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1화
조금 이상한 말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폐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죠?”
남제화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불이, 짐의 말을 이해했겠지?”
“…….”
그녀는 어쩐지 희롱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남제화는 멍청한 위지불이의 얼굴을 보더니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위지불이는 잠시 넋을 놓다가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폐하,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신 거예요?”
“짐은 바보가 아니다.”
남제화가 웃음기를 거두고 그녀를 흘겨봤다.
“내가 네 셋째 형을 찾아가 성가시게 굴까 봐 걱정하는 것 아니더냐?”
“폐하는 정말 현명하세요.”
위지불이는 배시시 웃으며 아부를 떨었다. 남제화는 기분이 좋아 계속 위지불이를 놀리고 싶었다.
“내게 부탁을 하겠다며? 어떻게 부탁할 것이냐?”
위지불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릎을 꿇었다. 남제화가 그녀를 끌어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
“폐하께 부탁하는 거니까 당연히 무릎을 꿇어야죠.”
남제화가 코웃음을 쳤다.
“꿇긴 뭘 꿇는다고. 앞으로 짐의 화나 돋우지 말거라.”
그의 말투에 위지불이는 이 일이 순탄히 넘어갈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제화가 무릎을 꿇지 못하게 하니 그녀가 공수하며 읍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남제화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하니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지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왕 내가 네 체면을 봐주니 셋째 형님이라는 자도 분수를 잘 지켰으면 좋겠구나. 만에 하나라도 경거망동…….”
“그럴 일 없어요. 그건 제가 보장할게요. 지금 셋째 형님은 자기 힘으로 가족을 부양할 생각뿐이에요. 다른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정전에 들어섰다. 문을 지키던 강암룡이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 어선을 올리라 할까요?”
남제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와 기다란 식탁에 음식이 담긴 크고 작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남제화가 위지불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바깥에서 밥은 배불리 먹고 다녔느냐?”
위지불이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설마 셋째 형님이 절 굶겼을까 봐서요?”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다니며 음식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온통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채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제화가 특별히 부엌에 지시한 게 틀림없었다. 마음이 따스해진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배불리 먹긴 했지만, 셋째 형님 집에서 먹던 음식은 궁에서 먹는 음식만큼 맛있지는 않았어요.”
남제화가 태연하게 물었다.
“또 도망칠 생각이더냐?”
위지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남제화를 신뢰하지만 제 속마음을 그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돌렸다.
“폐하, 황후가 될 분은 고르셨어요?”
“아니.”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석 달이 되려면 멀었으니 조급해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뒤, 그가 또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누가 제일 적당한 듯 싶더냐?”
위지불이가 말했다.
“처음엔… 아운소 공주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사 공주도 괜찮더라고요. 단아하고 요리도 잘하고요. 우리 동월 기준으로 봤을 땐, 나사 공주가 황후에 잘 어울려요.”
남제화가 말했다.
“동월 음식이 먹고 싶거든, 동월 요리사를 구해…….”
대화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황후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월 요리사 이야기가 나오다니.
“폐하, 저는…….”
남제화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짐도 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지. 하지만 널 남원에 두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느냐. 걱정 말거라. 나중에 짐이… 잘해 주마.”
“폐하께서는 이미 제게 잘해 주셔요.”
“한데 왜 도망친 것이냐?”
“폐하!”
‘그 얘기는 좀 그만하시지…….’
“짐도 안다.”
남제화가 손을 내저어 주변 사람들을 물렸다.
“짐이 성질을 부려 네가 도망갔다는 것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한번 나갔다가 돌아오니 남제화는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다니. 그것도 까마득히 높은 황제가…….
* * *
깊은 밤. 위지불이는 침대에 앉아 익숙한 방을 둘러보았다. 궁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꿈같은 일들을 겪었다. 꿈에서 깨니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었기에 사실 아무 데도 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녀는 스스로 다짐했다. 이제 정말 이곳에 남겠다고.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라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밖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그녀의 방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문도 두드리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지불이는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뒤, 그가 마침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침대에 앉아 있자 남제화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아직 안 자고 있었느냐?”
“이렇게 늦은 시각 폐하께서 어쩐 일이세요?”
남제화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너무 놀란 탓에 잠을 못 자는 것이냐?”
영사 때문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은 그저 기분이 조금 싱숭생숭하여 잡생각이나 할 뿐이었다.
“무서우면, 짐이… 함께 자 줄 수도 있다.”
등불이 남제화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위지불이는 얼굴이 화끈거려 자신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녀도 점잖은 아가씨였다. 아무리 뱀 때문에 놀랐다고 한들 그와 한 침대에서 잘 순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에게는 이미 세 공주가 있지 않은가.
“괜찮아요, 폐하. 저 안 무서워요.”
“아, 안 무섭다니 다행이군.”
남제화는 줄곧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건넸다. 손에는 자그마한 사발이 들려 있었다.
“잠을 잘 오게 하는 탕약이다. 이걸 마시면 잠이 금방 올 게다.”
위지불이는 까만 탕약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약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녀는 쓴 게 정말 싫었다. 어려서부터 약을 싫어한 까닭에 부모님에게 혼쭐이 난 일이 많았다.
“안 먹어요.”
위지불이는 싫은 티를 내며 사발을 밀쳤다.
“말 듣거라.”
남제화는 침대에 앉아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사발을 입가에 가져갔다.
“어서 마셔 보래도.”
“전 쓴 걸 싫어한단 말이에요.”
남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부가 쓰다고 약도 못 먹는단 말이냐?”
그는 팔에 힘을 더 실어 자신이 말한 사내대장부를 더 힘껏 감쌌다. 품에 사내를 끌어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눈치였다. 위지불이는 어떻게든 탕약을 먹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안긴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안 마셔요.”
그녀는 여전히 고집을 피우며 약을 거부했다.
“이 약은 그리 쓰지 않다. 오히려 달지.”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세상에 안 쓴 약이 어디 있어요?”
“정말이다. 못 믿겠으면 내가 먼저 마셔 보마.”
남제화는 고개를 숙여 약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입맛을 다셨다.
“전혀 쓰지 않고 달다.”
위지불이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약이 달다고요?”
“우리 남원에는 달콤한 약도 있다. 못 믿겠으면 한번 마셔 보거라.”
그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가에 약사발을 가져갔다. 위지불이는 결국 입을 벌려 작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 쓰진 않았지만 단맛도 아니었다. 입가에 퍼지는 기괴한 맛에 그녀는 입을 더욱 꾹 다물었다.
남제화가 말했다.
“불이, 갑자기 네가 짐에게 독을 먹여 주던 일이 떠오르는구나. 짐도 너처럼…….”
위지불이는 아무 말 없이 한입에 약을 다 들이켰다. 그날 일은 두 번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남제화는 어디에서 난 건지 설탕에 절인 대추를 꺼내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혀 아래에 두고 있으면 약 맛이 금세 가실 것이다.”
대추를 물고 있던 위지불이는 뺨이 더 붉게 물들었다. 그제야 자신이 남제화의 품에 안겨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조용히 그의 품을 벗어났다. 남제화도 조금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어서 자거라, 나도 그만 돌아갈 테니.”
사발을 들고 방을 나온 그는 다른 한쪽 손으로 방문을 잘 닫아 주었다. 복도 기둥 옆에 잠시 서 있던 그는 작은 등불 아래에서 제 오른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위지불이의 입에 대추를 넣어 줄 때, 축축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가락에 살짝 닿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가쁘게 뛰는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 같았다. 정말이지 혼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위지불이의 혀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위지불이가 제게 입을 맞췄던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의 마음이 자꾸만 위지불이에게 향했던 것이.
어둠 속에서 멍하니 서 있던 그는 멀리서 경탁 소리를 들었다.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제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리곤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위지불이도 돌아왔고 그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앞으로의 계획에 집중해야 했다. 내일 그가 찾아야 할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 * *
이튿날 아침, 궁녀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열었다. 눈부신 햇살이 방을 환하게 비추었고, 반투명한 장막 너머에는 위지불이가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궁녀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으며 방을 나섰다. 궁녀는 정전을 찾아 남제화에게 고했다.
“폐하, 불이 공자는 아직 자고 계십니다.”
“그래, 어제 많이 피곤했을 테니 푹 쉬게 내버려 두거라.”
남제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더니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위지불이가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다. 눈을 반쯤 뜬 채 방 안을 가득 채운 햇살을 보던 그녀는 후다닥 이불을 젖히고 세안을 한 뒤 정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제화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녀를 발견한 강암룡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불이, 아침을 차렸으니 어서 가서 먹게.”
위지불이가 물었다.
“폐하는요? 폐하는 드셨어요?”
“지금이 몇 시진인데, 폐하께서는 지금껏 늦잠을 주무신 적이 없지. 이미 드셨네.”
위지불이는 식탁 앞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폐하는 어디 가셨어요?”
“공주께 가신 듯한데.”
위지불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제 일로 자신과 남제화 사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전혀 바뀐 게 없었다. 그에게는 공주들이 있었고, 그녀는 또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아니다, 그녀는 외롭지 않았다. 궁 밖에 셋째 오라버니가 있지 않은가. 이 생각이 나자 위지불이는 어제 셋째 오라버니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서둘러 아침을 먹고 강암룡에게 말했다.
“오늘 출궁했다가 저녁밥까지 먹고 들어올 거예요. 폐하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