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0화
남제화는 괴상한 풀피리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전당을 서성거렸다. 심신을 수양한지 십여 년이 되었는데, 애송이 하나가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강암룡은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무슨 일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아운소 공주 때문입니까?”
손을 내저은 남제화는 돌연 그에게 물었다.
“암룡, 좋아하는 여자가 있느냐?”
깜짝 놀란 강암룡은 조금 억울한 듯 그를 바라봤다.
“폐하, 어찌하여 그 일을 물으십니까?”
어리둥절한 남제화는 그제야 생각났다. 강암룡은 원래 한 아가씨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그 뒤로 그는 허송세월을 보내며 지금까지 장가를 가지 않았고 남제화처럼 외톨이 신세였다.
사실 강암룡에게 물을 것도 없었다. 남제화도 젊었을 때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사앵앵에게 사장풍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역참에 남아 매일 장작을 패고 물을 길으며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사장풍과 싸우는 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적지 않은 나이건만. 이렇게 들뜨고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폐하.”
강암룡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자 더욱 심란해졌다.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손을 내저으며 곧장 서재로 향했다. 강암룡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혹시 아운소 공주와 싸우셨나?
이날 저녁, 남제화는 식사 자리에 위지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강암룡에게 녀석을 데려오라 명했다. 곧 돌아온 강암룡은 위지불이가 나사 공주의 처소에서 이미 배불리 먹었다고 말을 전했다. 남제화는 아무 말도 없이 젓가락을 들고 그릇을 힘껏 찔렀다.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 * *
밤은 점점 깊어졌다. 위지불이는 근래에 깊이 잠을 자지 못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밤을 꼬박 지새우곤 했다.
밤새 뒤척이던 그녀는 어떤 발소리를 들었다. 대전 안에서 궁녀와 시종들은 맨발로 아주 조용히 걸어 다녔기에 감히 발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걷는 사람은 그녀 말고는 오직 남제화뿐이었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다가오더니 침대 옆에 멈췄다.
위지불이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방 안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그를 등지고 누워서 휘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그녀를 불렀다.
“불이.”
위지불이는 대답하지 않고 자는 척했다.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남제화가 말했다.
“네가 일부러 호흡을 억누르는 게 다 들린단다.”
위지불이는 그제야 그가 침대 옆에 서서 그녀의 호흡 소리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위지불이는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폐하께서 웬일로 이곳에 오셨어요?”
잠시 침묵을 지킨 남제화는 말했다.
“내게 와서 자거라.”
“왜요?”
그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짐이 잠을 못 잔다.”
“또 제 손을 잡고 주무시겠다는 거예요?”
“흐흠… 그래.”
“싫습니다.”
“왜?”
“폐하께는 이제 세 명의 공주가 계시는데 어째서 저를 찾으시는 거예요?”
남제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혼례도 안 올렸는데 어떻게 잠자리에 함께 들겠느냐?”
위지불이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나도 처녀란 말이에요! 어떻게 남자랑 한 침대에서 잘들 수 있겠어요!”
위지불이의 답이 없자 남제화는 묵직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위지불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안 갈래요.”
퉁명스러운 태도에 남제화는 결국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짐은 황제이니라.”
“폐하께서는 남원의 황제이고 저는 동월 사람입니다. 저는 폐하의 백성이 아니에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남제화는 오히려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짐에게 이렇게 무례하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단 말이냐?”
어둠 속에서 위지불이가 조소했다.
“이미 기이한 독에 중독됐잖아요. 살겠다는 생각 따위는 예전에 버렸어요.”
“…….”
남제화는 말문이 막혔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그는 돌아섰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위지불이도 안정을 되찾았다. 잠이 안 올 때마다 왜 그녀를 찾아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제화는 씩씩거리며 침전으로 돌아와 강암룡을 불렀다. 강암룡은 황제가 자기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자기를 부르는 건 분명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지체할 겨를이 없다고 생각한 강암룡은 웃옷을 대충 걸치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전각에 이르니 남제화는 침상 머리에 앉아서 서책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가 예를 취했다.
“폐하, 저를 찾으셨습니까?”
남제화는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네 뱀들은?”
“…네? 무슨 뱀이요?”
남제화는 책을 보며 가볍게 말했다.
“뱀 몇 마리를 위지불이의 침대에 풀어놓거라.”
강암룡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건…….”
오늘 폐하의 심사가 좋지 않았던 건 위지불이와 싸웠기 때문이었군.
“뭐해. 얼른 처리하지 않고.”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강암룡은 뒤로 물러나며 편전 쪽을 힐끔 쳐다봤다. 예전에도 황제는 그에게 위지불이의 침대에 뱀을 풀어놓으라고 암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땐 어디까지나 암시일 뿐이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황제가 정말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남제화 곁에서 보좌한 세월이 결코 짧지 않기 때문에, 강암룡은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황제가 어찌……. 참 이상한 일이었다. 위지불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황제를 이렇게 화나게 했단 말인가? 그것도 한밤중에 뱀을 풀어놓으라고 할 만큼?
사실 지금 당장 뱀을 풀어놓기는 좀 곤란했다. 예전에는 위지불이를 상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할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풀어놓을 뱀도 없었다. 도대체 이 늦은 시각. 어디에 가서 뱀을 잡아 온단 말인가?
남제화가 나간 후, 잠이 완전히 깬 위지불이는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러다 불쑥 화가 나 침대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만약 남제화가 와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잠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목이 말라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물을 마시고 막 휘장을 여는데 비리고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위지불이는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있는 부싯돌을 집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녹색 빛을 뿜는 두 개의 눈동자가 보이자 그녀는 경악했다. 그 눈동자는 점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위지불이는 허둥지둥 책상에 있는 촛대에 불을 붙였다. 불빛을 비추자 눈동자는 움츠리듯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뜻밖에도 굵은 뱀이 고개를 치켜든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촛대를 꽉 쥐고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폐하!”
평소 거칠고 걸걸한 목소리가 이번엔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변했다. 깊은 밤에 울리는 비명은 더욱더 섬뜩하게 들렸다.
그 긴 비명은 넓은 전당을 통과해 남제화에게 닿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도깨비처럼 어둠을 헤치고 달려가 위지불이의 처소에 들어갔다.
그가 들어올 때까지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그를 본 순간 눈이 뒤집히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촛불이 꺼지자 방 안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남제화는 다급하게 휘파람을 불어서 거대한 뱀을 쫓아냈다. 한걸음에 다가간 그는 위지불이를 안아 올렸다.
“불이! 불이. 일어나 보거라. 이제 괜찮다. 뱀은 도망갔다.”
위지불이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손발이 축 늘어진 그녀는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그는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우선 응급조치를 위해 그녀의 인중을 힘껏 눌렀다. 곧이어 위지불이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며 호흡을 내쉬었다.
“불이, 어때, 좀 나아졌느냐?”
남제화는 그녀의 가슴을 두드려 숨이 고르게 돌도록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가슴에 올라가기도 전에 위지불이가 미약한 목소리로 두 글자를 내뱉었다.
“…베개.”
남제화는 더 묻지 않고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다 그녀에게 주었다. 위지불이는 가까스로 베개를 품에 안고 나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온몸에 힘이 모조리 빠진 위지불이는 남제화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남제화는 얼른 그녀를 끌어안았다.
“겁내지 말아라. 뱀은 이미 사라졌다.”
위지불이는 너무 놀라서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팔을 꼭 껴안고 말했다.
“폐하, 저를 데리고 가요. 여기 있고 싶지 않아요. 너무 무서워요.”
남제화는 그녀를 그 자리에서 일으키고 허리를 구부렸다.
“못 걸을 것 같으니까. 업혀라.”
위지불이는 정말 다리에 힘이 빠져서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그녀는 베개를 껴안은 채 남제화의 등에 올랐다. 남제화는 그녀를 업은 채 자신의 침전으로 갔다. 침대를 정돈하고 그가 막 자리를 떠나려는데, 위지불이가 팔을 붙들었다.
“폐하 어디 가세요?”
여전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려 주는 듯했다. 남제화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저 살짝 놀라게 해서 제 옆으로 오게 만들려고 한 것뿐인데……. 강암룡, 그 모자란 놈이 영사를 데려와 이렇게 일을 망칠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마터면 녀석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가서 베개를 가져오마.”
위지불이가 말했다.
“폐하, 휘장을 열어 놓으세요. 너, 너무 무서워요.”
그녀는 몸을 잔뜩 굽힌 채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 처음 남원을 찾았을 때의 용맹했던 자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한없이 가여운 모습을 했다.
열일곱 살의 사내아이가 놀라서 이리 처량한 꼴이 되다니……. 따지고 보면 좀 우스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남제화는 애써 웃음을 참고 마음속으로 자신과 강암룡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는 목청을 높여 베개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침대 머리맡의 등불도 끄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베개를 사이에 두고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위지불이는 여전히 베개를 꼭 붙든 채, 다른 한쪽 손으로는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얇은 옷감 사이로, 남제화는 그녀의 차가운 손에 여전히 미약한 떨림이 남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등을 덮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내가 있으면 뱀은 감히 오지 못할 것이다.”
“왜 뱀이 나타난 거죠?”
위지불이가 물었다.
“누가 오라고 했나요? 강암룡이 그랬어요?”
“…그건 영사였다.”
남제화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사가 스스로 찾아온 거지.”
“영사가 왜 하필 내 방으로 들어오냐고요.”
“혹시… 너와 인연이 있는 건 아닐까.”
순간 팔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위지불이가 그의 팔을 힘주어 쥔 탓이었다. 그녀가 험상궂게 소리쳤다.
“인연은 개뿔! 이놈의 황궁은 뱀 소굴도 아니고 무슨 뱀이 큰 거 작은 거 종류별로 다 있어요? 더는 여기 있기 싫어요, 동월로 돌아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