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8화
보아하니 마을 사내들은 위지경용을 존경하는 듯했다. 다들 그를 경용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런 형님의 동생이라고 하니 모두들 위지불이를 좋아했다. 위지경용이 부르는 대로 모두들 그녀를 열넷째라 부르며 따랐다. 그 바람에 그녀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위지불이는 위지경용에게 슬쩍 물었다.
“오라버니, 다들 오라버니를 존경하는 것 같네요?”
위지경용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그럼, 이 오라비가 대단하잖냐. 이 두 주먹으로 온 동네를 제패했거든. 날 이긴 자가 아무도 없었지. 남원 사람들은 나와 같은 용사를 공경하는 경향이 있지. 덕분에 채자리에서 가장 예쁜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었단다.”
“와, 정말 멋져요. 오라버니! 저도 지금은 제법 센데, 언제 저랑 한 번 겨뤄요. 제가 이기면 저들도 절 추앙해 줄까요?”
위지경용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여인이 어찌 그런 짓을.”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전 지금 사내라고요.”
* * *
위지불이가 떠나자 세 공주의 반응은 다 제각기였다. 가장 상심이 큰 사람은 아운소였다. 위지불이가 떠났다는 말에 그녀는 한참 동안 넋을 놓다가 이내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위지불이를 진심으로 좋은 친구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말도 없이 떠나다니! 그녀는 배신감이 치밀어 밥도 먹지 않았다. 그러다 화가 가라앉자 걱정만 남았다. 그녀는 곱상하게 생긴 그 동월 사내가 정말 그리웠다.
나사는 여느 때처럼 침착했다. 짧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위지불이와 꽤 가까워졌다. 하지만 나사는 지나간 일을 추억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기에 이미 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법이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황제였다. 그렇다고 그녀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을 가지고 그를 기다렸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여아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위지불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곱상하게 생긴 동월인 사내는 몸도 허약해 보였다. 게다가 위지불이가 황제에게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가 그녀를 왜 푸대접하겠는가? 위지불이만 없었다면 황제는 벌써 꽃다운 그녀의 외모에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다.
옥합玉鴿은 그녀에게 아운소와 나사처럼 위지불이의 비위를 맞추라고 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위지불이가 알아서 떠나 주니 가슴에 박혀 있던 가시가 뽑힌 것처럼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을 바라보며 옥합을 재촉했다.
“간식은 잘 쌌느냐. 폐하께 곧 가져다드릴 것이다.”
옥합은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에 차마 냉수를 끼얹지 못하고 좋게 타일렀다.
“공주, 폐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니 괜히 찾아가서 성가시게 하지 말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찾아가시지요.”
고여아는 경멸이 띈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폐하께서 이 일로 마음을 쓰시겠느냐? 너도 참, 폐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구나.”
“소인이 들은 바로는 나사 공주께서 폐하를 찾아갔는데, 만나 주지 않으셨답니다.”
“나사는 나사고 난 나지.”
고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어서 간식이나 이리 내.”
옥합은 어쩔 수 없이 미리 싸둔 작은 바구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고여아는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향하며 손을 내저었다.
“따라오지 말거라. 나 혼자 갈 테니까.”
고여아가 정전에 들어서자 고요함만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넓은 전당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당 안쪽 폭신한 침상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이자 조심스레 다가갔다.
남제화는 몸을 반쯤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궁녀가 차를 가져오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곧장 그의 옆자리로 걸어왔다. 어찌 궁녀가 규율도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은은한 꽃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기척을 살폈다.
고여아는 남제화를 이리 쉽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가 졸고 있자 그녀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쉬웠다. 그녀는 조용히 허리를 숙이고 그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정말 멋있다. 그녀 부족의 어떤 사내보다 멋있다. 짙은 두 눈썹, 오뚝한 콧날, 좁고 긴 눈매, 빨갛고 도톰한 입술까지. 그녀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리를 숙여 그의 숨결을 느끼려는데, 그가 별안간 두 눈을 부릅떴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뒤로 물러났다.
“폐, 폐하, 이, 일어나셨습니까.”
남제화는 여전히 몸을 기댄 채 살벌한 눈빛으로 물었다.
“지금 무얼 하는 것이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뒤가 켕긴 고여아는 서둘러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폐하께서 요즘 입맛이 없으시다기에 간식을 만들었습니다. 좀 드셔보시어요.”
남제화는 말도 없이 미간만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고여아가 민망하게 웃었다.
“폐하, 그, 그럼 간식을 여기에 두겠습니다.”
남제화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조용히 옆쪽 탁자에 바구니를 올려 두었다. 이대로 나가기 아쉬운지 그녀는 또 몸을 꾸물거렸다.
“공주, 다른 볼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남제화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고여아가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폐하.”
몇 발짝 걸어가던 그녀는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불이 공자 때문에 그리 근심하시는 것인지요?”
남제화는 그녀가 다시 돌아오는 걸 곁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참다못해 그가 입을 열려는데 고여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폐하, 폐하께서 불이 공자를 찾고 계시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남제화가 담담히 말했다.
“공주한텐 소식이 참 빠르게 전해지는군.”
이건 세 명의 공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공주들이 타곤성에 데려온 수하들이 재빨리 소식을 날랐으니 말이다. 그들의 수하들은 황궁에 들어오진 못했으나 늘 궁 밖 객잔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바깥소식에 얼마나 빠르겠는가.
“폐하,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남제화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해 보시오.”
“부족에서 사냥을 나갈 땐 늘 사냥개를 데리고 다닙니다. 사냥감을 더 쉽게 찾도록 말이지요. 폐하께서도 이 방법을 써 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남제화가 눈을 번득였다. 어째서 그 방법은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 * *
언제나 그렇듯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위지불이는 새로운 생활에 금방 적응했다. 오라버니 내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눴고 한향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은 입에 맞았으며 조카는 제법 자신을 좋아했다. 채자리의 사내들과 함께 하는 수공예는 재미있었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이날은 누군가 호로사를 가져와 불었다. 그녀는 서둘러 다락집으로 달려가 자신의 호로사를 가져왔다. 그녀가 나름대로 합주를 해 보였건만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라 순수한 웃음이었다. 위지경용이 춤을 출 때마다 다들 웃음이 터지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위지불이는 호로사를 내려놓았다. 합주하던 자는 그녀를 격려했다. 계속 불어 보라는 의미였다. 위지경용이 그녀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겁먹지 말고 불어 보거라. 네 용기를 저들에게 보여 줘.”
위지불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호로사를 입가에 가져가 힘껏 불기 시작했다. 한 여인이 연주에 맞춰 나풀나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나는 분위기에 우리 안에 있던 투계들도 흥분했는지 붉은 볏을 바싹 세우며 떨었다.
그때, 어렴풋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로사 소리에 묻혀 바로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위지경용은 똑똑히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자 호로사를 불던 사내도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를 치켜세운 뱀 한 마리가 보였다.
위지불이는 가무가 다 멈춘 뒤에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사람들에게 물으려던 찰나.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닥치더니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니 그녀의 몸이 커다란 뱀에게 휘감겨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는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위지경용은 단도를 꺼내 뱀에게 휘둘렀다. 그때 채자리 형제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막았다. 그들이 입을 모아 위지경용에게 말했다.
“경용 형님, 저건 영사靈蛇예요!”
위지경용은 화가 치밀었다.
“저 뱀이 내 여동… 열넷째 아우를 휘감지 않았느냐!”
“경용 형님, 침착하세요. 영사는 살생을 하지 않아요.”
“그럼 대체 무엇 하러 열넷째를 휘감았단 말이냐?”
“아마… 열넷째와 무슨 인연이 있는가 보죠.”
허공에 매달려 있던 위지불이는 그들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 싶었다. 인연은 개뿔 무슨 인연. 궁에서도 뱀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는데, 또 커다란 뱀을 만나다니! 정녕 그녀를 죽일 셈인가?
“셋째 형님, 구해 줘요!”
그녀가 악을 쓰자 경용 역시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구경꾼들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깔깔 웃어 댈 뿐이었다.
“이거 놔. 난 열넷째를 구해야겠으니까.”
“경용 형님, 영사한테는 무례하게 굴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 책망하실 거예요.”
“경용 형님, 걱정하지 마세요. 영사는 열넷째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그때 한향이 경용의 손에 있던 칼을 가져갔다. 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걱정하지 말아요. 영사는 인정이 많거든요. 열넷째한텐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저기 봐, 영사가 움직이고 있어.”
위지경용은 서둘러 영사를 쫓았고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라가며 구경했다. 그렇게 타곤성에는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영사가 당당히 거리를 가로지르는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남원의 사람들은 영사를 보고 공손히 예를 갖췄다.
영사는 답례라도 하듯 머리를 흔들거렸다. 기이한 건 꼬리 쪽에 누군가 휘감겨 있다는 것이었다. 고개와 손발이 축 늘어져 있는 거로 봐선 이미 혼절한 상태인 듯했다. 사람들은 길가에 서서 꼬리에 휘감긴 사람을 가리키며 쑥덕댔다.
“대체 무슨 못된 짓을 했길래 영사한테 잡혀가는 건가 그래?”
“도둑인가?”
“여인을 희롱한 호색가 아니야?”
“요즘 궁에서도 금군이 나와 누굴 찾는다던데, 저 사람 아니야?”
“황제께서 찾으신다는 그 사람? 어쩐지, 그래서 영사가 나서는구나.”
위지경용은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허공에 매달린 위지불이를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악을 쓰더니 지금은 몸을 늘어뜨린 채 미동도 없었다. 설마 너무 놀라서 숨이 멎은 것은 아니겠지?
누군가 농담을 던졌다.
“영사에게 휘감기는 건 엄청난 영광인데… 열넷째는 저리 무서워하며 혼절하다니.”
“그러게, 열넷째는 담이 여인들보다 더 작구먼. 그렇지?”
위지경용은 심란한 마음에 소리를 빽 내질렀다.
“우리 열넷째가 뱀을 무서워하는 게 뭐 어때서?”
여인이 뱀을 무서워하는 게 무어 어떻단 말인가. 게다가 저렇게 커다란 뱀을!
다들 동생을 염려하는 위지경용의 기분을 이해했기에 멋쩍게 웃기만 할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