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4화
“폐하께서는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야.”
강암룡은 위지불이를 달래려 했다.
“불이, 비록 넌 동월 사람이지만 이곳은 남원이고 폐하는 남원의 군주이시다. 누구도 폐하께 이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다.”
하늘 아래서 황제에게 대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제화는 불꽃이 활활 타고 있는 위지불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데 강암룡의 한마디가 그를 깨우쳤다. 어쨌든 그는 황제였고, 황권이 무너져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남제화는 냉정하게 말했다.
“짐에게 소리를 질러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게다가 생사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위지불이는 입술을 꽉 깨물며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억지로 삼켰다. 절대로 남원의 개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전각 안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남제화의 눈빛은 음울하고도 강렬했다. 강암룡은 조심스럽게 권했다.
“폐하, 불이가 나이도 어리고 철도 없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원래 저런 성격이지 않습니까?”
남제화는 어두운 안색으로 녀석이 들어간 문을 계속 노려봤다. 그러나 위지불이는 이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강암룡이 은근슬쩍 물었다.
“폐하, 나사 공주를 불러올까요?”
“썩 꺼지거라!”
남제화는 강암룡을 확 밀치고 노기등등하게 걸어가 버렸다.
그날 밤, 아무도 식사를 하러 나오지 않았다. 강암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전에 없을 정도로 노발대발했고 위지불이는 정녕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은지 고집을 부렸다. 고집불통인 두 사람이 쉽게 승복할 것 같지 않자 궁녀들은 각자의 방에 식사를 차렸다.
강암룡은 남제화의 방에서 나온 음식이 거의 줄지 않은 걸 발견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신단 말인가. 반면, 위지불이는 음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정말 괴상한 녀석이었다. 황제와 그렇게 싸웠는데도 입맛은 또 좋은지 음식을 다 해치웠다.
* * *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남제화는 어제 한 말을 후회했다. 그도 문제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위지불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축적된 분노가 터져 애먼 사람을 잡은 것이다. 그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넋을 놓았다. 강암룡이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폐하, 아침 밥상을 차리게 할까요?”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후에 차리거라.”
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강암룡은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옆에 서서 기다렸다. 남원의 해는 아주 일찍 떠올랐다. 창살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봉리수 목재 바닥에 황금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간이 갈수록 해는 높아졌고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대전이 환하게 밝아졌다. 남제화는 밝은 빛 속에 앉아 노승이 선정禪定에 들어간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암룡은 참고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조언했다.
“폐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아침을 올리라 할까요?”
그제야 눈을 들어 편전 쪽을 바라본 남제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이는 아직 안 일어난 건가?”
평소 이맘때면 위지불이는 벌써 일어난 상태였다. 강암룡은 어제 싸운 일로 위지불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인이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남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위지불이와 함께 아침을 먹으려는 건 나름대로 화친을 표한 것이다. 강암룡이 보기에 이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고집불통 위지불이가 과연 고집을 꺾을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강암룡은 위지불이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불이, 일어났느냐? 불이, 불이?”
안에서 아무런 답이 없자 그는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
“불이!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일어나야 한다. 불이, 문 열겠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은 조용했고 휘장이 쳐져 있었다. 강암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가 높이 떴는데 아직도 잠을 자고 있다니, 정말 대단했다. 그가 휘장을 젖히며 말했다.
“불이, 이제 일어난 시간이…….”
강암룡은 눈을 크게 떴다. 침대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부자리엔 주름 한 올 없었다. 전날 밤 아예 이곳에서 잠을 안 잔 것인가…….
“어, 어디 갔지?”
아직 이른 아침인데다 밥도 먹지 않았으니 그리 멀리 간 것은 아닐 터. 근처에 있는 궁녀와 시종들에게 물으니 모두 불이 공자를 본 적 없다고 했다.
강암룡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침 일찍 도대체 어디를 갔단 말인가? 그는 평소에 위지불이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찾는데 녀석을 찾지 못하면 상황이 꽤 곤란해질 것이다. 그는 얼른 아랫사람을 보내어 녀석을 찾게 시키고 자신은 곧장 황제에게 갔다.
“폐하, 불이가 방에 없습니다. 아마도 밖으로 나갔나 봅니다. 먼저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제화가 물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디를 갔단 말이냐?”
“아마도.”
강암룡은 생각을 정리했다.
“불이는 근처를 걷고 있을 겁니다. 잠시 후에 돌아올 겁니다.”
남제화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식사를 차리거라.”
강암룡이 금령을 울리자 맑은 종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만약 위지불이가 들었다면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좁은 통치마를 입고 가느다란 허리를 드러낸 궁녀들은 머리에 쟁반을 이고 와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창 식사를 하는데 한 시종이 강암룡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남제화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강암룡이 웃으며 답했다.
“불이 공자를 찾아보라고 보냈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남제화가 읊조리듯 말했다.
“공작전에 가 보거라. 아마 그곳에 있을 것이다.”
강암룡이 답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 물어봤는데 안 왔다고 합니다.”
남제화는 찌푸렸던 미간을 풀며 말했다.
“밖에서 노는 게 습관이니 어디에서 놀고 있을 테지. 부엌에 불을 끄지 말고 남은 음식을 계속 데워 두라고 전하거라. 돌아와서 다시 데우려면 오래 걸릴 테니.”
“알겠습니다. 소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강암룡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녕 폐하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건 역시 위지불이군. 세 명의 공주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네.”
남제화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이건 왕가의 전통이었다. 천천히 씹고 목으로 넘기는 것을 중요시하는 식사법이었다. 그가 밥을 먹을 때, 때때로 사람들이 와서 강암룡에게 보고했다. 강암룡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남제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이미 상황을 묻는 표정이었다. 강암룡은 식은땀을 흘렸다.
“폐하, 이곳저곳 다 찾아다녔지만… 불이 공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남제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 없이 위지불이의 방으로 향하자 강암룡이 그 뒤를 따랐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 남제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엔 햇빛만 찬란할 뿐 고요했다. 그는 벽 쪽에 놓인 큰 상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곤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많았는데, 누군가 뭔가 찾으려고 뒤척거린 것처럼 어수선했다.
두 번째 상자를 다시 열어도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낯빛이 무거워진 그는 모든 상자를 열어젖혔다. 어느 것 하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상자 안에 무엇이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강암룡은 의아해했다.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된 걸까요?”
남제화는 상자 뚜껑 하나를 힘껏 내던지며 말했다.
“떠났다.”
“예? 떠났다고요?”
강암룡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디로 떠났단 말씀이십니까?”
“아마 동월로 돌아갔을 것이다.”
“폐하, 소인이 바로 사람을 보내 쫓겠습니다. 빠른 말을 타고 쫓으면 불이 공자를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
창가에 선 남제화를 햇빛을 받고 있었지만 따스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고 싶다면 가야지, 쫓을 필요 없다.”
가 버리는 게 더 좋다. 위지불이는 분명 그의 장애물이었다. 녀석이 가 버려야 그는 비로소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갈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은 폭풍전야였다. 그는 반드시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폐하.”
강암룡은 걱정스러운 듯 그를 바라봤다. 남제화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제화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 그는 곧장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위지불이가 뱀을 보고 놀랐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맨발로 뛰쳐나온 녀석은 온몸을 던져 그를 꼭 껴안았다.
마치 죽기 전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녀석은 그에게 의지했다. 그는 그때 유쾌하고 만족스러웠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만족감을 주진 못했다. 마음의 주름이 하나하나가 펴지고, 꽉 차 있는 것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짐의 명을 전하여라. 즉시 성문을 닫고, 성 전체를 수색하여 위지불이를 붙잡아라. 또한 동월 쪽으로도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든 위지불이를 붙잡아 데려오거라.”
이 두 가지 조치면 위지불이는 이미 잡혔다고 볼 수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강암룡은 빠르게 명령을 전달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의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무언가 일이 잘못된 것 같았다. 그저 동월 놈 하나가 도망갔을 뿐인데 폐하께서 저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위지불이가 처음 왔을 때의 소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미 세 명의 공주가 궁에 들어왔고, 폐하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공주들과 웃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도대체… 폐하께서는 남자를 좋아하신단 말인가, 여자를 좋아하신단 말인가?
* * *
위지불이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남원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치솟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동월로 돌아가라고 하다니! 남제화는 그녀에게 약간의 정도 없는 것이다. 정말 그에게 실망했다.
떠나겠다는 결정은 순간적인 것이었지만,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결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몇 개의 큰 상자 안엔 그녀가 모아 둔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는 남제화가 큰 마차로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말해서 그녀는 금의환향하는 걸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상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마차는커녕 호위도 없이 홀로 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