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2화
강암룡이 흠칫 놀라며 말했다.
“이 일은 네가 폐하께 가서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만약…….”
또 도망치는 거라면… 그는 절대 책임질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돌아올 거니까요.”
위지불이가 그에게 손짓했다. 강암룡은 그녀가 대체 무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위지불이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총관한테만 말하는 건데, 사실 전 죽는 게 너무 무섭거든요. 폐하 곁에 있어야 살 수 있다니까 다신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강암룡은 웃음을 터뜨렸다.
“불이, 예전에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위지불이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당연히 목숨이 패기보다 더 중요하죠.”
“잠시만 기다려 보시게. 내가 가서 폐하께 말씀드릴 테니. 어쨌든 출궁하는 건 늘 폐하께 알려 드려야 한다네.”
위지불이도 더는 그를 난처하게 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기다릴 테니 다녀오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암룡이 총총거리며 돌아왔다.
“불이, 폐하께서 출궁을 허락하셨다. 만약 오늘 돌아오지 않으면 또 영사를 보내 자네를 찾아올 거라고도 하셨어.”
“…….”
누가 남원의 개자식 아니랄까 봐, 또 비겁한 협박을 하다니!
위지불이는 궁문을 나서자마자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위지경용을 발견했다. 그녀가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셋째 형님!”
위지경용이 곧장 그녀에게 다가왔다.
“열넷째야.”
두 사람은 곧장 목소리를 낮췄다.
“오라버니, 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황제가 널 못 나오게 할까 봐 걱정했다. 네가 나오지 못하면 방법을 구색해 궁에 들어갈 생각도 했어.”
위지불이가 말했다.
“왜 절 못 나오게 하겠어요. 제가 죄인도 아닌데요.”
“나왔으니 되었다. 어서 가자.”
위지경용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보따리를 가져와 제 손에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그녀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제 이 오라비 집에는 갈 수 없으니 우선 당장 숨을 곳을 찾자. 가족들부터 안전한 곳에 보낸 뒤에 널 다시 데리러 오마.”
위지불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전 못 가요. 오늘도 궁에 돌아가야 해요.”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구나. 황제가 황궁 출입을 자유롭게 허락했다면 내게 며칠만 시간을 다오. 적당한 곳을 찾거든 그때 떠나자꾸나. 이렇게 급히 떠날 것까진 없지. 남원이 얼마나 큰 나라인데, 분명 우리가 살 곳 하나쯤은 있을 거다.”
위지불이가 발걸음을 늦췄다.
“오라버니가 무얼 걱정하는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마음 놓으세요. 벌써 폐하한테 얘기했어요. 폐하도 더는 예전 일을 추궁하지 않으시겠대요. 오라버니를 찾아가 성가시게 굴 일도 없고요. 오라버니는 계속 채자리에서 편히 지내면 돼요.”
위지경용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의 말을 믿어도 된단 말이냐?”
“황제잖아요. 군자는 빈말하지 않는 법이니, 속이진 않겠죠.”
위지경용이 말했다.
“궁을 떠나지 않을 생각이냐?”
“네. 폐하가 전 폐하 곁에 있어야 살 수 있대요.”
“그럼 이 보따리는 다 뭐냐? 이렇게 무거운데?”
위지경용이 손으로 보따리를 더듬었다.
“황제의 금화를 몰래 훔친 건 아니겠지?”
위지불이가 그를 흘겨봤다.
“간식이에요. 오라버니랑 올케언니 맛보라고 조금 챙겨 왔어요.”
위지경용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걸음을 늦춘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정말 궁에 있을 생각이구나?”
“그렇다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자주 출궁해서 오라버니를 찾아갈게요.”
“정말 황제를 믿어도 될까?”
“믿어도 돼요.”
“불이.”
위지경용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설마 황제에게 무슨…….”
“오라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황제는 절 줄곧 사내아이로 알고 있다니까요, 참.”
“내 말은 황제가 아니라 네가 황제한테…….”
“그것도 아니에요. 황제한텐 공주가 셋이나 있다고요. 저랑 황제는 그냥 친구예요. 다른 건 전혀 없어요.”
“그렇다면 안심이고. 군주를 모시는 건 옆에 호랑이를 두는 것과도 같다. 궁에서는 각별히 유의해야 해.”
위지불이가 돌아오자 채자리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녀를 보러 온 이들로 한향의 집이 북적거렸다.
예전에 그들이 위지불이에게 잘해 준 건 그녀가 위지경용의 아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위지불이는 영사와 연이 닿아 황궁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모두의 눈빛엔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부러 그녀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귀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담은 성의의 표시였다.
위지불이는 그들이 찔러주는 선물들을 보자 감동이 밀려왔다. 그녀도 궁에서 가져온 각종 간식과 말린 과일을 모두에게 나눠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함께 모여 앉아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 중독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계속 채자리에서 살고 싶었다. 셋째 오라버니와 함께 공예품을 만들며 돈을 벌고, 한가할 땐 투계도 하고 호로사도 불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는 법.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궁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한향의 어머니는 일부러 일찌감치 밥을 차려 주었다.
식사를 마친 위지불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 위지경용을 찾아가 지난번 가지고 나왔던 향과 금화를 주었다. 위지경용은 향은 받았지만, 금화는 절대 받으려 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라버니, 이 돈이면 그렇게 힘들게 일할 필요도 없잖아요.”
“하나도 안 힘들다.”
위지경용이 말했다.
“복수는 포기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위지 씨다. 남원 황제의 돈은 필요 없어.”
위지불이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녀도 위지 씨건만. 그녀는 남원 황제와 친구가 되어 함께 살지 않는가. 꼭 당연한 도리를 저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발끝으로 바닥을 끄적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오라버니에 비하면 저는 위지 가문 사람답지 않네요.”
차마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지 위지경용이 서둘러 말했다.
“넌 다르지.”
“전 왜 달라요?”
“넌 여인이니까 굳이 이런 걸 금기시하지 않아도 된다.”
“…….”
“그러니까 내 말은… 황제와 친구가 되었다며. 이왕 친구가 되었으니 이제 와 물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애써 받아들이곤 돈주머니를 챙겼다.
황궁으로 돌아오니 남제화는 정전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막 식사를 마친 것 같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고여아도 앉아 있었다. 위지불이는 조금 놀랐다. 궁을 떠날 때, 남제화는 늘 나사를 곁에 두었다. 며칠 만에 또다시 고여아로 바뀌다니. 아무래도 황제는 모든 공주와 사귀어 보고 비교를 하려는 듯했다.
황후를 고르는 건 남제화의 일이지,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독 고여아에게 호감이 가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고여아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위지불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날 때마다 늘 하찮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다가오자 고여아는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남제화는 웃는 낯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돌아왔구나.”
“안 돌아오면 영사를 보내실 거라면서요. 뱀이 얼마나 무서운데… 제가 어찌 감히 안 돌아오겠어요.”
고여아가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불이 공자는 뱀이 무섭습니까? 남원에서는 여인들도 뱀을 무서워하지 않지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는 법이죠. 고여아 공주는 무서운 게 하나도 없나요?”
고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 무서운 게 없는 걸요.”
“폐하께서는 남원의 군주시니까 모든 백성이 폐하를 존경하고 또 두려워하죠. 설마 공주는 폐하도 무섭지 않단 말인가요?”
고여아는 위지불이의 유창한 말솜씨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남원에서 감히 황제에게 경외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남원의 황실을 우습게 생각하는 부족 사람이라고 한들 차마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무, 물론 그건 아니지요.”
고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천하의 군왕이시니, 저 고여아 또한 폐하를 경외하지요.”
“하하하!”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고여아에게 말했다.
“어린 녀석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오. 저 녀석과 제대로 말싸움이 붙으면 공주라도 저 애를 이기지 못할 것이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위지불이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폐하,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지 말고 함께 차 한 잔 들자꾸나.”
“폐하, 공주랑 드시지요.”
말을 마친 위지불이는 곧장 몸을 돌려세워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멀어지자 고여아가 투덜댔다.
“폐하께 정말 경외심이 없는 사람은 불이 공자인 것 같습니다.”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 애는 동월인이 아니오. 당연히 짐을 경외할 필요 없지.”
“하지만 지금은 남원에서 지내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입니까?”
남제화가 느긋하게 말했다.
“짐은 저 애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왜요? 폐하, 지금 남원은 동월에 신복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동월을 증오하지 않으십니까?”
남제화가 얼굴을 굳혔다.
“그건 공주가 신경 쓸 일이 아니오.”
황제가 얼굴을 굳히자 화를 내지 않아도 엄청난 위엄이 느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고여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 * *
위지불이가 궁에 돌아온 뒤, 남제화는 예전처럼 그녀를 푸대접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어딜 가든 늘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잘 받아 주지 않았다. 황제가 사랑을 속삭이는데 굳이 옆을 지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여아가 거기 있지 않은가. 고여아는 남제화 뒤에서 입을 삐죽거리며 위지불이에게 눈치를 줬다.
그런 이유로 위지불이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싶었지만, 황제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의 신분으로 그녀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친구라는 이유에서였다. 친구는 응당 서로 함께 있어야 한다면서.
위지불이는 상대가 강압적일 땐 맞서 싸우는 편이지만, 온화하게 대하면 맞서지 않은 편이었다. 남제화의 겸허한 태도와 이따금 내비치는 쓸쓸한 표정에 그녀도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