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98)화 (797/1,192)

제798화

아운소는 나뭇잎 한 장을 가지에서 꺾었다.

“불이, 잘 봐요.”

위지불이는 단도를 갈무리하고 아운소가 나뭇잎을 입술에 갖다 대는 걸 바라봤다. 어찌 된 일인지 피리처럼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났다.

그녀는 동월에서 어떤 사람이 나뭇잎으로 휘파람을 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짧은 몇 마디의 휘파람도 너무 신기했는데, 아운소는 나뭇잎으로 곡조를 불었다. 게다가 이렇게도 듣기 좋은 곡조라니! 아운소는 깜짝 놀란 위지불이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고 싶어요?”

“네.”

위지불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싶어요. 가르쳐 줘요.”

아운소는 얇고 빳빳한 잎사귀를 골라 위지불이에게 주었다. 그리곤 잎사귀를 입술 바깥쪽에 대고 양 끝을 살짝 잡아당기라고 알려 줬다. 별로 힘들이지 않았지만 위지불이도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직 서툰 위지불이는 끝내 잎사귀를 찢어 버렸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멋쩍게 웃었다. 소상도 옆에서 한 손 거들었다. 잎사귀를 한 움큼 크게 따 놓고 기다렸다가 위지불이가 찢어 먹으면 얼른 건네주었다.

두 번째로 시도했을 때는 손으로 꼭 잡지 않아서 잎사귀가 날아가 버렸다. 그녀가 잽싸게 쫓아가 몇 번 손짓했지만 나뭇잎은 이미 구겨진 뒤였다. 아운소와 소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운소가 말했다.

“힘보다는 요령이 있어야 해요.”

아운소는 다시 나뭇잎 하나를 집어 들고 위지불이에게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제화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강암룡은 조심스럽게 옆에서 기다렸다.

“폐하, 불이 공자와 아운소 공주가 참 사이좋아 보입니다. 다만 화친을 위해 온 아운소 공주가 저러는 건 좀… 부적절하지 않을까요?”

남제화는 난간에 손을 얹은 채 느긋하게 말했다.

“불이와 아운소는 친구 사이일 뿐이다.”

강암룡은 남제화가 위지불이를 감싼다는 걸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위지불이는 이미 여제의 고충에 중독되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린 자객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을 터……. 잠시 후, 남제화가 입을 열었다.

“짐의 뜻을 전하여라. 아운소 공주에게 비단 두 필, 화령잠 한 쌍 그리고 순금 불상 한 좌를 하사하노라.”

강암룡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이었지만, 그는 곧장 황명을 받들었다.

남제화가 아운소에게 하사품을 내렸다는 소식은 곧바로 두 공주의 귀에 들어갔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고여아는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왜 아운소에게만! 이건 공평하지 않은 처사야! 아운소가 뭘 그렇게 잘했다는 거지?”

얼른 전각 안에 있던 아랫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옥합은 고여아 공주에게 귀띔했다.

“공주, 여기는 마온극 부족이 아니라 남원의 황궁입니다. 성질대로 하시면 일을 그르칩니다.”

하지만 고여아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분명히 위지불이가 폐하 앞에서 나에 관한 험담을 한 게 틀림없어. 그 동월 개자식!”

“위지불이가 폐하 앞에서 공주의 험담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폐하께 아운소에 관한 칭찬을 했을 가능성은 농후합니다. 궁인들에게 들으니, 폐하께서 위지불이를 굉장히 총애하시어 늘 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모자라 한 침대에서 함께 주무시기도 한답니다.”

고여아는 경악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 폐하의 남총이란 말이냐?”

“그가 어떤 사람이든 폐하의 총애를 받으려면 공주께서도 그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옥합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지만, 고여아는 위지불이가 진심으로 싫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궁 안 사람들은 남원의 황제가 파목 부족의 공주 아운소에게 푹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공작전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하사품을 내렸다. 세 공주가 입궁할 때는 서로 기세가 비등했지만, 지금은 아운소가 두각을 나타내며 유력한 황후 후보로 떠올랐다.

위지불이의 견해도 모두와 마찬가지였다. 남제화는 아운소에게 반한 게 확실했다. 그는 아운소에게 하사품을 줬을 뿐만 아니라 항상 그녀와 같이 있었다. 예전엔 위지불이와 아운소가 공작에게 먹이를 줬다면 지금은 남제화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위지불이는 사실 조금 울적했다. 그녀에게 겨우 찾아온 친구를 남제화에게 빼앗길 줄이야! 더욱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아운소의 태도였다. 매일 같이 황제와 함께 궁중에서 활개를 치니 당연히 봄바람이 불고 득의양양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아운소는 그렇지 않았다.

황제와 같이 있을 때보다 위지불이와 함께 다닐 때 그녀의 기분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함께 있으면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냈고, 때론 위지불이가 연주하는 엉터리 곡조에 춤을 추기도 했다.

반면 남제화와 함께 걸을 때, 그녀는 담담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말을 할 때도 부드럽고 잔잔한 말투여서 마치 나사 공주가 빙의한 듯 보였다.

위지불이는 혼자 궁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걸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남제화와 아운소가 함께 있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들은 나란히 걸으며 양팔을 맞닿게 했다. 남제화는 아예 아운소의 손을 잡았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주위엔 궁인들과 시종들이 많았다. 위지불이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 장면을 다 보았다. 위지불이는 아무 내색 없이 땅에서 꽃 한 송이를 따서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꽃 뒤로 그들의 모습은 선명히 보였다.

아운소는 황제의 손을 뿌리치더니 그에게 송구하다는 듯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남제화는 씩 웃으며 아운소 머리 위에 떨어진 꽃잎을 떼 주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다정한지……. 지켜보던 이들은 절로 아운소를 부러워했다.

위지불이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런 그녀 옆으로 한 여인이 찾아왔다.

“불이 공자.”

위지불이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나사 공주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나사 공주.”

나사는 한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제가 만든 간식입니다. 불이 공자, 한번 드셔 보시겠어요?”

위지불이는 작은 떡 한 조각을 입에 넣고 감탄했다.

“맛있어요. 공주, 음식 솜씨가 좋으시군요.”

나사는 바구니 통째로 위지불이에게 건네주었다.

“공자께서 좋아하시니, 전부 가져가서 드세요.”

위지불이는 급히 사양했다.

“그건 말도 안 돼요. 공주께서 힘들게 만드셨는데 제가 받아먹기만 하면 예가 아니지요.”

나사는 웃으며 답했다.

“저에게는 또 있어요. 공자께서 싫어하지만 않으시면 괜찮아요.”

위지불이는 식탐이 많았다. 나사 공주가 굳이 주려고 하자 그녀는 사양치 않고 받았다.

“공주께서 이렇게 음식 솜씨가 좋으니 황상께서도 먹을 복이 있으시네요.”

나사는 좀 떨어진 곳에 함께 있는 남제화와 아운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황상의 눈에 찰지 모르겠네요.”

“설마요. 공주께서 이렇게 어질고 현명하신데, 혹시 황후가 못 되더라고 분명 귀비 마마가 되실 게 틀림없어요.”

“황상께서는 결정을 내렸나 봐요. 아마도 아운소를 황후 자리에 앉히겠죠.”

위지불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석 달의 기한은 아직 멀었어요. 지금 결론 내리기에는 너무 일러요.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언제나 희망은 있으니까요.”

“공자는 저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위지불이는 코끝을 긁적거렸다.

“전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몇 번의 암살 시도를 실패해 그녀가 의기소침해 있을 때, 남제화도 이렇게 그녀를 격려했다. 결국 그의 따뜻함에 그녀는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었고, 오늘 내일을 알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저 멀리 걸어가던 두 사람은 꽃나무 아래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머리 위에 가득 핀 하얀 꽃잎이 눈처럼 내렸다. 지는 해의 잔광은 내리는 꽃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나무 아래 선 남자의 빼어난 옥골선풍玉骨仙風(흰 피부와 신선같이 고결한 풍채)과 여인의 매혹적인 명모호치明眸皓齒(맑은 눈과 하얀 이) 덕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림 속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로 같은 곳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잠시 후, 아운소는 탄식처럼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불이가 또 새 친구를 사귀었네.”

남제화는 미소를 지으며 위지불이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중독된 이후, 녀석은 시든 가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운소와 함께 있을 땐 이전의 웃는 모습을 되찾곤 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새 친구를 빼앗아 갔다.

“질투하는 것이오?”

아운소는 그의 어휘 선택에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불이가 외로워하는 게 느껴졌거든요.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게 불이에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잠시 망설이던 아운소는 다시 물었다.

“폐하, 불이는 동월인이 아닙니까? 왜 돌아가지 않죠?”

남제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수 없소.”

“왜요? 가족이 아무도 없어요?”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저 애는 동월로 돌아가면…….”

말을 하다가 말며 그가 반문했다.

“어째서 이런 걸 물어보는 것이오?”

그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심장이 철렁한 아운소는 얼른 눈을 떨구었다가 다시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는 다시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방금 전, 그녀가 보았던 그 매서운 눈빛은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았다. 아운소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제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시오. 짐의 앞에서 뭐든 말해도 괜찮소.”

아운소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 궁중에 불이가 폐하의 남총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순간 당황한 남제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인데 아직도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단 말이오?”

아운소가 더듬거렸다.

“그 말씀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가요?”

남제화는 미간을 문질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불이는 뱀을 무서워하오. 한데 그 애의 침대에 몇 번이나 뱀이 기어 올라와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소. 그때 짐의 침대에서 잠을 잔 적이 있는데, 그게 아랫사람의 눈에 띄어 그런 소문이 났었소. 짐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오. 몸이 바르면 그림자가 비뚤어져도 아랑곳하지 않는 법이지 않소. 아직도 그런 소문이 돌다니… 짐이 한번 따끔하게 말해야겠군.”

아운소가 말했다.

“그래도 폐하께서 불이를 총애한다는 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애는 아직 어리오. 짐은 그 애를 그저 어린아이로 여기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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