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797)화 (796/1,192)

제797화

“불이 공자, 어서 오세요.”

그리고는 얼른 고개를 돌려 시녀에게 명했다.

“소상아, 불이 공자께 드릴 무이차를 가져오너라.”

위지불이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공주께서는 저를 이름으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운소가 매력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절 아운소라 불러 주세요.”

위지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을 둘러봤다.

“공작전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사실이네요. 아운소, 폐하께서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봐요.”

아운소는 싱긋 웃었다.

“그런 말 마세요. 제가 공작전에 들어온 이후로 저를 보는 고여아의 눈빛이 달라졌어요. 처음부터 차별을 두는 건 별로 좋지 않아요.”

소상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공주만 그렇게 생각하세요. 고여아 공주가 공작전에 배정되었으면 얼마나 우쭐댔을까요?”

아운소는 소상을 한 번 째려보더니 위지불이에게 차를 권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차인데, 일 년 내내 운무雲霧 속에서 자라는 귀 모양의 찻잎이에요. 그래서 무이霧耳차라고 하죠. 매년 수확량이 많지 않아요. 폐하께서도 아직 맛보신 적 없는데, 불이에게 먼저 맛보여 주는 거예요.”

위지불이가 하하 웃었다.

“이거 영광인데요?”

그녀가 작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물은 투명한 노란색을 띠고 있었지만 향은 짙게 느껴졌다. 차를 한 입 머금자 깊고 진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고 목 뒤로 넘길 땐 부드러운 단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맛있네요.”

“찻잎이 많지 않아서 선물할 수는 없어요. 혹시 마음에 든다면 언제든지 차를 마시러 오세요.”

위지불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운소는 거짓을 꾸밀 줄 모르며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새로 사귄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불이, 저에게 동월에 관해 이야기해 주세요.”

아운소가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동월은 땅이 넓고 곳곳이 다 번화하다고요? 기회가 되면 정말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원 황궁에 왔으니 더더욱 동월에 갈 기회는 없겠지요. 이런 저를 위해 이야기를 해 주세요.”

위지불이는 임안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황궁. 하루에도 수없이 드나드는 상인들과 동서남북 어디에든 있는 사기 상점.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함. 다리 아래에서 하는 잡기 공연, 정양절의 용선 경주,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 등등.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전부 다 이야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아운소의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얼굴엔 동경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소상도 옆에서 넋을 잃고 위지불이가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위지불이는 원래 말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원에 온 뒤로 혹여 여자라는 게 들통날까 봐 말을 아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동성 친구를 만나서일까, 신이 난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 냈다. 흥분해서 이야기할 때면 손발을 휘저어 가며 열정적으로 설명해서 아운소가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다만, 목이 쉰 듯한 굵은 목소리가 분위기에 맞지 않을 뿐이었다.

모처럼 흥이 나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가 위지불이의 흥을 깼다.

“이런, 불이 공자가 계셨군요. 어쩐지 시끌벅적하더라.”

고여아와 나사였다. 이건 드문 일이었다. 입궁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세 공주는 이제껏 사적인 접촉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운소는 그들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고여아는 어디에서나 양보 없는 주역이었다. 그녀가 오자 위지불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누차 고여아가 그녀의 말을 끊었기에 위지불이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많아졌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가라앉았다. 위지불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나사는 들어올 때부터 침묵했다. 고여아가 말을 많이 했지만, 상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고향인 마온극 부족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떻게 함정을 파서 짐승을 죽이고, 어떻게 짐승의 껍질을 벗겨 요를 만드는지 등등…….

아직 어린 아가씨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일을 즐겁게 이야기하다니. 위지불이는 듣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웠다. 공주들은 다 귀하게 자라는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 칼을 든 자객은 부족 공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여아가 굵은 쇠몽둥이로 짐승의 눈구멍을 꾀었다는 말에 위지불이는 창백한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아운소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공작전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아운소가 고여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뭘 그리 자세히 말하나요? 동월 사람인 불이가 그런 걸 들어봤겠어요? 왜 사람을 놀라게 하고 그래요?”

고여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 정도에 깜짝 놀란다고요? 우리 마온극 부족의 용사에 비하면 정말 남자도 아니네요. 장담하는데 위지불이가 흑곰 사냥을 나가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게 틀림없어요.”

위지불이가 막 공작전을 나서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불이 공자, 잠시만요.”

위지불이가 뒤를 돌아보니 나사 공주였다. 세 공주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껏 남제화에게 다가가지도 않고 그녀에게 친한 척하지도 않았다.

“나사 공주, 왜 나오셨어요?”

“고여아가 너무 떠들어서요. 전 조용한 것이 좋아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나왔죠.”

나사는 웃으며 말했다.

“불이 공자, 제 처소에 잠시 앉았다가 가시겠어요?”

차분한 나사 공주의 제안에 위지불이는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천전에 들어서자 나사가 말했다.

“제겐 아운소의 것만큼 좋은 찻잎은 없어요. 대접이 소홀하다 여기지 말아 주세요.”

위지불이는 나사 공주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싶었다. 남제화의 황후를 찾기 위해선 당연히 면밀하게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나사 공주는 거친 부족의 공주답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성격에 동월의 공주처럼 보였다.

위지불이는 나사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녀에 대해 깊이 알 수는 없었다. 나사는 위지불이에게 고향에서 가져온 육포를 선물했다. 육포를 챙긴 위지불이는 더 늦기 전 옥천전을 나왔다.

위지불이는 걸어서 돌아가는 길에 아운소와 나사를 비교했다.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아운소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한편으로는 차분한 나사가 황후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손에 든 육포를 바라본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남에게 뇌물을 받으면 공평하게 생각할 수 없는 법. 지금 당장은 쉽게 판가름을 내기 어려운 문제였다.

* * *

음산하고 화려한 감옥, 여제는 한 손에 청옥잔을 든 채 보석이 박힌 흑단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잔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뿌연 연기는 그녀의 얼굴을 흐릿하게 할 정도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몹시 괴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잠시 후, 흰 안개가 짙게 뭉쳐지더니 실처럼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한 마리의 뱀처럼 여제의 콧속으로 사라졌다. 여제는 즐거운 듯 눈을 감은 채 그것을 음미했다. 하얀 연기가 다 사라지자 여제는 그제야 눈을 뜨고 아무렇게나 잔을 던져 놓았다. 기둥 뒤에서 나타난 남자는 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그녀 앞에 나타나 예를 취했다.

“태황 폐하.”

“황상과 공주들은 잘 지내고 있느냐?”

“태황 폐하께 아룁니다. 황상께서는 공주들과 잘 어울리고 계십니다.”

“황상은 어느 공주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으냐?”

은색 가면의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했다.

“황상께서는 파목 부족의 아운소 공주에게 호감이 있는 듯합니다. 그녀에게 공작전을 배정했습니다.”

여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파목 부족은 좀 약해.”

은색 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태황 폐하, 황상께서 석 달의 기한을 정하셨으니 아직은 시기상조라 사료됩니다. 모든 것이 확실치 않습니다.”

여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위지불이는 아직도 분수를 모르고 설치고 다니느냐?”

“위지불이는 늘 그렇듯이 매일 궁전을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데, 단지…….”

“또 무엇이냐?”

“아운소 공주와 관계가 좋은 것 같습니다.”

은색 가면의 남자가 덧붙였다.

“그동안 그가 공작전에 자주 방문했습니다.”

“황상은 뭐라더냐?”

“별말 없으셨습니다. 그저 나이대가 비슷하니 친구로 사귀는 건 무방하다고 하셨지요.”

여제는 잠시 침음하더니 돌연 눈웃음을 지었다.

“황상이 개의치 않는다? 이건 과인에게 시위하는 거다.”

은색 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폐하께서 이미 위지불이에게 고충을 심으셨으니 이참에 아예…….”

“아니, 황상이 그 녀석의 목숨을 중시하고 있다. 위지불이를 죽인다면 더 이상 과인에게 협조하지 않겠지. 위지 가문은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남원에 자객을 보내 나를 죽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위지문우 말고는 제대로 된 놈이 없었지. 황상은 위지문우와의 옛정 때문에 위지불이를 감싸는 것이다. 그러니 잠시 살려 두어도 된다.”

“알겠습니다.”

은색 가면을 쓴 남자는 허리를 깊게 굽혀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 * *

아운소와 위지불이는 공작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분명 공작들의 먹이를 오랫동안 챙겨 준 사람은 위지불이인데, 그들은 아운소의 말을 더 잘 들었다. 아운소가 입에서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공작들은 그녀의 신호에 따라 꽁지깃을 펼쳤다. 심지어 나풀나풀 춤을 추기도 했다. 위지불이는 깜짝 놀랐다.

“얘들과 대화할 수 있어요?”

아운소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에는 공작이 아주 많아요. 그들은 항상 제 방 창가에서 울거나 춤을 추곤 했죠. 항상 곁에서 관찰하다 보니까 자연히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게 됐어요.”

위지불이가 말했다.

“어쩐지… 공작과 함께 자랐군요. 공작은 춤의 혼령이라고 하던데, 혹시 춤을 공작한테 배운 거예요?”

“그런 셈이지요.”

아운소는 흥이 돋았다.

“불이가 가락을 연주해 주면, 내가 춤추는 거 보여 줄게요.”

위지불이는 쑥스러운 듯 코끝을 긁었다.

“나는 연주할 줄 몰라요.”

“동월 사람들은 가무를 싫어해요?”

“좋아해요.”

위지불이는 설명했다.

“하지만 동월에서는 전문 훈련을 받은 사람만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춤을 출 줄 몰라요. 게다가 아가씨만 춤을 추고 보통 남자들은 춤을 추지 않아요.”

아운소가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왜 남자는 춤을 안 춰요? 우리 남원 남자들은 모두 춤을 춰요.”

“동월의 남자들은 춤을 추지 않고 무술을 연마해요.”

위지불이는 단도를 뽑아 보여줬다.

“무공에 대해 아세요?”

아운소는 단도를 잡은 위지불이의 손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우리의 칼은 짐승에게만 쓰고,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요. 연주를 할 줄 몰라도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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