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7화
위지불이는 조금 속상했다.
“남원에 갔던 많은 오라버니들도 셋째 오라버니와 비슷한 상황일까요? 다들 바깥에서 혼인도 하고 자식들도 보며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을 지도요.”
위지경용이 코웃음을 쳤다.
“나도 나중에야 안 거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건 다 우리 방계였어. 정통 직계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며 승진하고 작위를 올리느라 여념이 없었지. 그들을 두고 우리의 목숨만 희생시킬 이유는 무엇이더냐? 따지고 보면 그들이 직접 공자의 복수를 해야 하는 게 더 맞잖아? 이제 하다 하다 어린 너까지 보내다니… 이렇게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위지불이는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전 보내진 게 아니에요. 제가 몰래 도망쳐 온 거예요.”
위지경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몰래 도망쳐 왔단 말이냐? 왜 그랬어?”
“공자의 원한을 갚고 아버지 어머니의 명예를 빛내고 싶어서요.”
위지경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널 탓할 수는 없는 일이지. 어릴 때부터 세뇌를 당하는 바람에 다들 공자의 복수가 자신의 임무인 줄 아니까. 하지만 결과는 어찌되었느냐. 우리 방계는 결국 뿔뿔이 흩어지거나 많은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 불이, 이 오라비가 충고하는데, 다시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말거라. 다시 동월로 돌아가기 싫으면 이곳에 남아. 이 오라비와 함께 살자.”
위지불이는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전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사실 중독되어서 돌아가도 금방 죽을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죽을 수는 없잖아요.”
위지경용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중독?”
그가 위지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슨 독에 중독되었단 말이야? 어서 말해 보거라. 내가 해독할 방법을 찾아볼 테니.”
“소용없어요. 오라버니. 해독할 수 없는 독이에요.”
“불이, 이 오라비 말 잘 듣거라. 남원엔 독을 쓰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만큼 해독을 할 줄 아는 사람들도 많다. 이곳 채자리에도 해독 고수가 한 명 있는데, 그자라면 분명 네 독을 없앨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어서 말해 봐. 무슨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냐?”
위지불이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몸 안에 벌레가 한 마리 있어요.”
깜짝 놀란 위지경용이 물었다.
“고충?”
“네.”
잠시 고민에 잠긴 위지경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원에서 벌레를 독으로 쓰는 사람은 많지만, 제대로 쓰는 자는 드물다. 대단한 실력자가 한 것만 아니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위지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제가 한 짓이에요.”
위지경용의 안색이 급변했다.
“여제가?”
“네. 남원 황제도 풀지 못했는걸요.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여제를 만난 것이냐?”
“만났죠.”
위지불이가 눈을 희번덕였다.
“오만방자한 여편네인데, 생긴 건 정말 예쁘더라고요.”
“남원 황제도 풀지 못했다는 건 무슨 말이냐?”
위지경용이 물었다.
“설마 황제가 해독을 도와주려 했단 말이냐?”
“그러긴 했죠.”
위지경용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자객의 해독을 도와준단 말이냐. 설마 그놈이 네게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니겠지?”
위지불이는 자신과 남제화의 애매한 관계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함께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만져 주기도, 손을 잡기도, 발을 쓰다듬기도, 그녀를 업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강제로 그에게 입을 맞추기도 했다. 물론 남제화에게 독을 먹이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입을 맞춘 건 사실이니까. 그 일은 일생일대의 미친 짓이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위지경용이 다그쳤다.
“그 망할 황제가 정말 네게…….”
“아녜요, 아니에요.”
위지불이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제가 여인인 걸 몰라요. 계속 절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면 왜 너를 돕는단 말이야?”
“아마도… 외로워서 친구를 사귀고 싶었나 보죠.”
“그자가 네게 잘해 주었다고?”
“그럭저럭요.”
“한데 왜 그의 곁을 떠나온 것이냐?”
“…지금 세 공주가 있어서 황제는 외롭지 않거든요.”
“황제가 외롭지 않은 것이 네가 떠난 것과 무슨 상관인데?”
“…재미가 없어서요. 그래서 나왔어요.”
위지경용은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황제는 공주가 생긴 뒤로 더는 외롭지 않게 되었지만 이젠 네가 외로워졌구나.”
“…….”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그건 오라버니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고요… 그냥 지겨워서요. 다른 곳에도 가 보고 싶었어요.”
위지경용이 물었다.
“방금 우리 아들에게 준 금화도 황제가 준 것이냐?”
“네, 예전에 궁 밖으로 놀러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고 싶은 걸 사라고 돈을 줬었어요.”
“얼마나 주었는데?”
위지불이는 허리춤에 있는 주머니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위지경용이 감탄하며 말했다.
“이야, 네게 후하게 베풀었구나. 가진 게 돈뿐인 황제가 했으니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
위지불이는 금화 한 닢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게 엄청난 액수예요?”
“물론이지. 금화는 남원에서 가장 값비싼 화폐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겠구나. 네 오라비는 일 년 동안 일해도 금화 한 닢을 벌지 못한단다.”
그 말을 들은 위지불이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손으로 통통 튀겼다.
“세상에, 그렇게나 값이 나가는 거였군요.”
“밖에 나갈 땐 금화 한 닢만 들고 다니면 충분하다. 나머진 어디다 잘 보관해 두는 게 좋아. 바깥에서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위지불이는 이제야 거액을 가지고 다니기 무서워졌고, 위지경용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오라버니가 저 대신 좀 맡아 주세요.”
위지경용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나을 거다. 동월로 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곳에 머물거라. 이 오라비가 설마 널 굶기겠느냐? 그리고 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기회를 엿보다가 오라비가 궁에 들어가서 그 여편네를…….”
“안 돼요, 오라버니.”
위지불이가 서둘러 말했다.
“오라버니도 여제의 적수가 안 돼요.”
위지경용이 말했다.
“그자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협박해서 너를 해독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요. 그 사람이 독을 얼마나 잘 쓰는데요. 쥐도 새도 모르게 오라버니 몸에도 고蠱를 넣을 거예요.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나 말고 올케랑 조카 생각부터 해야죠.”
위지경용은 말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위지불이의 말이 옳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제의 적수가 안 된다. 남원을 통틀어 가장 독을 잘 쓰는 이는 여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자가 어찌 여제의 손에 죽었을까. 그가 위지불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우선은 여기서 지내거라. 나도 방법을 생각해 보마.”
* * *
며칠이 지나도 위지불이는 깜깜무소식이었다. 병사들은 동월로 향하는 길목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렴, 그 조그마한 놈이 병사들의 말보다 더 빠르겠는가. 그러니 녀석은 분명 성안에 있다. 하지만 타곤성에 있는 객잔을 모조리 뒤져도 위지불이는 찾을 수 없었다.
남제화는 온종일 표정이 어두웠다. 평소 온화하고 우아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험악한 분위기만 내뿜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나사와 가깝게 지냈지만, 위지불이가 떠난 뒤에는 온종일 정전에만 머물렀다. 나사가 그를 찾아와도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해선 안 된다는 것을 남제화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위지불이를 아낀다는 걸 알면 그의 약점을 노리는 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위지불이를 중시할수록 녀석은 모진 풍파에 휘말릴 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걱정을 숨길 여력이 없었다.
여제가 언제 위지불이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를 일이다. 최소한 그의 곁에 있다면 여제가 녀석을 함부로 죽이려 들진 않을 텐데. 또한 그는 여제에게 위지불이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야 여제가 위지불이를 중요한 패로 알고 쉽게 목숨을 뺏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낭떠러지를 걷는 것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온몸이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걱정과 불안, 분노가 한 번에 올라왔다. 그저 한마디 다그쳤을 뿐이거늘… 홧김에 그렇게 떠나 버리다니. 설령 떠난다 해도 최소한 그에게 작별은 고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말 한마디 없이 떠나다니. 이게 무슨 제일 좋은 친구라고, 개뿔! 다시 붙잡아 오거든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다. 그는 이마를 괴고 두 눈을 감았다. 마음이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다시 눈을 떴다. 강암룡이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것이냐?”
강암룡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지요. 일찍 일어나신데다 낮잠도 들지 못하셨잖습니까. 성안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위지불이는 이미 성안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폐하, 어서 침소로 드시지요. 소식이 전해지거든 소인이 곧장 고하겠습니다.”
남제화가 이마를 괸 채 손을 내저었다.
“나가거라. 혼자 있고 싶다.”
강암룡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굳은 표정의 남제화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 * *
결국 위지불이는 한향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위지불이도 제법 철이 든 여인이었다. 셋째 오라버니가 데릴사위로 있는 처가에 저까지 신세를 지자니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
그녀는 제가 밥만 축내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서둘러 금화 한 닢을 꺼내 한향 어머니에게 건넸다. 하지만 한향의 어머니는 한사코 거절했고 심지어 조금 화가 나 보였다. 경용의 어린 아우라면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돈을 주려 하다니. 자신들을 무시하는 거란 말인가? 위지불이는 이번에 한향에게 건넸지만 그녀 역시 받지 않았다.
“열넷째, 이제 여기가 열넷째 집이에요. 그렇게 우리 집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면 경용이랑 함께 일을 하면서 돈을 벌도록 해요. 여인들은 성실한 총각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야 여인들의 어머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예요.”
급기야 위지불이는 셋째 오라버니를 따라 수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채자리의 사내들은 모두 수공예를 하며 밥벌이를 했다. 다 함께 모여 일을 하며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는 게 퍽 즐거웠다.
일이 끝난 뒤엔 함께 모여 술을 마시거나 투계斗雞를 구경하다 늦은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줄곧 남장을 하고 있던 위지불이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쾌활한 그들의 모습을 보니 더 정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