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3화
그날부터 궁중의 판도가 달라졌다. 아운소의 추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남제화는 다시 나사를 데리고 궁 안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일시에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기뻐했고, 어떤 사람은 그로 인해 근심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소리나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무관심했지만, 어떤 사람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화가 나서 미치겠는 사람은 당연히 고여아였다. 그녀는 이제껏 아운소에게서 황제를 빼앗아 올 방법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아운소가 아니라 나사였다.
또 한 번 경쟁에서 밀리자 그녀는 화장대 위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바닥에 던져 버렸다.
“나보다 예쁘지도 않은 것들한테 어찌… 황상께서 눈이 먼 것이 아니더냐!”
옥합이 놀라서 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공주, 뒤에서 폐하에 대한 욕을 해서는 안 됩니다. 혹 폐하의 귀에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황후는커녕 비도 되지 못할 겁니다.”
고여아는 그녀를 밀어내며 분노를 쏟아 냈다.
“폐하께서 우리 마온극 부족은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는데, 몇 마디 푸념조차 못한다고? 나더러 숨 막혀 죽으라는 것이냐!”
옥합이 말했다.
“처음엔 폐하께서 아운소 공주를 가까이하셨지만 지금은 나사 공주를 곁에 두시잖습니까.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예요.”
고여아는 어리둥절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폐하께서는 당초 석 달의 기한을 정하셨습니다. 세 공주들을 비교하시려고요. 지난번엔 폐하께서 아운소 공주를 파악하려고 가까이하신 것일 테지요. 지금의 나사 공주도 마찬가지예요. 폐하께서 지금 알고 싶어 하시는 사람이 나사 공주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은 누구 차례일까요? 폐하께서 곧 공주를 찾아오실 겁니다.”
“네 말은 이게 결국 새옹지마라는 말이구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옥합은 잠시 생각하더니 또 말했다.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소인은 늘 폐하의 취향이 위지불이와 관련 있다고 생각했어요. 애초에 아운소와 위지불이가 가까이 지내자 폐하께선 아운소를 특별 대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나사를 가까이하니 폐하께서 나사를 찾아가셨지요.
공주, 공주는 어째서 아운소 공주나 나사 공주처럼 불이 공자와 가까워지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소인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고여아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 동월놈은 정말 싫단 말이다. 위지불이는 고작 동월 사내일 뿐인데 어떻게 폐하의 마음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네가 너무 과대평가한 건 아니고?”
비록 하녀였지만 옥합은 아주 세심했다. 그녀가 고여아 곁에 있기에 오마 족장은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곁에 있으면 무엇 하나. 고여아가 그녀의 조언을 듣지 않으니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정작 나사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호의에도 그녀는 예전처럼 조용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였다. 그녀는 매우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그렇다고 남제화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남제화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면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 겨루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군왕으로서 남제화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나사 공주의 인내심도 뛰어났다. 그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듣자 하니… 나사 공주는 요리 솜씨가 훌륭하고 하던데. 불이가 항상 이곳에서 폐를 끼친다고 들었소.”
“예전에 동월에 잠시 머물면서 여러 가지 동월 음식을 배웠습니다. 불이 공자는 아마 동월 음식이 그리워서 자주 들르는 것 같습니다.”
남제화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짐은 나사 공주가 동월에 간 적 있다는 걸 몰랐소.”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남제화는 그녀가 이 일에 대한 대화를 꺼린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더 묻지 않았고 나사에게 웃으며 말했다.
“짐이 나사 공주의 요리를 먹을 만큼 복이 있는지 모르겠구려.”
나사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말했다.
“그게 뭐가 어렵습니까? 폐하께서 제 요리를 드시고 싶다고 하시니 제가 더 영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사 공주는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남제화는 정녕 나사 공주가 부족의 공주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운소처럼 자유를 갈망하지도 않고, 고여아처럼 야성미가 넘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인내심 있고 단아한 모습을 보였다. 그게 마치 동월에 사는 천금千金 같았다. 설마 잠시 동월에서 생활했기 때문인가?
그는 뒷짐을 쥐고 천천히 서성였다. 석 달의 기한 중에 벌써 보름이나 지났다. 누구일까? 태황이 낙점한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처음엔 세 공주 모두 나이가 어려서 다루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접촉해 보니 자신이 그녀들을 과소평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들은 정말이지 참을성이 대단했다. 아마 다들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지.
* * *
아운소의 끈질긴 가르침 덕분에 위지불이는 호로사의 곡조를 가까스로 익혔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끝까지 연주하는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창이나 막대기를 휘두르며 놀았다. 자수나 요리는 물론 시와 노래에 관해서도 지식이 전무했다. 동월에서 좋은 가문에 시집가려면 이런 것들은 필히 갖춰야 했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늘 걱정이 많으셨다. 늘 위지불이가 시집도 못간 노처녀로 늙을까 봐 걱정하셨다.
하지만 이제 호로사를 불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럴듯한 모양이 갖춰진 셈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곡조를 익히고 춤을 출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의 삶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회칠을 한 동경銅鏡과도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동경이 깨끗하게 닦여 다시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위지불이는 자신에게 희망이 생겼다고 느꼈다. 너무 기쁜 나머지 그녀는 계단을 깡충깡충 뛰어 올라갔다.
복도에 서 있던 남제화는 멀리서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봤다. 두 팔을 휘저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다가온 녀석은 그의 눈 밑을 지나 쿵쿵거리며 위층으로 올라왔다. 고개를 든 위지불이는 남제화를 발견했다.
요 며칠 그들은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곤 했다. 어차피 죽는 것도 겁내지 않았는데, 남원의 개 따위를 겁내겠는가? 하지만, 오늘 기분이 좋았던 위지불이는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폐하.”
남제화는 깜짝 놀랐다. 위지불이가 평소처럼 자기를 무시하고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인사를 건네다니! 뒷짐을 지고 있던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그는 참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불렀다. 위지불이는 몸을 돌리고 물었다.
“왜요?”
“네 얼굴이 왜… 그런 것이냐?”
그는 허리를 굽힌 채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변화를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위지불이의 얼굴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별거 아니에요.”
위지불이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얼굴 근육이 뻐근했다. 호로사를 너무 열심히 불어서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난 것 같았다. 별로 티도 안 나는데 어떻게 그가 알아차린 건지.
그녀가 몸을 돌리자 남제화가 손을 뻗었다.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잡고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다 얼굴에 경련이 왔느냐?”
위지불이는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가 이렇게 온화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동안 그들 사이에 벌어졌던 간격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뺨을 살살 주무르며 물었다.
“뭘 했기에 얼굴에 쥐까지 나는 것이냐?”
그녀가 대답했다.
“호로사를 불었어요.”
잠시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듣자니 아운소가 호로사 연주를 가르쳐 준다던데?”
“폐하의 소식통은 역시 대단하네요.”
“짐도 눈이 있다.”
그가 복도에 있을 때마다 아운소와 위지불이가 어울리는 걸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연주를 하고 다른 한 명이 춤을 췄다. 수려한 사내와 예쁜 여인… 그리고 비슷한 나이까지. 모든 것이 잘 어울렸다.
“아운소는 짐의 사람이다. 그녀를 탐하지 말거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위지불이는 그의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운소 공주와는 친구 사이일 뿐입니다.”
남제화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남자와 여자가 정말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저와 폐하가 바로… 제 말은 폐하께서는 제가 자객인 줄 알면서도 저와 친구가 되셨죠. 전 그런 폐하의 넉넉함을 감탄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하셨어요? 더군다나 폐하께서 친히 승낙하셨지 않습니까? 저와 아운소 공주가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말이에요.”
남제화는 미간이 일그러졌다.
“짐이 이제부터 허락하지 않는다면?”
“지금 폐하라는 신분으로 저를 억압하시는 거예요?”
위지불이는 냉소를 지었다.
“안타깝군요. 이제는 폐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거예요.”
“무엄하다!”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세요.”
위지불이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남원의 황제이고 나는 동월 사람이니… 절 마음대로 하실 수는 없어요.”
남제화는 화가 나서 분통을 터뜨렸다.
“그럼, 동월로 돌아가거라.”
위지불이는 남제화가 돌아가라고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폐하, 그 말은 저에게 죽으라는 말씀이세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강암룡은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론 그들의 사이가 더 틀어질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남제화와 위지불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분명 남제화는 위지불이를 끔찍이 총애하지 않았는가. 어쩌다 두 사람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사실 남제화는 황제라 먼저 인사할 필요가 없었지만, 위지불이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건 정말 안 될 일이었다. 일국의 황제에게 이러는 건 사리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정말 죽는 게 두렵지도 않단 말인가?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남제화는 엄연히 황제인 것을…….
“불이.”
결국 그가 다가와 중재에 나섰다.
“폐하 앞에서 이 무슨 버릇없는 행동인가?”
동월에 돌아가라는 말을 하자마자 남제화는 깊게 후회했다. 그건 홧김에 내뱉은 말이지 진심이 아니었다. 위지불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해 봐요.”
위지불이는 털을 더 바싹 세운 채 폭발했다.
“폐하께서는 저를 죽이고 싶으신 거죠? 그래서 떠나라고 하신 거죠?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