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5화
단도는 챙겨야 했기에 허리 좌우에 하나씩 꽂았다. 다리 안쪽에도 하나 꽂아 두었다. 호신용 도구는 많을수록 좋았다. 지난번 남제화가 준 돈주머니에는 아직 금화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 이 정도면 동월로 돌아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향은 그녀가 고생해서 사 온 것이지만, 이렇게 많이 가져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작은 것들은 가지고 가고 싶었다. 동월로 돌아가면 그녀는 여인의 몸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뭘 더 가져가야 할까? 상자에 머리를 처박은 위지불이는 한참 뒤에 목각 인형을 찾아냈다. 이건 남제화가 그녀에게 조각해 준 것이었다. 청초한 소년은 남원의 복식을 입고 있었지만, 전혀 승복한 표정이 아니었다. 이건 그녀가 막 남원에 왔을 때의 모습이었다. 꽤 손재주가 좋은 남제화는 당시 그녀의 모습과 흡사한 조각품을 완성해냈다.
그녀는 그 나무 조각을 보자기에 담았다. 돌아선 그녀는 탁자 위에 있는 호로사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운소가 그녀에게 준 것이었다. 만일 돈이 필요하면 호로사라도 불어 푼돈 벌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건 먹고사는 도구인 셈이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간식 두 접시까지 잘 싸서 보자기에 챙겼다. 이 정도면 거의 준비가 다 된 듯했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특별히 침대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그렇게 표현한 뒤, 그녀는 보따리를 어깨에 걸치고 가슴을 편 채 미지의 여정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날이 아직 밝지 않은 탓에 천지가 온통 희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위지불이는 별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남제화가 가라고 했으니 그녀를 막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막상 금군 한 무리가 다가왔을 때,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피했다. 궁궐을 나설 때, 그녀를 알아본 보초병은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불이 공자, 이렇게 일찍 어딜 가십니까?”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친구 만나러 가요.”
보초병도 별다른 질문 없이 그녀를 내보냈다.
그녀는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이곳에 얼마나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일까. 짧은 시간이었나, 긴 시간이었나.
‘이제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속이 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진실로 남제화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겼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실망한 것이었다. 그녀는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슬퍼했다.
그녀는 궁에서 나와 식당에서 따뜻한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리곤 급하게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성안 곳곳을 구경했다. 남원에 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출궁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직 못 가 본 곳이 많아서 성안을 더 걷고 싶었다.
그녀는 대광장과 연결되어 있는 풍우교에 꼭 다시 한번 가겠노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곳의 분위기가 좋았다. 시끌벅적하고, 즐겁고, 자유롭고, 누구나 거리낌 없이 노래하고 춤을 췄다. 잡기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고, 청춘 남녀, 노인과 아이들이 나무뿌리에 편히 둘러앉아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여유로움이 한껏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녀는 풍우교를 천천히 건너갔다. 광장은 예전처럼 시끌벅적했다. 그녀는 일찌감치 잔돈을 조금 바꾸어 놓았다. 지난번처럼 아까운 금화 하나를 통째로 기부하진 않을 것이다. 금화는 그녀가 동월까지 가는 여비이기 때문에 아껴야 했다.
나지막한 피리 소리를 들은 그녀는 뱀을 부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멀리 피해서 갔다. 여러 번 놀라고 나니까 뱀에 대한 공포가 더욱더 심해진 것 같았다.
칼 묘기, 원숭이 묘기, 코끼리 묘기, 앵무새 묘기……. 신기한 묘기들과 가무들을 구경한 그녀는 보리수에 앉아 잠깐 졸기도 했다. 잠에서 깨어난 후, 궁에서 싸 온 간식 두 조각을 꺼내 먹었다. 양가죽 물주머니를 들고 물 몇 모금을 마시며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구경했다.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할짝댔다. 궁에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이쯤 되면 자신이 떠났다는 것을 다들 알았겠지? 솔직히 그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공작 몇 마리를 제외하면 그녀가 사라진 걸 아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운소는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미 좋은 친구 사이였으니.
보리수에 기대 있던 위지불이는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춤을 추고 있는 걸 발견했다. 세 명의 아가씨와 세 명의 남자. 그중 한 명은 춤을 잘 추지 못했는데, 동작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느려서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위지불이는 그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 남자는 춤을 잘 출 줄 모르지만, 대중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다시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남원 사람보다 피부가 조금 희고, 생김새가 좀 낯익었다.
위지불이는 자신이 고향을 그리워해 착각한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셋째 오라버니가 맞는 것 같았다.
셋째 오라버니는 그녀의 친오라버니가 아니라 위지 가문의 방계 형제자매 중에 셋째였다. 그래서 위지불이는 그를 셋째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들은 함께 자객의 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 위지불이는 그저 후보 자객일 뿐이었지만, 머리와 체격이 좋은 셋째 오라버니는 이미 자객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기지도 남달라서 가문의 어른들은 그에게 많은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랬던 셋째 오라버니는 남원에 파견된 뒤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죽었는지, 잡혔는지, 길을 잃었는지… 마치 실이 끊긴 연처럼 감감무소식이었다. 가문에선 그의 실종 때문에 슬퍼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자 점점 무뎌졌다.
사실 셋째 오라버니처럼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은 숫자도 적지 않기에 다들 조용히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셋째 오라버니가 왜 남원에서 춤을 추고 있는 거지?
그녀는 큰 나무 뒤에 숨어서 셋째 오라버니를 자세히 관찰했다. 세 쌍의 남녀는 짝을 지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와 춤을 추는 아가씨는 피부가 조금 까맣긴 했지만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큰 눈, 춤을 추는 자태가 매혹적이었고 눈빛에도 총기가 가득했다.
셋째 오라버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가씨의 눈빛도 계속 셋째 오라버니의 얼굴에만 머물렀다. 위지불이는 이런 분야에 좀처럼 눈치가 없었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는 달콤함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셋째 오라버니와 그 아가씨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 오직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저렇게 부드럽고 뜨거운 눈빛을 보낼 수 있을 터.
그녀는 곡조가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과연, 셋째 오라버니는 그 아가씨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위지불이는 모자를 이용해 제 얼굴을 감추려고 했지만, 실상 그녀가 남장을 하고 있었기에 알아볼 일은 없는 듯했다. 그녀는 안심하고 그 뒤를 따라붙었다. 풍우교를 지나자 한 무리의 병사들이 고함을 치면서 거리를 지나갔다.
“폐하의 명이다. 성문을 닫아라. 폐하의 명이다. 성문을 닫아라!”
위지불이는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성문 하나 닫는 것 가지고 왜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거야! 누구 보라고!
위지불이는 셋째 오라버니의 뒤를 쫓았다. 그는 타곤성의 좁은 거리들을 가로지르다, 꽃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대나무 다락집에 다다르자 걸음을 늦추었다.
셋째 오라버니는 그 여인의 손을 잡은 채 다락집으로 들어갔다. 이층 복도에선 부인 한 명이 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재빨리 위로 올라간 셋째 오라버니는 부인에게 깍듯이 예를 보이더니 아이를 건네받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처음 보는 그의 자상한 모습에 위지불이는 얼이 쏙 빠졌다. 저 사람이 위풍당당하던 셋째 오라버니가 맞단 말인가? 그는 늘 공자의 원한을 갚을 생각에 두 눈이 벌게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젊은 여인의 얼굴에도 입술을 맞췄다. 저런 채신없는 오라버니 같으니. 위지불이는 제 얼굴이 다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위지불이는 여인의 머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인은 머리를 틀어 올리곤 한쪽에는 깃을 꽂고 다른 한쪽엔 오색실을 감고 있었다. 남원에서 혼인한 여인들이 하는 머리 모양이었다. 위지불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셋째 오라버니가 남원에서 혼인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저 아이는 셋째 오라버니의 아이일 터.
분명 공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남원에 온 게 아닌가? 근데 복수는 커녕 혼인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니. 게다가 한눈에 봐도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묵직한 보따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어차피 난 중독된 몸. 괜히 집으로 돌아가 자식을 먼저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부모님에게 안겨 드려야 할까. 오라버니처럼 남원에서 사내를 찾아 혼인이나 할까? 죽기 전에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내 핏줄은 잇는 셈이니 죽어도 그리 여한은 남지 않을 텐데.’
한참 골똘히 생각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뒤를 돌아보니 웬 까무잡잡한 청년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위지불이를 바라보았다.
“수상쩍게 여기서 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말해라!”
위지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얌전히 서 있었구먼.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널 건드렸어?’
그녀가 대답이 없자 청년이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여기 수상한 자를 잡았다. 다들 이리 와봐!”
그녀가 슬쩍 도망가려 하던 찰나,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이 그녀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어딜 내빼려고. 어서 잡아!”
위지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다들 오해야.”
“아무것도 안 해?”
까무잡잡한 청년이 눈을 치켜뜨며 그녀를 추궁했다.
“나무 뒤에 숨어서 한향罕香이를 몰래 쳐다봤잖아. 어디서 발뺌이야? 이 호색한 같으니!”
“한향이? 내가 몰래 지켜봤다고? 어서 경용景容을 불러. 이 자식을 호되게 패 줄 거니까!”
그녀가 ‘경용’이란 이름을 부르자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눈썰미가 정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셋째 오라버니가 맞았다. 그의 이름이 바로 ‘위지경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누군가 다락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경용 형님, 한향이를 몰래 지켜보는 망나니를 잡았으니 어서 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