는 고여아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제대로 보지 않았다면 그가 고여아에게 입을 맞춘다고 착각할 뻔했다.

위지불이는 그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이 남제화에게 독을 먹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은 것도 모자라 그의 입안까지 혀를 뻗었던 그 감촉. 그땐 너무 경황이 없었기에 그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멍하니 넋을 놓는데 남제화가 별안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위지불이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했다. 곁눈으로 남제화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술 냄새와 꽃내음이 뒤섞여 주변 공기를 에워쌌다. 이 냄새에 취하기라도 한 건지 위지불이는 조금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떠들썩한 연회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 술을 제법 마신 남제화는 강암룡의 부축을 받으며 정전으로 향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불이는?”

강암룡이 말했다.

“폐하, 불이 공자는 이미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녀석.”

남제화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투덜댔다.

“짐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돌아가다니. 짐은 그 애가 아직 여기 있는 줄 알았다.”

“폐하, 불이 공자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과음하셨으니 어서 들어가 쉬시지요.”

남제화는 강암룡을 밀치고 비틀거리며 침전으로 향했다.

“짐이 그 애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화살에 쏘였겠지.”

강암룡이 곧장 아부를 떨었다.

“역시 폐하의 실력은 대단하십니다.”

그는 서둘러 황제의 세안과 취침 시중을 들라는 눈빛을 보냈다.

세안을 마친 뒤, 남제화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과음을 한지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궁녀는 침대 맡의 등불을 끈 뒤, 조용히 물러났다. 방 안은 고요했고 그의 눈꺼풀은 몹시 무거웠다.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잠에 들진 않았다. 그때, 장막이 흔들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와 옆자리에 누우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폐하.”

부드러운 손이 그의 몸을 천천히 훑으며 올라왔다. 그리곤 얼굴에 한란 향을 내뿜으며 말했다.

“폐하…….”

남제화는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과 같아 쉽게 떠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보드라운 입술이 그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옅은 숨결을 뱉어 냈다.

“폐하…….”

따스하고 작은 손이 그의 옷 안을 더듬거렸고 나긋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를 불렀다.

“폐하…….”

남제화는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조금 화끈거렸다. 그도 정상적인 남자인지라 여인이 품에 안기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몸을 틀어 여인을 아래로 보낸 그는 어둠속에서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불이…….”

‘불이’라는 이름을 듣자 그의 옷을 벗기던 고여아의 가슴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녀가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전 고여아입니다.”

남제화는 그대로 몸을 비틀어 침대에서 내려왔다. 등불을 켠 그가 반쯤 뜬 흐리멍덩한 눈으로 물었다.

“당신이 어째서 여길?”

고여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존귀한 부족 공주가 한밤중에 제 발로 사내의 침대를 찾아왔으니 민망할 법도 했다. 그녀가 옷깃을 여미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외로워 보이시길래… 폐하를 모시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희미한 등불 아래, 여인의 자태는 갓 핀 복사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흔들리는 눈망울과 살짝 헝클어진 머리카락, 부드러운 피부까지. 이런 여인이 눈앞에 있다면 마다할 사내는 없을 것이다. 남제화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고여아는 뜨거워지는 그의 눈빛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섬섬옥수로 그의 옷자락을 풀었다. 그때 남제화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더니 옷자락을 다시 꽉 여몄다.

“밤이 깊었으니 공주는 그만 돌아가시오. 오늘 밤은 짐도 없던 일로 치겠소.”

고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폐하, 설마 폐하께선 이 고여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남제화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더니 몸을 축 늘어뜨렸다. 얼굴엔 여전히 온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만 돌아가시오. 다른 이가 이 사실을 알았다간 공주의 명성에 그리 좋지 않을 테니.”

“저 고여아는 폐하의 처가 되기 위해 입궁했고, 폐하께서 절 좋아하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한데 어찌 그리 망설이십니까?”

남제화가 코끝을 만지작거렸다.

“고여아, 짐은 다른 이와 침대를 함께 쓰는 걸 싫어하오.”

“방금 폐하께서 불이라고 부르시는 걸 들었습니다. 설마 궁에 난 소문이 진짜입니까? 폐하께선 정말 사내를 좋아하십니까?”

남제화가 얼굴을 굳혔다.

“무엄하다!”

고여아가 애절하게 그를 불렀다.

“폐하.”

“어서 돌아가시오.”

“폐하.”

남제화가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짐이 말했을 텐데, 어서 돌아가라고.”

고여아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장막 너머로 쿵쿵거리며 떠나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천성이 제멋대로인 여인이라, 오늘 일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 따윈 문제 될 게 없었다.

하지만, 남제화는 달랐다. 고여아가 떠나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일단락된 건 아니었다.

고여아는 흥을 돋우기 위해 그에게 미향迷香을 썼다. 그가 이 사실을 자각했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녀가 쓴 건 매우 강력한 미향이었다. 고여아가 계속 꾸물거리던 이유는 아마 미향이 작용하길 기다린 것이리라.

그는 자신이 미향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지금… 온몸의 긴장이 풀리자 뼈마디마다 고통이 끼쳤다.

그는 비틀거리며 위지불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컸는지 위지불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탁자에 놓인 촛불을 켠 위지불이는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무슨 일이에요?”

어딘가 평소와 다른 남제화의 눈은 붉어져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침대를 돌아 한 걸음씩 위지불이에게 다가갔다. 그런 남제화의 모습이 얼마나 무섭게 보이는지 위지불이는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등이 벽에 닿았다.

“폐하, 무, 무얼 하시려고요?”

“불이, 나… 난 말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남제화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그는 별안간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리더니 그녀의 이마를 벽에 붙였다. 그녀의 눈을 볼 수 없게 되니 남제화도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불이.”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내가… 널 속인 게 하나 있다.”

“그게 뭔데요?”

위지불이가 고개를 뒤로 돌리며 말했다.

“이것 좀 놓고, 놓고 나서 말씀하세요.”

“아니, 이렇게 말할 거다.”

네 눈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으니까.

“짐이 널 속였다. 짐은 네가 좋다. 짐은 사내를 좋아해. 짐은 남색가다!”

말을 마친 남제화는 그녀를 벽에 밀친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속 깊이 묻어 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는 위지불이가 그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론 그만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미향은 그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위지불이의 허리를 붙잡고 힘껏 떠받쳤다. 사내와는 난생처음이기에 그도 서툴렀다.

위지불이는 어안이 벙벙했다. 남제화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남색가라니. 사내를 좋아한다고 말하다니. 그 말은 벼락처럼 그녀의 머리 위를 내리쳤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만약 뒷말만 없었어도 그녀는 자신의 진짜 성별을 밝혔을 것이다. 하지만 남제화가 자신을 좋아하는 게 사내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여인임을 알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저를 좋아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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