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0화
남제화와 위지불이가 사라지자 구경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누군가는 속이 상했고 또 누군가는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하지만 대전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세 공주는 자신의 시녀들을 데리고 처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한 시종이 대전에서 달려 나와 강암룡을 불렀다.
“총관, 어서 와 보십시오. 불이 공자와 폐하께서 말다툼을 하십니다!”
그 소리에 모두 자리에서 멈춰 섰다.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운소가 말했다.
“흠, 대전으로 들어갈 땐 분명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어째서 말다툼을 하시지?”
고여아가 냉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영사까지 보냈건만… 은혜도 모르고 말다툼이나 하다니. 정말 배은망덕한 자로군요.”
나사는 아무 말 없이 대전을 주시했다. 보고를 받은 강암룡은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반쯤 올랐을 때, 밖으로 뛰쳐나오는 위지불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강암룡을 스쳐 지나치며 궁문 쪽으로 향했다.
강암룡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복도에 서 있던 남제화는 강암룡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제화의 의도를 파악한 강암룡은 서둘러 한 호위를 불러 무어라 속닥였다. 그러자 호위는 곧장 궁문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세 공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운소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불이가 또 떠나려는 건가?”
“갈 테면 가라지요.”
고여아가 말했다.
“애당초 저자가 있을 곳이 아니었으니까요.”
나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어렵게 불이 공자를 찾아오셨는데, 그리 쉽게 돌려보내시겠어요?”
‘분명 셋째 오라버니가 궁문 밖에 있을 거야!’
위지불이는 걸음을 빨리했다. 셋째 오라버니는 이곳에 있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다. 그러니 그녀가 끌려가도록 가만히 지켜보진 않을 것이다. 혹시 소란을 일으켜 셋째 오라버니의 신분이 들통 나면 어쩌지? 남제화의 심심풀이로 자신은 살려 준다고 해도… 셋째 오라버니까지 죽이지 않을 보장은 없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남제화가 높은 단상에 올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표정까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그리 좋은 안색은 아닐 것이다.
아마 본인도 자신의 논리가 타당치 않다는 걸 알고 있어서겠지. 그는 몇 차례나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며 오락가락했다. 그녀가 폭발하자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그 또한 그녀가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사가 이미 그녀의 냄새를 알고 있으니 어디에 숨든 다 찾아낼 수 있을 터.
위지불이는 셋째 오라버니 옆에서 편안히 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남제화는 다시 그녀를 붙잡아 왔다. 게다가 그 방법은 몹시, 몹시,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사실 조금 좋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이곳에 머물길 바랐고 또 그녀의 목숨을 아껴주었다. 게다가 반드시 살아 있으라는 말도 해 주었다.
말싸움을 벌이던 그날은 둘 다 냉정하지 못했다. 그 역시 충동적으로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말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위지불이는 그게 참 속상했다.
궁문으로 달려가니 역시나 위지경용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궁문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무 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던 그는 그녀가 보이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지불이는 보초병이 그녀를 막을 거라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한 보초병이 말했다.
“불이 공자, 폐하께서 나가도 좋다고 윤허하셨습니다. 친우 분과 말씀을 나누신 뒤에 곧바로 돌아오시지요.”
위지불이는 서둘러 위지경용에게 달려갔다.
“셋째 형님, 돌아가세요.”
위지경용이 물었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냐?”
한향과 채자리의 형제들이 곁에 있었기에 위지불이는 사정을 전부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며칠 뒤에 찾아갈게요. 오늘은 갈 수 없어요.”
한향은 영사가 그녀를 황궁에 데려간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한 듯했다.
“열넷째, 대체 무슨 일이에요? 영사가 왜 열넷째를 황궁에 데려간 건데요? 그럼 당분간 황궁에서 머무를 거예요?”
“…우연히 황제와 친구가 되어서요. 황제가 며칠간 궁에서 머물라고 하네요.”
한향은 줄곧 걱정하다가 그 말에 마음을 놓았다. 한향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해요, 열넷째. 우리 황상과 친구가 되다니. 셋째 형과 저도 열넷째 덕을 보겠는걸요.”
위지경용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위지불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위지불이는 그의 팔을 툭툭 다독이며 안심하라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셋째 형님. 전 괜찮으니까요. 이틀 뒤쯤 찾아갈게요.”
“이틀은 넘기지 말고 내일 돌아오거라.”
위지경용이 말했다.
“안 그럼 마음이 놓이지 않을 거다. 황궁은 우리 같은 이들이 지낼 곳이 아니지. 되도록 빨리 돌아와야 한다.”
위지불이가 임무에 실패해도 황제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권력자의 마음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법. 그녀를 죽이지 않는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었다. 위지경용은 가문의 시비나 원한에서 자신의 처자식과 여동생을 잘 지켜야 했다. 위지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내일 갈게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자 위지경용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한향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경용, 열넷째가 여인도 아니고, 어찌 그리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열넷째도 벌써 열일곱이에요. 당연히 제 앞가림할 나이라고요.”
위지경용의 속만 타들어 갔다. 사내가 아니라 여인이니 문제지. 다른 건 상관없었지만, 만약 황제가 악한 마음을 품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비록 위지 가문의 원수는 여제지만, 여제의 아들이 그녀를 건드리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위지경용을 잘 타일러 돌려보낸 위지불이는 휘황찬란한 궁문을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은 감격스러운 마음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나올 땐 평생 다시 들어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고작 며칠 만에 또다시 돌아왔다.
천천히 궁문 안으로 들어오던 그녀는 저 멀리 나무 아래 서 있는 남제화를 발견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해가 기울어 하늘은 새빨간 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은 주변을 끝없이 붉게 물들이다가 저 먼 곳을 향해 뜨겁게 타올랐다. 노을이 비춘 대지는 옅은 붉은 빛을 머금었고 노을빛에 젖어 든 사내는 참 훤칠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못 본 척 지나가려 했지만 남제화는 곧장 그녀에게 시선을 옮겼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았다. 위지불이는 호탕하게 인사를 건넸다.
“폐하, 여기서 뭐 하세요?”
남제화가 하늘을 가리켰다.
“노을을 보고 있지.”
“왜 여기서 보세요? 전당에서는 더 멀리까지 보이잖아요?”
“여긴 이곳만의 묘미가 있단다.”
그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못 믿겠으면 이리 와서 한 번 보거라.”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슨 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냥 노을이잖아요?”
“자세히 보거라.”
위지불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녀도 남제화가 말한 묘미를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하늘을 불규칙하게 갈라놓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나무에 하얀색 작은 꽃이 활짝 핀 덕에 노을이 배경색이 된 느낌이었다. 그저 노을만 보는 것보단 훨씬 더 운치가 있었다.
“똑같은 것이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르게 보이는 법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하였느냐?”
위지불이는 그의 말을 확실히 이해할 수 없었다.
“폐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
그 또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딱히 할 말이 없어 건넨 말이었을 뿐.
“가자.”
남제화는 가볍게 위지불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곤 끌어안을 듯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을 뿐… 그는 금세 손을 밑으로 늘어뜨렸다.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게 노을빛 때문인지 진짜 붉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제화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간 어디에서 지냈느냐?”
“친구 집에서요.”
남제화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궁 밖에 친구가 있다고?”
“…네.”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황제들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셋째 오라버니에 대한 일은 오래 숨길 수 없을 테다. 그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무얼 하는 사람인데?”
“공예품을 만들어요.”
“가족은 어떻게 되고?”
“어머니랑 부인, 아들이요.”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집을 내주다니… 친분이 꽤 두텁구나.”
“네… 좋은 친구예요.”
남제화가 갑자기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보다 더 좋더냐?”
“…….”
“어찌 말이 없어?”
위지불이가 발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응?”
위지불이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솔직히 털어놔도 될까? 그를 믿어도 될까? 이건 정말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남제화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짐을 제일 좋은 친구로 여긴다면서 말하지 못할 게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여인처럼 수줍게 굴지 말고.”
위지불이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폐하, 부탁 하나 드려도 돼요?”
위지불이가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비록 솜씨는 보잘것없어도 기개는 남다른 녀석이었기에 그에게 부탁하는 걸 꺼리기 때문이다.
“그래, 하나가 아니라 여덟 개든 열 개든 뭐가 어렵겠느냐?”
“폐하, 제가 폐하를 믿어도 돼요?”
남제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날 믿지 않으면 누굴 믿으려고? 영사 때문에 놀라 겁을 먹었을 때도 내게 달려오지 않았더냐.”
위지불이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말할게요.”
“말하거라.”
“방금 궁문 밖에 있던 사람은 제 셋째 형님이에요.”
남제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지 가문의 사람이라고?”
“네.”
“너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러 온 것이냐?”
“형님은… 몇 년 전에 왔어요.”
남제화가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말했다.
“몇 해간 너희 위지 가문에서 제법 많은 이들이 오긴 했지. 하지만 황궁에 잠입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네 셋째 형이 궁에 들어왔었다면 짐도 기억할 것이다.”
위지불이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폐하, 셋째 형님은 이미 복수를 포기한 지 오래예요. 남원에서 이미 가정을 이루었는걸요. 아내도 얻고 아이도 낳았어요. 이젠 형님도 폐하의 백성이에요. 폐하께 위협이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남제화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위지불이가 말했다.
“제가 계속 남원에서 지낸다면 셋째 형님과 왕래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오늘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폐하께선 곧 알게 되시겠죠. 전 폐하를 속이고 싶지 않아요. 위지 가문과 여제는 철천지원수잖아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위지 가문을 예의주시하시겠죠. 물론 저는 예외지만요. 전 실력이 부족하니 폐하께서 마음에 두지 않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셋째 형님은…….”
“틀렸다.”
남제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너희 위지 가문 중에서 짐이 마음에 두는 건 오직 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