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2화
이틀 동안 남제화는 공작전을 찾지 않았지만 아운소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소상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왜 폐하께서 안 오시죠?”
아운소는 잘 말린 채색 깃털로 머리를 장식하며 대충 대답했다.
“바쁘신가 보지.”
“아무래도 이상해요.”
소상이 말했다.
“그날 폐하께서 저희를 다 물리시고 공주와 단둘이 계셨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공주께서 폐하께 미움을 산 건 아니에요?”
아운소는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사실 그녀는 그가 표출한 또 다른 감정을 간과하고 있었다. 뒤늦게 떠올린 그 감정은 바로 분노였다. 그는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분노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노여움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그에게 미움을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날 그는 그렇게 떠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남제화가 그녀에게 화났다는 말인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함부로 추측하지 마.”
소상이 그녀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공주, 폐하께서는 찾아오지 않으시지만, 공주가 폐하를 뵈러 가도 되잖아요.”
아운소는 완성된 머리 장식을 보면서 소상에게 물었다.
“예쁘니?”
소상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공주, 제가 중요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잖습니까?”
머리 장식을 다 꽂은 아운소는 눈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이게 나에게 중요한 일이야.”
그녀는 호로사 하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소상은 그녀 뒤를 쫓아가며 물었다.
“공주,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아운소는 씨익 웃었다.
“내 친구, 위지불이한테 갈 거야.”
소상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불이 공자는 그동안 나사 공주와 친해졌잖아요. 요즘 매일같이 옥천전에 있대요. 날이 저물 때까지 머물다가 돌아간대요.”
아운소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지금도 있어?”
“당연히 있겠죠.”
“잘 됐다. 멀리 갈 필요 없겠네.”
아운소는 호로사를 들고 즐겁게 달려 나갔다. 소상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한참 속상해했다.
정말 위지불이는 옥천전에 있었다. 그녀는 남제화와 마주치기 싫어 정전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날 밤, 큰 뱀에 놀라 쓰러진 그녀를 남제화가 구했다. 그는 그녀를 데려가 하룻밤을 재웠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뱀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훈향을 하라 분부했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그녀는 약간 뿌듯했다. 아직까지도 남제화가 제게 조금의 관심이 있는 것 아닌가.
그날 위지불이는 정전에 남아 계속 그를 기다렸다. 직접 만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궁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위지불이는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남제화는 그녀를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모처럼 먹은 마음이 다 식어 버렸다. 위지불이가 돌아보며 불렀다.
“폐하.”
그는 걸음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의 냉담함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위지불이는 생각했던 말을 전부 까먹어 버렸다.
“…어젯밤 감사했습니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되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위지불이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겨우 거처로 돌아갔다.
그녀가 중독된 후부터 그들의 관계가 이상해진 건 맞지만… 그래도 이제껏 서로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지으며 싱거운 농담을 건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지불이는 이제 남제화가 저를 싫어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자상하게 대해 줬던 그는 어디로 간 걸까. 이젠 남제화와 진정한 친구 사이도 못 되는 것일까. 한참 뒤, 그녀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남원의 개자식!’
그녀는 이제 살려 주겠다는 그의 약속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태도가 이미 모든 걸 다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위지불이는 오히려 기운이 났다. 설령 그녀의 목숨이 이미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더라도, 더 이상 이렇게 한탄하거나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하루하루를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지니, 그녀는 또다시 앞만 보고 나아가던 예전의 위지불이로 돌아왔다.
궁중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옥천전뿐이었다. 그곳에 가야 그녀는 고향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나사와 임안성 안의 재미난 일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아운소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 조금 뜻밖이었다. 온종일 남제화와 함께 있기도 바쁜 거 아니었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지? 아운소는 손에 들고 있던 호로사를 위지불이에게 건넸다.
“불이, 앞으로는 풀피리를 불지 말고 이 호로사를 불어요. 불이가 호로사를 불면 내가 춤을 출게요.”
그녀는 머리 위에 꽂은 깃털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쁘지 않아요? 내가 새로 만들었어요.”
위지불이는 억지로 건네받은 호로사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주는 거예요?”
“맞아요. 내가 어떻게 부는지 가르쳐 줄게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나사가 웃었다.
“아운소 공주, 불이 도령에게 호로사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걸 폐하께서도 아십니까?”
아운소가 말했다.
“폐하께서 설마 이런 일에 관여하시겠어요?”
“그건 또 모를 일이죠.”
나사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폐하께서는 당신을 특별히 대우하십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시녀 향미가 날쌔게 달려왔다.
“공주, 폐하께서 오셨어요.”
나사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아운소를 바라보았다.
‘보세요. 제 말이 맞죠?’
아운소는 좀 뜻밖이었다. 이틀 동안이나 그녀를 찾지 않더니 왜 또 왔을까? 위지불이는 그 대화엔 관심이 없다는 듯 호로사를 가지고 놀았다.
남제화는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점잖게 들어왔다. 모두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위지불이도 함께 일어섰지만,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남제화는 위지불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나사를 불렀다. 나사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 오늘은 어인 일로 짬을 내어 이곳에 찾아 주셨습니까?”
“짐이 공주를 보러 왔소.”
남제화가 자리에 앉았다.
“입궁한 지 시일이 꽤 지났는데 이제는 좀 궁에 익숙해졌소?”
갑작스러운 관심에 나사는 어리둥절했다.
“폐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관리와 시녀들이 잘 보살펴 주어서 이미 적응했습니다.”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다른 말을 않자 모두 침묵했다. 다들 황제가 옥천전에 온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모두 곤혹스러웠다. 나사가 위지불이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일어났다.
“나사 공주, 그럼 난 이만 돌아갈게요. 잘 놀다 가요.”
그녀가 사용한 어투는 친구에게 쓰는 것이므로 황제를 완전히 무시한 언행이었다. 어차피 독에 걸렸는데, 더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나사가 따라 일어섰다.
“내가 바래다줄게요.”
아운소와 남제화를 위해 두 사람이 나가려고 하던 그때, 남제화가 입을 열었다.
“나사 공주, 멈추시오.”
나사가 뒤를 돌아보자 남제화가 말을 이었다.
“불이는 공주들보다 궁에 머문 기간이 더 기니 길을 잃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그 말의 속뜻은 배웅할 필요가 없단 것이었다. 위지불이는 칼집 위에 놓인 손을 힘껏 눌렀다. 정말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다. 반면 아운소는 영민하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폐하, 나사, 저도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남제화가 더 이상 말이 없자 아운소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른 위지불이 곁에 가서 눈을 깜빡거렸고 두 사람은 함께 옥천전을 나섰다.
아운소는 옥천전 대문을 나오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글생글 웃었다. 위지불이는 뭔가 이상했다.
“폐하가 옥천전에 머물겠다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죠?”
신비롭게 미소를 지은 아운소는 그녀를 이끌고 꽃이 만발한 곳으로 걸어갔다.
“기뻐요.”
아운소가 웃으며 되물었다.
“왜 기분이 나빠야 하죠?”
아운소는 비로소 유력한 황후 후보에서 멀어진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또다시 그녀에게 집중될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군주의 곁에서 노심초사할 일도 없을 것이다. 위지불이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그게 왜 좋아요? 설마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아운소가 말했다.
“고여아나 나사에 비해 전 황후 자리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죠. 다만… 전 그들과 똑같이 부족 공주예요. 황후가 되는 건 부족의 명예와도 관련된 것이기에 열심히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죠.”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황후가 되기 싫은 공주는 좋은 공주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위지불이의 눈매가 활짝 펴지는가 싶더니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로 황후가 되기 싫단 말이에요?”
아운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 두 사람의 비밀로 해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말하지 않을게요.”
비록 며칠 동안 아운소를 보지 못했지만, 위지불이는 진실로 이 아가씨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귀영화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한 것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지불이는 곧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런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폐하께서 정하시면 그 사람이 황후가 되는 거죠.”
아운소는 옥천전을 바라보며 재잘거리듯 말했다.
“이제 나사가 황후의 유력한 후보가 되었죠.”
위지불이 역시 옥천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럼… 폐하께서 이번엔 나사를 좋게 보셨다는 거예요?”
“나사 공주가 폐하의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운소가 말했다.
“어찌 되었든 잠시 동안 폐하의 곁에 있을 사람은 그녀가 될 거예요.”
위지불이는 울분을 토했다.
“폐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계속 내 사람을 뺏어가잖아요.”
아운소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불이 공자…….”
그녀가 얼굴을 복숭아처럼 붉히며 부끄러워하자 위지불이는 의아했다.
“…왜 그래요?”
“방금… 저도 불이의 사람이라고…….”
위지불이는 어리둥절했다가 문뜩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남장을 한 상태였다. 이런 말은 오해를 주기 쉬웠다. 아운소는 남제화의 여인이니, 앞으로 주위를 기울여야 했다.
“제 말은 공주와 나사 공주는 모두 저의 친구라는 뜻이었어요.”
위지불이의 설명은 아운소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았다. 아운소는 빙글빙글 웃어 보였다. 그녀의 팔을 잡으며 아운소가 말했다.
“불이, 우리 숲으로 가요. 내가 호로사 부는 법을 알려 줄게요. 호로사를 불 수 있게 되면 내가 춤을 보여 줄게요.”
위지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부족의 공주들은 다들 이렇게 언행이 가볍나?’
그녀는 지금 남장을 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녀의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아운소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