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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813)화 (812/1,192)

제813화

어느덧 열흘이 넘게 흘렀다. 남제화는 여전히 고여아와 가깝게 지냈고 함께 식사나 산책을 했다. 또 그녀에게 귀중한 선물을 많이 하사한 덕에 다들 고여아가 황후로 낙점됐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고여아는 기고만장한 태도로 옥합에게 말했다.

“폐하는 역시 폐하이시구나. 그런 근시안적인 사람들과는 견줄 수 없다는 걸 잘 아시는 게지. 누가 황후로 적합한지 이미 알고 계시는 게 틀림없어.”

옥합은 그녀처럼 낙관적이지 않았다.

“공주, 군왕의 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없다고 하였지요. 경솔히 방심해선 안 될 것입니다.”

고여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폐하는 성정이 좋으시잖아. 네 생각처럼 그리 복잡하진 않을 거다.”

“공주께서는 용모가 빼어나시니 폐하께서 공주를 흠모하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공주께선 공주를 향한 폐하의 마음이 유달리 깊다고 느끼십니까?”

고여아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게 무슨 뜻이지?”

“폐하께서는 요즘 공주와 줄곧 붙어 계시긴 하지만, 불이 공자도 폐하 곁을…….”

“불이 공자는 사내잖아. 폐하께서 정말 그 애를 좋아한다 해도 황후로 올리진 못할 텐데, 뭐 하러 그리 걱정이야.”

“불이 공자가 궁을 떠났을 때, 폐하께서 영사를 보내 데려오셨습니다. 폐하께 공자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고여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됐어, 됐어. 알겠으니 그만해.”

그녀는 위지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옥합이 무슨 말을 하든 싫었다. 사내놈이 여자처럼 생긴 것도 싫었고 남제화 곁에 늘 붙어 있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럼 뭐하겠는가. 어차피 위지불이는 황후가 될 수 없다. 고여아는 태생적으로 그녀가 위지불이보다 높은 위치인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남제화는 특별히 공주들을 위해 활쏘기 경연인 화전花箭 시합을 열었다. 남원은 산림이 우거지고 야생동물이 많아서 대부분의 여인도 기사騎射에 능했다. 그중에서도 부족 공주들은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화전은 활을 쏘는 동작을 뜻했다. 사내들이 활을 쏠 땐 정확한 힘을 중시하는 반면, 여인들이 활을 쏠 땐 정확성은 물론이거니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세도 중요했다. 이러한 자태는 무용을 통해 익혀온 것으로, 여인들의 고난도 자세는 사내들도 따라 하지 못했다.

위지불이는 활을 잘 쏘지 못했지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시합을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활을 쏜 사람은 아운소였다. 그녀는 위지불이를 바라보며 빙긋 웃더니 활을 들어 올리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이내 오른발을 뒤로 뻗어 올리고 몸을 앞쪽으로 살짝 숙였다. 꼭 커다란 새를 닮은 모습이었다.

위지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자세로 활을 쏘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아운소는 매우 안정적으로 서서 활을 쐈고, 그리 멀지 않은 과녁 중심에 화살이 꽂혔다. 주변을 둘러싼 관중들은 연신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남제화도 옅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칭찬했다.

아운소는 활을 쏜 뒤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위지불이는 곧장 웃으며 그녀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운소는 어여쁘게 미소를 짓더니 위지불이 곁으로 다가갔다. 위지불이가 속닥거리는 말에 그녀는 아양을 떨 듯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황제의 눈에 담겼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또 금세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위지불이는 아운소에게 방금 전 동작을 배웠다. 위지불이는 한쪽 발을 뒤로 보내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자 중심을 잡기 힘들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 아운소가 곧장 그녀를 부축했다.

“너무 어렵네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요.”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처음 배울 땐 그랬어요. 오랜 연습 끝에 할 수 있게 되었죠. 불이가 배우고 싶다면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줄게요.”

“좋아요. 짬이 날 때 가르쳐 주세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새 나사가 활을 쏠 준비를 마쳤다. 평소 단아한 면모를 뽐내던 그녀는 오늘 화전 시합에선 바지를 입었다. 푸른색 옷감을 입은 그녀의 자태는 매우 늠름해 보였고 눈매의 총기도 한층 짙어졌다.

그녀의 동작은 아운소의 것과 달랐다. 왼손으로 활을 들고 오른손을 머리 뒤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허리를 비틀며 신기한 모양으로 몸을 꼬았다. 그 자태가 낯설기는 해도 매혹적이며 아름다웠다.

위지불이는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꼬며 그녀를 따라 했지만, 나사처럼 잘 비틀지 못했다. 아운소가 말했다.

“나사 공주의 허리는 정말 유연하네요. 저도 저 정도는 못합니다.”

나사는 그 자세를 유지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활은 과녁에 맞긴 했지만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위지불이가 말했다.

“나사 공주는 공주만큼 정확히 쏘지 못했네요. 고여아 공주도 중심을 맞추지 못하면 공주가 우승하겠어요.”

“화전 대결에서는 동작이 정확도보다 더 중요한 걸요. 과녁이 멀지 않으니 중심을 맞추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관건은 활을 쏘는 것과 동시에 몸의 균형과 힘을 잘 유지해서 과녁에 화살을 맞히는 거예요. 나사 공주는 이미 저를 이겼어요.”

위지불이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군요.”

그녀는 다음 순서인 고여아 공주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공주는 요즘 폐하의 총애를 받는데다 자기 과시를 좋아하니 어떻게든 나사 공주를 누르려 하겠네요.”

아운소는 아무런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그때 그녀는 남제화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녀는 조용히 위지불이와 거리를 두었다. 위지불이와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었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새빨간 옷으로 치장한 고여아는 눈이 부셨다. 활을 쏘러 나온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멀리 있는 남제화에게 예를 갖추었다. 남제화는 다정한 미소를 보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위지불이는 고여아가 엄청난 동작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뽐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 황제 앞에서 눈에 띌 기회를 놓치지 않을 터.

역시나 그녀는 아운소와 나사의 동작을 합친 것 같은 자세를 선보였다. 다리를 뒤로 들어 올리고 손을 머리 뒤로 감싸더니, 가녀린 허리를 기이하게 비틀었다. 한쪽 발로 몸을 지탱하는 그 모습은 꼭 비선飛仙 같았다. 다만, 그리 안정적으로 서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한 손으로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자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꼭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다들 손에 땀을 쥐었다. 그녀를 마뜩잖게 생각하는 위지불이조차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가 활을 쏠 수 있을지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고여아의 몸이 갑자기 앞으로 쏠렸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고, 허리를 중심으로 상반신이 기이한 자세로 한 바퀴 돌아갔다. 그 모습에 관중들은 놀라 고함을 내질렀다. 활에 걸려 있던 화살이 순식간에 시위를 벗어났지만, 과녁이 있는 방향이 아닌, 왼쪽으로 날아갔다.

화살이 날아오던 그 순간, 아운소가 비명을 내질렀다.

“불이, 피해요!”

공교롭게도 위지불이가 서 있는 방향이 왼쪽이었다. 위지불이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던 아운소는 곧장 비명을 내지르며 위지불이를 밀쳐 내려 했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그녀가 밀치기 전에 즉각 몸을 뒤로 젖혀 화살을 피했다. 불시에 뒤로 넘어지면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겠으나 화살을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때 균형을 잃은 아운소의 몸이 위지불이를 그대로 들이받았다. 위지불이의 목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질 정도의 강한 충격이었다.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화살은 그녀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녀가 몸을 뒤로 젖히지 않았어도 화살이 그녀의 몸에 꽂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고여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서둘러 단 위에 있는 남제화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저 고여아가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너무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남제화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훑으며 함께 넘어져 있는 위지불이와 아운소에게 시선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고여아를 바라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의가 아니었다니 죄를 지었다 할 수 없소. 어서 일어나시오.”

고여아는 바닥에서 일어나는 위지불이를 힐끔 바라보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기세등등하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소상은 서둘러 아운소 공주를 일으켜 위지불이와 떨어트려 놨다. 그녀가 작게 원망했다.

“공주, 뭐 하시는 거예요. 남원이 아무리 개방적인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많은 이들 앞에서 다른 사내와 뒹구시는 건 안 될 일이라고요. 폐하의 체면은 신경도 쓰지 않으실 생각이세요?”

위지불이가 멀쩡한 걸 보고 나서야 아운소는 마음이 놓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

“만약 그 사람이 불이 공자가 아니었다면 공주께서 그렇게 몸을 날리며 구하려 하셨을까요?”

아운소가 얼굴을 붉히며 괜스레 성을 냈다.

“지금 날 훈계하는 거야?”

“다 공주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소상이 골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폐하께서 불이 공자를 특별히 아끼신다지만, 방금 고여아가 거의 불이 공자를 화살로 맞힐 뻔했는데도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폐하께서 고여아를 황후로 낙점하신 듯합니다. 공주, 공주께서 지셨습니다.”

“지면 진 거지.”

아운소가 코웃음을 쳤다.

“난 아쉬운 거 없거든.”

위지불이는 바닥에서 일어나며 바닥의 화살을 주웠다. 화살 몸체가 움푹 파인 게 꼭 무언가에 맞아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올려 높은 단을 바라보았다. 단 위에 있던 사내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위지불이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리 기쁘진 않았다. 남제화가 그녀를 구해 주었다 해도 고여아를 책망하진 않았으니까. 이렇게 보니 다른 이들이 떠들어대는 것처럼 지금의 황제에게 고여아가 가장 중요한 존재인 듯했다.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대결은 그대로 이어졌다. 아운소는 평범한 동작을 보여 주었고 나사는 주목할 만한 동작을 선보였다. 고여아는 여전히 어려운 동작으로 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번엔 실수 없이 과녁 외곽에 화살을 꽂았다. 그녀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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