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6화
위지경용은 자신의 부인을 몰래 지켜본 놈이 있다는 말에 아이를 한향에게 맡기고 씩씩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 보니 형제들이 웬 놈을 붙잡고 있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놈은 형제들을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얼굴은 꽤 반반한 놈이었다. 위지경용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솜털도 가시지 않은 놈이 감히 자신의 부인을 엿보다니… 죽여 버릴 테다. 그는 발을 날려 망나니의 등을 가격했다.
그의 발차기를 맞은 위지불이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커다란 발이 그녀의 등을 힘껏 짓밟았다. 위지불이는 그에게 밟히며 생각했다. 역시 셋째 오라버니… 여전히 그는 용맹스러운 사내였다.
“이 자식이, 감히 내 아내를 엿봐?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내 주먹이 장식인지 아닌지.”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경용 형, 멋집니다!”
“경용 형님, 이런 양아치 같은 놈은 봐주지 말고 더 패 줘요. 형님의 진짜 실력을 보여 줘요.”
목구멍 깊숙한 곳부터 느껴지는 비릿한 맛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데, 위지경용이 그녀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나이도 어린놈이 벌써 남의 부인을 눈독 들이다니! 내가 네 어미 아비 대신 가르침을 주마.”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 겁에 질린 위지불이는 머리를 감쌌다. 셋째 오라버니의 힘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예전에 그가 두꺼운 문에 주먹으로 구멍을 내던 걸 똑똑히 본 적 있었다. 만약 그의 주먹이 머리를 내리친다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할 건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죽더라도 자기 가족 손에 죽고 싶진 않았다. 위기일발의 순간,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셋째 형님!”
휙 소리를 내며 날아오던 위지경용의 주먹이 그녀의 얼굴 옆에 멈춰 섰다. 손가락 한 마디를 남겨 둔 거리였다. 그가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로 주먹을 내려놓았다.
“넌 누구냐?”
그의 귀에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위지불이는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울상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저 불이예요.”
“불이?”
위지경용이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알던 불이보다 키가 조금 크고 또 더 곱상하긴 했지만… 걸걸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분명 위지불이가 맞았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다.
“불이, 내가 널 다치게 했구나.”
위지불이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켰다. 낯선 타국에서의 오랜 생활 끝에 반가운 가족을 만났건만… 그에게 얻어맞다니!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 순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다.
“네, 좀 아파요.”
위지경용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다들 오해했네. 여긴 내…….”
위지불이가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전 경용 형님의 아우예요.”
총명한 위지경용은 눈치 빠르게 그녀의 말에 맞춰 주었다.
“…아우네. 이제 막 고향에서 온 아우. 이제 각자 할 일들 하지.”
그제야 까무잡잡한 청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위지불이에게 다가갔다.
“왜 처음부터 제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난 네가 정말 호색한인 줄 알았잖아. 하마터면 경용 형님한테 맞아서 크게 다칠 뻔했네. 괜찮은 거지?”
위지불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 괜찮아요.”
위지경용은 그녀를 끌고 다락집으로 향했다. 그가 물었다.
“불이, 남원엔 왜 온 것이냐?”
“셋째 오라버니처럼 임무를 수행하려고요.”
그 말에 위지경용이 주변을 경계하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말할 땐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큰일이니까.”
위지불이도 목소리를 낮췄다.
“오라버니도요. 전 지금 남장을 하고 있으니 오라버니께서도 말실수하면 안 돼요.”
위지경용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낮아졌다.
“황궁에 간 적은 있고?”
위지불이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말했다.
“네. 근데 실패했어요.”
“뭐?”
위지경용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어찌…….”
“휴, 말하자면 좀 길어요.”
위지불이가 그의 옷깃을 잡아끌자 그가 몸을 내렸다. 그녀는 그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사람을 잘못 찾아갔어요.”
위지경용 역시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누구를 찾아갔는데?”
“남원의 여제를 죽이려고 했지만… 상대를 잘못 찾았어요. 게다가 황제의 시종과 싸웠는데도 졌죠.”
위지경용은 조금 의아했다.
“황제의 시종과는 싸워서 뭐 하려고?”
“남원의 황제는 못 이겼지만 그래도 시종은 이길 줄 알았죠. 그렇담 이렇게 창피하진 않을 텐데.
“…….”
멀찍이 서서 경용이 작은 사내와 붙어 있는 걸 본 한향은 목청을 높였다.
“경용, 밥 먹어요.”
그녀의 외침에 두 사람은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태연히 행동했다. 위지경용이 말했다.
“불이, 가서 밥부터 먹은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마침 배가 고팠던 위지불이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이를 안고 있던 한향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경용, 손님이 오셨어요?”
“응, 소개하지.”
위지경용이 위지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긴 내…….”
순간 위지경용은 그녀를 몇 번째 동생이라 말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남자와 여자를 칭하는 말도 다른데 이건 또 어쩐담? 그때 위지불이가 잽싸게 끼어들어 답했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전 셋째 형님의 열넷째 아우예요.”
“그렇소.”
위지경용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열넷째 아우요.”
한향은 곱상하게 생긴 열넷째 아우를 살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위지불이를 탁자에 앉히곤 품에 있던 아이도 보여 주었다. 하얗고 토실토실한데다 똘똘해 보이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위지불이가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고고姑姑(고모)라고 해 봐.”
고고? 순간 한향이 기이한 얼굴을 하자 위지경용이 급히 말했다.
“열넷째가 혀가 워낙 커서 발음이 좀 안 좋소. 숙숙叔叔(삼촌)이라고 한 것일 테요.”
그 말에 한향은 연민이 담긴 눈으로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위지불이 앞에 음식을 가득 덜어 주며 말했다.
“맛 좀 보세요. 전부 다 저희 어머니가 하신 거예요. 입맛에 맞을까 모르겠네요.”
마침 한향의 어머니가 다가왔다. 좀 아까 아이를 안고 있던 그 부인이었다. 마른 체격이었지만 아직 정정해 보여 무엇이든 아주 잘해 낼 것 같았다. 경용의 아우란 말에 그녀가 친절히 술을 따라 주었다. 위지경용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어머니, 저희 열넷째는 술을 못 마십니다.”
한향의 어머니가 웃으며 그를 나무랐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술도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른 이들이 보면 손님 대접을 제대로 안 한다고 비웃을 걸세.”
“아직 어려서 집에서도 술을 못 마시게 했습니다. 술은 차차 배우면 됩니다.”
한향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동월은 우리와 풍속이 다르잖아요. 강제로 술을 먹이면 안 돼요.”
한향의 어머니는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 작은 바구니에 조심스레 눕혔다.
위지불이는 바구니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자 저도 모르게 웃음꽃이 피었다. 조카라니! 위지불이는 고모가 됐으니 아이에게 용돈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삼촌이 용돈을 줘야지. 떨어뜨리지 말고 꼭 쥐고 있어.”
금화를 본 한향은 화들짝 놀랐다.
“이러시면 안 돼요. 너무 큰돈이에요.”
하지만 위지불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괜찮아요. 고작 동전 하나일 뿐인데요.”
한향과 그녀의 어머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었다. 순금으로 된 금화 한 닢이면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데, 고작이라니……. 위지경용이 담담히 말했다.
“아이 삼촌이 주는 것이니 받으시오.”
그의 말에 한향은 그제야 어머니에게 금화를 건넸다. 밥을 먹은 뒤, 한향과 어머니는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특별히 두 형제가 회포를 풀도록 자리를 비켜준 것이다.
위지경용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는 무사히 남원에 잠입했지만, 암살에 실패했고 몸에 큰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운 좋게 도망쳐 나오긴 했으나 그땐 한밤중이었고, 하필 하늘에선 억수 같은 빗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려 어두운 곳을 향해 내달렸다. 하지만 부상이 너무 심했던 터라 얼마 못 가 쓰러졌고, 겨우 눈을 떴을 땐 이곳 다락집이었다고 했다. 한향이 그를 구해 준 것이다.
그는 이곳 사람들에게 자신은 동월인이며 강도를 만나, 전 재산을 빼앗기고 쓰러진 거라고 거짓말했다. 마음씨 고운 한향은 그 말을 믿었고 정성껏 그의 회복을 도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며 두 사람의 감정은 점점 깊어졌다.
위지경용은 동월에서 임무를 완수해 낼 거라고 맹세했었다. 별 소득 없이 동월로 돌아갈 면목은 없었다. 결국 그는 한향의 집에서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내는 나날이 꽤 만족스러웠던 그는 동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역시나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한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테다. 이곳에 있는 제 부인과 아이를 두고 어딜 가겠는가. 이 말을 들은 위지불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큰어머니께선 셋째 오라버니가 남원에서 데릴사위가 된 걸 아시면 분명 피를 토하실 거예요.”
위지경용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이곳 채자리寨子里는 전부 다 데릴사위뿐인걸. 이곳 풍습은 사내가 여인의 집에서 생활하는 거란다. 여인이 사내 집에서 사는 경우는 없지. 한향의 집도 어머니가 가장이고.”
위지불이가 입을 쩍 벌렸다.
“전부 다 데릴사위라고요? 다 같이 데릴사위면 부끄럽진 않겠네요.”
위지경용이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 이곳 풍속이 그런 것을. 네 오라비가 등처가 할 인간이더냐? 가족들 부양은 나도 잘 책임지고 있단다.”
“오라버니도 칼로 묘기를 부리고 그래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풍우교 광장에 갔더니 잡기를 부리는 이들이 많더라고요.”
“잡기는 아니고… 나는 수공예를 한다.”
그가 위지불이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네가 남장을 하고 있어 아쉽구나. 안 그랬음 이 오라버니가 장신구를 하나 만들어 주는 건데. 이곳에 와서 배운 것이긴 해도 남들한테 뒤지지 않는 실력이라 제법 비싼 값을 받고 있지.”
위지불이가 혀를 찼다.
“오라버니, 정말 다른 사람이 되었네요. 예전 같았으면 오라버니가 이런 일을 했겠어요?”
위지경용이 허리춤에서 수연통을 꺼내더니 탁자를 두드렸다.
“우린 다 위지 가문의 은혜를 받은 방계 친척들이지. 어려서부터 늘 복수만 생각하느라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해 본 적 없지 않느냐. 복수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
불이, 나도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음이 목전에 오니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더구나. 우린 아직 젊어.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아직 보지도 못했는데 죽어야 한다니… 왠지 억울하더구나.
이곳에 온 뒤에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저 가족들과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술도 먹고 고기도 먹고, 마음 터놓고 지낼 수 있는 형제들이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