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99)화 (798/1,192)

제799화

아운소는 문득 깨달았다.

“그렇군요. 그래서 그날 불이가 폐하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군요. 그것도 모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남제화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한다면 공주도 짐의 몸을 베고 누워도 좋소.”

남제화의 말에 아운소는 깜짝 놀랐다. 순간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폐하…….”

남제화가 다시 물었다.

“공주에게 짐과 불이 중에 선택하라고 하면 누구를 고를 것이오?”

아운소는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말했다.

“당연히 폐하를 선택할 것입니다.”

남제화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짐이 공주보다 나이가 좀 많아서 짐을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짐을 선택하겠다고 하니 안심이 되는구려.”

* * *

위지불이는 나사가 동월 음식도 할 수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식탁에 있는 음식을 보고 있자니 정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수정주자水晶肘子, 바삭한 오리 요리, 삼선三鮮볶음, 가지 양조림, 백교白茭 만두…….

“나사 공주, 어떻게 이런 요리를 할 수 있어요?”

그녀가 놀라서 물었다. 나사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전 동월에 가 봤거든요. 도성에 잠시 머물기도 했었죠. 그때 배운 거예요.”

위지불이는 조금 부끄러웠다. 비록 임안성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에 오랫동안 지낸 건 위지불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동월의 음식은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불이 공자, 어서 드셔 보세요.”

나사가 음식을 청했다.

“맛이 어떤지 봐 주세요.”

위지불이에게 이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건 굉장한 기쁨이었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고 다급하게 가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푹 익은 가지가 입안에서 녹아 없어지자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어요.”

나사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공자가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위지불이는 모든 요리를 다 맛보더니 나사에게 물었다.

“공주, 갑자기 동월 음식은 왜 만든 거예요?”

나사가 대답했다.

“저도 당시 동월에 혼자 있어서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알아요.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 조금이라도 그리운 마음이 나아지니까요.”

위지불이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나사 공주는 정말 이해심이 많군요.”

“과찬이세요.”

나사는 그녀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공자,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오세요. 나사가 해 드릴게요.”

“고마워요.”

위지불이는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사양하지 않을게요.”

생과일 한 접시를 들고 들어와 상에 올려놓은 시녀 향미는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께서 방금 공작전에 납시셨습니다.”

위지불이가 잠시 시선을 돌리자 나사는 향미를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어디서 뭘 하시든 감히 네가 무슨 상관이니?”

꾸중을 듣고 고개를 떨군 향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사는 웃으면서 위지불이에게 말했다.

“이 애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드세요. 식으면 맛이 없어요.”

위지불이는 입안에 있는 음식을 씹으며 물었다.

“나사 공주, 황후가 되고 싶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사는 말문이 막혔다.

“되고는 싶죠. 그러나 이건 오직 폐하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거예요. 원한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나사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볼 때는 십중팔구 아운소가 될 거예요. 춤도 잘 추고 폐하께서도 매일매일 보러 갈 정도로 좋아하시니까요.”

위지불이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밥만 먹었다.

* * *

그 시각 공작전. 남제화는 제게 예를 취하는 아운소를 일으켜 세웠다.

“무엇을 하고 있었소?”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운소가 말했다.

“막 산책을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폐하께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제화는 미소를 지었다.

“짐이 때를 잘못 잡았구려.”

아운소는 웃으며 부인하지 않았다. 소상이 눈짓했지만, 그녀는 그냥 모른 척했다. 남제화는 푹신한 긴 걸상에 앉아서 소상이 올리는 차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 웃었다.

“짐이 몇 번만 더 오면 공주의 무이차가 다 동이 날지도 모르겠소.”

아운소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 드셔도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니 그걸로 되었습니다.”

남제화가 찻잔을 내려놓고 손사래를 치자 아랫사람들이 모두 물러갔다. 아운소는 그가 하인들을 물리고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남제화는 성품이 온화해서 누구에게나 다정했지만, 그래도 그는 황제였다. 그동안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렇게 단둘이 방 안에 있는 것은 처음이기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폐하…….”

남제화가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러오?”

“아랫사람들을 물리시다니… 혹시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잠시 침음한 남제화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짐은 그동안 매일 공주를 찾아왔는데… 어째서 공주는 짐을 보러 오지 않는 것이오?”

남제화의 질문에 아운소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시니, 제가 폐하께 폐를 끼칠까 두려워서…….”

남제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매일매일이 바쁘다? 짐이 그렇소? 어째서 짐은 모르는 일이란 말이오?”

아운소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연히 남제화가 한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매일 시간을 내서 그녀를 찾아올 수 있었을까?

“이곳에 앉으시오.”

남제화는 옆자리를 툭툭 쳤다. 아운소는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으나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곁에 가서 앉았다. 남제화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자 아운소는 순간 제 손을 빼 버렸다. 남제화가 움츠러든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짐이 무섭소?”

부족의 공주들은 대개 성격이 거칠었고, 그건 아운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어린 아가씨였지만 감히 그녀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남원의 황제 앞에서도 제 성질대로 할 순 없지 않은가.

더구나 그녀에게는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황후가 되든 비빈이 되든 그녀는 결국 황제의 여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런 황제가 친밀감을 표현하는데 그녀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이번엔 남제화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 위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호흡이 엉키자 아운소는 정말 당황했지만,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남제화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그녀의 두 눈도 조금씩 크게 떠졌다.

그가 조금씩 가까이 올 때마다 그녀의 심장은 더욱더 격렬하게 뛰었다. 서로의 코끝이 거의 맞닿은 순간. 남제화는 그 상태로 멈춰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아주 자세히 관찰했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내 탐색하듯 다시 약간 얼굴을 옮긴 탓에 코끝이 서로 스쳤고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상태가 되었다. 아운소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남제화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도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숨을 쉬지 않을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천천히 호흡했다.

아마도 남제화의 생각도 그녀와 같으리라. 그도 숨을 죽이려고 애쓰는 듯 그녀의 얼굴에 내뿜어지는 호흡은 가벼웠다. 그 호흡은 너무 가벼워서 간지럽기도 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운소는 마음을 크게 먹고 눈을 딱 감았지만 끝끝내 예상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뜻한 열기가 점점 멀어지고 얼굴을 간지럽히던 호흡도 사라졌다. 아운소는 남제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허탈해 보였다. 아운소는 그를 불렀다.

“폐하?”

허공을 헤매던 남제화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왜 그러시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아니오.”

그가 다시 찻잔을 들었을 때 찻물은 이미 식어 버린 후였다. 그는 식어 버린 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차갑게 식은 차는 씁쓸했고 그의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았다. 아운소가 말했다.

“제가 다시 한 잔 타 드릴게요.”

“아니오.”

남제화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은 일이 있어 그만 가 봐야겠소.”

아운소는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왠지 오늘은 그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고 느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 * *

남제화가 정전으로 돌아왔을 때, 위지불이는 복도 기둥 아래 있는 긴 의자에 앉아서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통이 넓은 바지 밑으로 백옥 같은 두 발이 나와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 눈동자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제화는 그대로 스쳐 가려 했지만, 결국 위지불이 앞으로 다가갔다.

위지불이는 고충에 중독된 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패기를 잃어 시들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위지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위지불이가 얼른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걱정거리라도 있느냐?”

“…….”

그녀의 곁에 앉은 남제화는 위지불이의 작은 발에 시선을 꽂았다. 막 남원에 왔을 때, 녀석은 벗은 발을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제 신발을 벗고 다니는 것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고충에 대해 생각하느냐?”

위지불이는 피식 웃었다. 고충에 대해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그것은 이미 그녀의 몸 안에 있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심경. 비록 남제화가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충을 통제하는 사람은 여제였다. 그의 약속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무서우냐?”

위지불이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는 남원 땅을 밟을 때부터 살아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어요.”

남제화의 안색이 언짢은 듯 굳어졌다.

“나를 못 믿는 것이냐?”

위지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짐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하지 않았느냐? 어찌 믿지 못하고 괜한 생각을 하느냐?”

위지불이는 시선을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제화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져 버렸다. 손을 뻗은 위지불이는 복도 아래에서 잎사귀를 한 장을 따 연주를 시작했다.

연습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풀피리는 실력은 늘지 않았다. 곡조도 아름답지 않고 음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소리를 낼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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